2022년 5월 13일 홍콩시티대학 신유학 세미나
2022년 5월 13일, 오늘은 안동대학교 정종모 선생님을 모시고 귀중한 세미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이천의 정치사상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중첩>이라는 논문을 놓고서 발표와 토론이 있었는데, 저는 불행히도 ZOOM 회의에서 "손 흔드는 기능" 사용에 익숙하지 못해 질문조차 못 드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갈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류 학계와 다른 제 이해에 관해, 정리 삼아 몇 글자 옮겨놓고자 합니다.
1. 동기주의와 결과주의
우리가 일단 동기주의와 결과주의에 대해 깊게 파고든다면, 셀 수 없이 많은 "서로 다른 종류의" 동기주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결과주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흔히 동기주의와 결과주의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일치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동기주의는 "동기만 좋으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괜찮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결과주의는 "결과만 좋으면 동기나 과정은 옳지 않아도 된다."라는 상반된 문제점을 드러내지요. 이렇게 짜여진 프레임 속에서 우리들은 어정쩡해지고 맙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 어렵지요. 한국인들에게는 동기주의가 직관적으로 좋아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나빠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이 프레임에는 큰 결함이 하나 있습니다: 공자나 맹자 같은 유학자들은 인의예지의 본성이나 천리를 언행의 동기로 삼습니다.(칸트와는 이 점에서 다릅니다. 동기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동기로 삼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칸트는 성악설을 주장하며, 선한 본성을 동기로 삼는 공맹의 유학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그 대신 칸트는 "선의지"를 동기로 삼습니다.) 자, 그런데 선한 본성을 동기로 삼을 때 "좋은" 결과는 무엇이고, "나쁜" 결과는 무엇일까요? 공자나 맹자는 "정의로운 결과"가 곧 "좋은 결과"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많이 벌거나 지위가 높아지는 결과"는 정의로운 결과의 부수적 효과일 수는 있지만, 유학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정의로운" 결과와는 다릅니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유학에서는 동기가 좋으면 결과도 좋습니다. 그 결과가 "남들 보기에" 나빠 보이고, 큰 돈이나 명예가 되지 않아도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은 결과를 모두 물질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유학을 오해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정의로운 결과"라니, 맥빠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런 레토릭에 익숙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문재인 전 대통령은 결코 "결과는 부국강병이 될 것입니다."라던가 "결과는 GDP 5만불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결과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부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의미에서 볼 때, 유학자들은 동기주의와 결과주의 사이에서 헤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의로운 동기에서 행동했고 정의로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동기와 결과 사이에 모순은 없었습니다. 아마 이까지 읽고서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래서, 정의로운 동기에서 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해요? 정의로운 동기로 살다가 굶어 죽으니까 좋아요? 정의로운 동기만 있으면 나라를 빼앗겨도 괜찮은 것인가요?" 이런 구체적인 사례들에 답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제 생각을 빨리 스케치해 놓는 자리라서 이쯤에서 이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겠습니다.
2. 왕도와 패도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란과 오해를 불러오는 것이 바로 이 "왕도와 패도" 개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본디 유학에서 왕도와 패도 개념은 <맹자-공손추 상 3>에 보입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힘力으로 仁을 가장하는 것을 패覇라고 하며, 덕德으로써 仁을 행行하는 것을 왕王이라고 한다.(孟子曰 以力假仁者 覇 覇必有大國 以德行仁者 王 王不待大 湯以七十里)" 맹자는 왕도를 옳은 것으로, 그리고 패도를 그릇된 것으로 봅니다. 패도는 한 마디로 의롭지 않은데 의로운 척 하는 "가식"입니다. 패도는 거짓이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떤 진실이나 선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패도"와 "패자(覇者)"를 구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한 고조나 당 태종과 같은 패자는 비록 패도를 따른다고는 하지만, 24시간 365일 패도만 행하는 인물은 현실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조폭들도 가족들에게 따뜻한 남편이자 훌륭한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항상 훌륭한 일만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악한 인물도 온종일 악한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왕도 뿐만 아니라 패도 또한 좋게 봅니다. 이래서 현대학자들은 이런 저런 논의들을 뒤섞어서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선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맹자와 주자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해하면 되며, 순자의 논의까지 끌어들여 혼란을 자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도와 패도 이야기는 아래에서 더 이어가겠습니다.
