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예와 법의 관계, 그리고 기독교 사랑과 분노의 관계
앞선 글에서는 "주자학에서 예와 법의 관계"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조선의 통치 이념이었던 주자학에서는 존천리 알인욕(存天理 遏人慾)이라 해서, "천리를 보존하고(存天理) 삿된 욕심을 막아낸다(遏人慾)"는 투웨이 수양 전략을 제시합니다. "천리=인간 본성=사람다움=인간다움"이며, 인욕(人慾)은 "인간다움에 어긋난 잘못된 생각"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예는 "존천리=인간다움에 따라 살기"에 적용되며, 법은 "알인욕=인간다움에 어긋나는 잘못된 생각을 막아내기"에 적용됩니다. "예법"이라는 말도 있듯이, 현실 속에서 예와 법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으며 혼용되거나 겹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 원리에서조차 혼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자학에서 인간본성=인간다움이며, 인간다움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고 불립니다. 반면에 인간다움에 어긋난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악"하다고 불립니다. 그리고 "인간답게 사는 것"과 "인간답지 않게 살지 말기"는 동일한 비중을 지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자가 후자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학에서는 "예"가 "법"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합니다. 인간다움을 양성하는 예가 빠지고 법만이 중요시되는 사회는 곧 "규제만능주의"나 "사법만능주의"로 귀결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인간다움이 사라지고 법만이 남은 디스토피아를 잘 묘사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와 같은 개념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 "예치"나 "법치" 등의 개념어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치나 법치라는 용어를 공자나 맹자가 사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저와 같은 개념어가 오히려 학계 전반에 큰 오해와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유교는 예치를 중시하는가? 그렇습니다. 유교는 법치를 중시하는가? 물론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교에서 예와 법은 각자의 영역이 있으며, 어느 하나도 결여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학자들은 "유교는 예치이며, 법치가 아니라"고 입을 모읍니다. 왜냐하면 한비자의 법가 통치방식을 "법치"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자마자 곧바로 "그러면 유교 국가에서는 법이 없었단 말이냐? 그러니까 법치도 유교에 있지."라는 반론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한비자는 성악설을 주장했거든요? 그래서 학자들은 황당하게도 "유교 국가는 현실적으로는 예치와 법치를 모두 사용하며, 현실적으로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혼용한다. 어쩔 수 없지 않냐? 성선설만으로 어떻게 사냐?"라고 결론 내립니다. 결국 성선설도 예도 법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대참사이지요. 공자와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중요함과 동시에, 우리가 인간 본성에 어긋난 악한 생각을 하고 산다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다움"이 삶의 기준이며, 인간다움에 어긋난 잘못된 생각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 또한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한 장려와 바르지 않게 사는 것에 대한 재제는 양쪽 모두 개인과 사회 전체를 위해 필요합니다. 학계에서 만들어낸 예치나 법치, 덕치의 개념은 백해무익합니다. 그냥 유학에서는 인간다움을 삶의 기준으로 삼되, 인간답게 살기를 권하고 인간답지 않게 살기를 막는 등 삶의 모든 영역을 조화롭게 가꿔나간다고 이해하면 그만입니다.
저는 인간 본성은 인(仁)이며, 仁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나 사도 바울 또한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라 가르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저는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이와 같은 이해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대 신학자뿐만이 아니라, 마틴 루터와 같은 과거의 대학자들 또한 진심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의 구체적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분노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나는 원죄를 타고난 죄인이며, 내 안을 들여다 보면 잘못되고 사악한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니, 웃기는 소리입니다. "분노의 하나님"이 더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내 안 어디에서도 사랑의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오직 분노의 하나님만을 느낍니다. 물론 나는 신학자로서 사람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설교합니다. 하지만 내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이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썩어 빠진 세상은 사랑으로 바꿀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분노만이 유효합니다, 등등.
