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미국과 유럽 인문학계는 "감정의 시대"라는 혁명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감정은 이성과 구분되며, 감정에는 이성적 요소가 없다. 감정=주관적/이성=객관적, 감정=진리와 관계없다,이성=진리와 관계있다 등등의 등식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정서심리학과 뇌과학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제 감정에도 인지 작용이나 이성적 기능이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감정의 이성적 판단 기능을 "시비지심"으로 본 맹자의 철학이 점차 "서양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직까지도 학계는 이성/감정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기에는 갈 길이 멀어보입니다. 왜냐하면 주류 학계는 "감정을 배척해서는 안 되니, 감정과 이성은 나란히 가야 한다"라거나 "감정과 이성은 서로 뒤섞여 있다" 등으로 타협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성적 판단의 주체가 곧 감정 주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존재한 인간 중에 "감정과 별도로 존재하는 이성"이라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낸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임마뉴엘 칸트와 같은 소설가만이 존재했으며, 그 비현실적인 소설은 오늘날에도 학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성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성"이라는 단어를 남발합니다. 저는 감정과 별도로 존재하는 이성은 따로 없고, 오직 감정 주체가 내리는 "이성적 판단"만이 존재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만약 감정과 이성이 별도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자아가 2개인 셈입니다. 그야말로 정신분열적 이론이고 현실에 맞지도 않는데,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에게는 감정과 이성이 각각 따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우리가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없지만, 이성은 그게 어느 구석에 박혀 있던가요? 감정이나 본성과 별도로 존재하는 "순수 이성"이나 "실천 이성"의 존재를 증명해낸 학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던가요? 이처럼 아무런 근거 없는 소설에 몇 백년 동안 학자들은 붙들려 있습니다. 이미 수백 년 전 스피노자가 이 문제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듣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이성 vs 감정"의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학자들의 노력만 해도 정말 진일보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런 이분법의 해체도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프레임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다름이 아닌 "감정 vs 유사감정"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유사감정"이란 "우리가 감정이나 욕구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감정이나 욕구가 아닌 것"을 지칭합니다. 이 프레임을 다루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21세기에 사는 우리조차도 감정이 아닌 것을 감정이라고 부르며, 욕구가 아닌 것을 욕구라고 표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원전 중국 고전에서 "欲욕"이라는 글자가 때로는 "진짜 욕구"를 때로는 "가짜 욕구(욕구가 아니지만 우리가 욕구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쓰이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중국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문제가 하늘에서 떨어진 핵폭탄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사 학위를 받은 현대학자들은 欲이라는 글자를 고대 문헌에서 컴퓨터로 모조리 찾은 뒤 그것의 용례를 분류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欲이라는 글자가 "가짜 욕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만약 어떤 선진 철학자 A가 "欲"을 부정하는 내용이 나올 경우, "현대 연구자는 A는 욕망을 부정했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A의 다른 글에서 欲을 긍정하는 내용이 많이 나올 경우, 그 때부터 혼란스러워하며 "뇌절"하지요. 실제로 선진 철학자 A가 欲이라는 동일한 글자를 쓰면서도 "가짜 욕망을 부정하고 진짜 욕망을 긍정한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제로 옳은 해석일 수 있는데, 이런 가능성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욕구"와 "가짜 욕구"를 구체적으로 우리 일상에서 구별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이미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고, 그에 대한 베스트셀러도 나와 있습니다.