3. 상도(常道)와 권도(權道)
이 개념 또한 얼마나 많은 학자들에게 오해되는지 모릅니다. 일단 상도(常道)는 영원히 변치 않는 올바른 도립니다. 그리고 권도(權道)는 상도에 따라 현실을 사는 방법을 말합니다. 오늘 세미나의 주인공이었던 북송의 유학자 정이천은 "사태에 임하여 경중을 고려하여 의리에 부합하도록 대처하는 도리를 권(權)이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권도 또한 상도와 마찬가지로 "옳은" 도리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은 "권도"를 "의리에 어긋나도 상관없으니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임기응변"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정이천은 "권도가 곧 상도이다.(權卽常)"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권도는 결코 상도와 동떨어진 임기응변이 아닙니다. 권도와 상도는 인의예지의 천리에 부합한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권도야말로 우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야 할 방도이죠. 상도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이제 상도를 현실 속에서 이치에 맞게 적용시키는 구체적인 방안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상도와 권도, 그리고 왕도와 패도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맹자와 정이천, 주자에 따르면 상도와 권도는 모두 왕도에 속합니다. 그리고 상도와 권도는 둘 다 패도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상도는 물론이요, "권도 또한 패도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권도가 때로는 패도에 속하며, 심지어 "왕도/상도 vs. 패도/권도"라는 프레임까지 당연시합니다. 이는 맹자와 주자의 철학 내에서는 절대 옳지 않습니다. 패도는 도리에 어긋난 궤도(詭道)입니다. 그리고 궤도詭道는 상도나 권도와는 관계 없습니다. 이 점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권도는 결코 패도가 아닙니다. 권도는 왕도에 속합니다.
남송의 유학자인 주희와 진량은 12세기에 유명한 "왕패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 왕패 논쟁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또한 많은 학자들에게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핵심만 정리해놓고자 합니다. 진량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선배 철학자인 주희는 진량의 학문에 문제가 많다고 타이릅니다. 진량은 매우 뛰어난 지능을 소유했지만, 어려서부터 영웅들에 대한 글들을 읽기 좋아했으며, 그의 히어로는 한 고조나 당 태종이지, 결코 공자나 맹자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진량은 선배 철학자인 주희가 한 고조나 당 태종을 "패자霸者"라고 평가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주희가 패자라고 불렀던 영웅들은 모두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드러진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사람들이 "패자"라면, 그 패자가 따르는 패도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지 않을까요? 이 때문에, 진량은 "패도에도 좋은 점이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주희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진량은 "결과가 이렇게 좋으니, 동기에도 뭔가 좋은 점들이 없지는 않겠지."라고 결과주의 입장에서 논리를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논의를 보면, 권도와 상도, 패도가 구분 없이 마구 섞여 돌아갑니다. 한 마디로 공부가 정밀하지 못한 것이지요. 진량도 옳은 것을 행하고 그릇된 것을 피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 속에서 옳고 그름의 분별은 치밀하지 못하고 뒤섞여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희는 진량과 몇 번 편지를 주고받다가, 그냥 접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주희의 주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지만, 패도를 추구하는 인물이라도 1년 365일 내내 패도만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한 고조나 당 태종에게도 마냥 문제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희는 요순은 "왕자", 한 고조와 당 태종은 "패자" 이렇게 단정해버린 뒤, 패자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이 때문에, 진량의 속이 매우 상했겠지요. 이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가르치려는 열망이 앞선 나머지, 주희는 종종 매우 딱딱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 당대에는 "꼰대" 소리 좀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세미나 중에 떠오른 단상들을 빠르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께서는 다소 지루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독자들을 지치게 할 글들을 종종 쓸 예정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읽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