이 "사랑의 하나님 vs 분노의 하나님"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으며, 이와 같은 프레임은 인(仁)을 "사랑"이라고 번역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맹자가 말한 인간 본성을 그냥 "인간다움, 사람다움"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고 보며,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독특하게도 "인간다움"이나 "사람다움"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인간을 그토록 불신하고 냉소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인간다움"은 좋아할까요? 뭐, 저로서야 인간다움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인간 본성을 인간다움이라고 쓰지, 이런 태도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본성을 번역함에 있어 "인간다움"이나 "사람다움"이라는 표현은 "사랑"이라는 표현보다 확실한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다움에는 "사랑"과 "분노"가 모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인간다움에는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이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는 인간 된 입장에서, 인간적인 것을 사랑하고 비인간적인 것을 싫어합니다. 비인간적인 것을 싫어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독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것을 사랑하시고, 그릇된 것에 분노하십니다. 사랑과 분노는 모두 하나의 신성(神性 신의 본성)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분노하시지 않아!"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은 구약 성경을 한 번 펼쳐보십시요. 하나님은 어찌나 화를 많이 내시는지, 마치 어벤져스의 헐크 같습니다. "I am always angry!"
또한 "사랑의 예수님은 분노하시지 않아!"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은 신약 성경 <요한복음>을 펴보시지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한복음 2:13-16>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장사꾼들의 상을 엎으시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띠셨겠습니까?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셨겠지요. "사랑의 예수님은 결코 분노하지 않아!"라는 기독교인은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내가 잘못하면 화를 내지?"라고 말하는 자기 중심적(self-centered) 유치원생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저 미취학아동적인 발언은 사실 철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하며, 나아가서 인간의 본성이 사랑이라는 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내가 잘못하면 화를 내지?는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잘못하면 화를 내지!"로 결론이 나야만 합니다. 사랑하니까 화도 내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화조차 나지 않습니다. "여보세요, 그런 주장이야 가족끼리니까 할 수 있지요. 생판 모르는 남에게도 그런 논리가 적용이 됩니까?" 라는 반론이 금세 들어옵니다. 하지만 저는 논리란 일관될 수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답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다움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마땅히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인간답게 사는 것을 사랑하고 응원합니다. 이 때문에, 내 친자식이 아닌 타인이라도 그가 인간답게 살면 좋아하고, 그가 인간답게 살지 않으면 미워합니다. 이 사랑과 미움은 모두 "인간다움은 좋은 것이고 사랑받을 만한 것이다"는 본성적 이해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좋아하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과정은 참으로 피곤하고 달갑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약 중독"조차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싶어하는" 인간 본성을 반영합니다. 다만 대상이 잘못되었을 따름이지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종일 사랑을 나누어 보십시요.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하지만 하루종일 특정 대상에게 증오를 퍼부어 보십시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내 사랑의 대상이 사랑받을 짓을 하지 않으니까 미움이 솟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사랑받을 대상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회초리까지 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미워하기도 한다."라는 말은 연애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나 말썽꾸러기 자식을 키워 본 부모라면 사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일단 책상머리에 앉아서 머리로 이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 자꾸 말이 꼬입니다. "아니, 사랑하면 내게 화를 내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한다면서 왜 내게 화를 내죠?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의외로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이점을 해결하지 못해 최악의 이론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다만 아주 소수의 철학자들이 겨우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거대한 코끼리의 다리나 코를 더듬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칼 야스퍼스인데, 그는 <철학> 2권에서 "사랑하면서의 투쟁"에 관해 다루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랑하면서의 투쟁"이라니, 무슨 변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우리들이 가장 알기 쉬운 언어로 바꾸면 바로 "사랑 싸움"입니다. 연애 경험이 많은 도사들은 사랑하는 두 연인이 10년을 사귀면서 다툼 한 번 없었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피상적인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연인들의 사랑 싸움은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개인 또한 성장시키죠. 싸움이야 당연히 서운한 상황이 발생할 때 일어나지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칼 야스퍼스의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사랑의 하나님이 동시에 분노의 하나님이 되는 모순(그렇습니다, 철학자들은 이를 모순이라고 말하지요)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그렇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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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봅시다. 맹자가 말하는 인간 본성은 오늘날 표현으로 "인간다움" 또는 "사람다움"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사랑하고 비인간적인 것에 분노합니다. 이 때문에 내 안에는 사랑과 분노가 공존합니다. 이는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간다움의 본질은 분노가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사랑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분노가 가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는 본성상 자연스러운 바램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사랑 받기를 원하고, 미움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는 본성상 자연스러운 바램입니다. 이 때문에 인(仁)을 "인간다움"이라고 옮긴다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인(仁)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仁)을 "사랑"이라고 옮기면, "그러면 미움이나 분노는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라는 반론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브런치를 읽어주시는 소중한 독자께서는 이와 같은 말장난에 휘둘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개념화 작업은 오직 철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만이 당해야 할 고통입니다. 내용 자체는 알고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