커렌 케이닉은 <가짜 식욕, 진짜 식욕- 가짜 식욕이 당신의 몸과 마음을 망친다>라는 책에서 우리의 몸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진짜 허기"가 아닌, 습관성 "가짜 허기"를 자세히 분석합니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몸이 보내는 신호/진짜 배고픔 가짜 배고픔/진짜 갈망 가짜 갈망/몸이 정말로 원하는 것/몸과 연결되는 스위치/포만감과 만족감/딱 맞게 충분한 순간" 등의 내용이 보입니다. 맹자가 보았다면 뛸듯이 기뻐할 구성입니다. 자,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가족과 함께 정말로 근사한 주말 저녁 식사를 마쳤다고 합시다. 가족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메뉴들을 한 상에 차려놓고 전부 배가 터지게 먹었습니다. 너무 배불리 먹어서 이제 물 한 잔 마실 공간조차 남아 있지 않고 숨쉬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비록 과식했지만 기분은 좋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직장 상사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거래처에서 긴급히 요구한 자료가 있는데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해서 보내야 한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내 혼자 해치워야 한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갑자기 뭔가 입속에 구겨넣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몸이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거부할 상황인데도,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며 술이든 감자칩이든 뭐든 퍼먹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뛰어난 절제심을 지닌 분들은 아마 이런 예가 익숙하시지 않겠지만, 저는 "진짜 허기"로 인해 배를 잔뜩 채운 뒤, 다시 "가짜 허기"로 인해 추가로 음식물을 섭취하고 다음날 고생했던 기억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가짜 욕구는 내 몸과 본성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짜 감정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진정한 욕구가 아니라, 그냥 몸과 감정을 배제한 채 머리로만 생각한 것이며, 습관에 따라 행동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욕구"라고 불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짜 욕구"라면서 또 "욕구"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우리 언어 습관이니까요.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5살과 4살 된 귀여운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어느날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자제들에게 묻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의 꿈은 뭐니? 너희들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아직 유치원도 가지 않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부모들은 흐뭇하게 미소를 짓지만, 정말 절망적인 광경입니다. 그 꼬마들은 의사나 변호사를 "욕구하거나 원하지" 않습니다. 변호사나 의사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 그것을 욕구한다고요? 그들이 말하는 "욕구"가 진정 그들의 본성과 기질과 몸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요?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냥 그 불쌍한 꼬마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그렇게 세뇌당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원합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을지라도, 그들은 실제로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머리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몸이 배제된 순전히 상상이나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지요. 그것은 진짜 감정이나 욕구가 아닙니다. 진짜 욕구와 가짜 욕구는 모두 "욕구"라는 동일한 단어를 써서 묘사됩니다. 사실 책을 제대로 읽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맹자>나 <논어> 등에서 어떤 부분이 "진짜 욕구"이고 "가짜 욕구"인지 가려서 읽을 수 있습니다. 비록 동일한 欲이라는 글자가 쓰였다고 할지라도요.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런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다"라는 판결이 내려지니까요.
묵자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사상가인데, 그의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겸애(兼愛)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universal love" 또는 "impartial love"라고 번역됩니다. 사실 兼이라는 글자는 universal과 impartial을 겸합니다. 문제는 愛입니다. 愛를 "사랑, love"라고 번역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지만, 역시 이런 사소해보이는 점들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는 대학자는 있습니다. A.C 그레엄이라는 학자인데요. 그는 묵자의 兼愛에서 愛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emotion이나 feeling이나 sentiment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겸애란 것은 실제로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냥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아, 전 세계 사람들을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해야지. 그리고 차별하지 말고 사랑해야지." 이런 아이디어일 따름이란 말이지요.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욕구도 없습니다. 그냥 이론이고 말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사랑이나 배려 등의 감정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허구헌날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치는 언행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감정이 아니라 그냥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 이론일 뿐이란 말이지요. <묵자>를 읽은 저는 A.C.그레엄의 겸애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묵자가 말하는 겸애는 "가짜 사랑"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 감정도 없습니다. 하지만 듣기 거창하고 좋죠. 그리고 A.C.그레엄의 통찰력은 사실 학자들이 거의 인정하지 않는 바입니다. 여전히 절대 다수의 학자들은 묵자의 겸애(兼愛)를 사랑의 감정으로 간주합니다. 맹자가 묵자의 무리를 비판하면서, 부모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없는 집단이라고 꾸짖은 것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여기지를 않지요.
오늘날 학자들은 과거의 틀을 깨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이런 노력들은 참으로 중요하며, 한량인 제가 무엇이라 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가 감정에는 "이성적 감정"과 "비이성적 감정" 등이 따로 존재한다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성적 감정이 사실은 진짜 감정이고 비이성적 감정은 가짜 감정이라면? "감정 주체가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니, 감정이 이성적이다. 그리고 비이성적 감정은 사실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라 불리는 가짜 감정이다. 그래서 비이성적 감정에 부정적인 평가를 퍼붓는 것은 쉐도우 복싱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프레임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는 세계철학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영향을 받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학계만 시끄러워질 따름이지요. 학계에서 '가짜 감정/진짜 감정" 등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가짜 욕구와 진짜 욕구를 구분하는 저서들을 많이 접하고 그곳으로부터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