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진행 중인 가운데 얼마전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러시아 군인이 한 살 먹은 우크라이나 여아를 성폭행한 뒤 영상을 유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411_0001827811&cID=10101&pID=10100
이 뉴스와 영상을 보고서 많은 이들은 직관적으로 이렇게 느낄 것입니다. "저게 사람이야? 저게 사람 새끼야?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럴 수 있어?"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사람다움이란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 차근차근히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직관적으로" 인간답지 못한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본인이 정치병 환자이거나 기타 비이성적인 이론 및 선입견의 노예일 경우에는 본성의 목소리보다 편견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저와 같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상 인종차별이나 지역차별을 즐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는 말이 어찌 잘못되었을까요? 이 때문에 남송의 대유학자인 주자는 "성"과 "심"을 구분했습니다. 본성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정신(마음)은 오히려 정반대되는 것을 옹호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퇴계 이황 선생은 양명 왕수인이 "성"과 "심"을 뒤섞어버린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왕양명 본인이야 당대의 유학자이니 어찌 망령되게 행동했겠습니까마는 그의 이론 자체가 지닌 문제점을 학자로서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 학계는 "퇴계는 성리학을 심학화했다"는 이론이 주류를 형성하며, 이제 선행연구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퇴계의 학문은 성즉리의 주자학이지 심즉리의 양명학이 아닙니다. 퇴계 이황은 주자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감정"의 문제가 주자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임을 파악하고 그 부분에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그것이 주자와 퇴계의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가 주자의 성즉리나 성발위정 등의 기본적인 명제를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퇴계학을 정치에 소홀하고 수양에 치중한 학문으로 편협하게 몰고 가는 까닭에, 수양으로서의 심학화되었다는 결론이 유행합니다만,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조차 어떤 이에게 "당신은 왜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십니까? 맨날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라고 핀잔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오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감정이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러시아 군인의 만행을 보면 "본성적으로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가 인간본성에 어긋났다는 점을 어떻게 압니까? 본성은 형이상자이며, 우리가 본성 자체를 들여다보거나 연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성이 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바로 감정입니다.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인간답지 못하게 사고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분노"라는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요. "저건 인간도 아니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어에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직관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을 놓칩니다. 성선설이 옳으냐 성악설이 옳으냐, 성선설의 성은 무엇이며 선은 무엇이며, 악은 evil이냐 bad냐 이런 논의가 수 천 년 동안 끊이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맹자나 퇴계에게 있어서 악의 정의는 간단합니다. "인간 본성에 어긋난 것 = 악"입니다. 그리고 인간 본성에 어긋난 것이 악이므로, 인간 본성 자체는 선하다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중간이나 타협이 없습니다. 인간 본성이 기준이고, 인간 본성에 어긋난 것을 악이라고 부릅니다. 선이라는 용어가 싫다면, 맹자의 성선설을 설명하는데 "선"이라는 단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인간 본성에 어긋난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다시 "도대체 인간다움이란 무엇이요?"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만약 인간다움이란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해를 지니고 있다면, 결국 인간다움에 어긋나는 것이 "악"이라는 설명 또한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맹자와 주자, 퇴계와 스피노자는 모두 "너가 인간인데도 아직까지 인간다움이 뭔지도 몰라?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현실적인 감각을 상실한거야? 정말 인간다움이 뭔지 모르는거야?"라고 되묻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다움을 문자로 자세히 표기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구체적인 사안에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인간다움을 놓치고 살며 헷갈리기까지 하지요. 인간 같지도 않은 특정 정치인이 대선이나 총선 지선에 출마해도, 자신의 지역이나 혈연 학연을 고려하고 정치적 성향을 반영해서 그를 성인군자처럼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후보가 출마했더라도 그가 속한 정당을 보고 지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는 최선보다 차선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인간 같지도 않은 후보를 보통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인간으로 묘사하며 추앙하는 작태들은 구토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슈에 대해서 이와 같은 편견을 지니고 본성에 어긋난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잘못되고 편향된 사고에 매몰되어 잘못된 주장을 일삼는다고 해도, 마음 한 구석에서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는 본성의 목소리가 없다고 자신을 속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잘못을 저지릅니다. 인간인 이상 잘못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답지 않은 것을 인간다운 것으로 옹호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만은 "자기 자신의 정신적 파멸을 막기 위해" 삼가야 합니다. 유학의 "신독"이 유달리 가슴에 와닿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