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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고전은?

2021년 8월, 홍콩 노스포인트역 근처 라마다 호텔에서 자가격리를 하며 시작한 홍콩체류기간이 어느덧 3/4 정도 지났습니다. 7월 초 귀국까지는 아직 어느 정도 남았지만, 그래도 슬슬 마무리를 준비해야 할 단계인 듯합니다. 조선유학 전공자로서 이곳에 와 느낀 점 가운데 하나는 "서양 철학자들이 한국 고전을 공부할 유인이 매우 부족하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은 2022년 현재 경제규모 세계 10위, 국방력 세계 6위의 강국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변수를 빼놓고서 국제정세를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위상은 높아졌으며, 그만큼 전세계 학자들이 대한민국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전세계 학자들이 정말로 대한민국에 대해서 배우고자 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공부하라고" 내어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학계 전체가 크게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의 사례를 들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568070

2016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책이 있으니, 곧 <백년의 마라톤>입니다. 이 책의 내용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냉전시대 때부터 미국 내의 중국 전문가로서 CIA나 외교부 등에서 근무하며 경험을 쌓은 저자 마이클 필스버리는 21세기 중국의 정치와 외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손자병법>과 <36계> <도덕경> 그리고 중국의 천자-제후 봉건제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맹주로 자리잡기 위한 중국의 정책은 천자-제후 봉건 시스템에 기초하고 있고, 중국의 대미 정책은 <손자병법>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자인 마이클 필스버리의 주장만이 아닌, 오늘날 미국 정계의 상식입니다. 실제로 중국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중국 고전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 이데올로기에 따라 구체적인 현대 정책들을 개발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중국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나 중국을 상대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 모두가 중국 고전을 연구할 강한 동기를 얻게 됩니다. 아니, 서구의 정치인이 <손자병법>이나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조공 시스템을 모른다면, 정치인으로서 행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실용적인 서양인들에게 "21세기 시진핑 정부를 이해하려면 <손자병법>을 읽으시오!"라고 자신 있게 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는 전혀 사정이 다릅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정책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의 어떤 문헌을 공부해야 할까요?"라고 어떤 서양학자나 정치인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한국철학 전공자인 저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21세기 한국의 외교정책이나 정치전략은 조선이나 그 이전의 고전 또는 역사적 경험에 바탕해서 개발되고 운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거나 부족하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서양인들의 입장으로서는 다소 맥빠지는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퇴계나 율곡의 철학 등에 골동품적인 취미를 지니고 있는 한줌의 서양학자들을 제외하고, 이제 조선이나 고려나 그 이전의 한국 고전을 읽을 필요성을 외국인들이 지니지 않게 됩니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인 부강국이자 수천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인데도 정책을 구상함에 있어 과거의 경험이 전혀 사용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외국인들이 굳이 한국 고전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문학적인 취미나 전공상의 필요가 아닌 다음에야, 실질적으로 세계를 경영하는 이들이 왜 한국 고전을 읽겠습니까. 한국 정치인들도 읽지 않는 것을.


여기까지 오면 또 슬슬 민족주의와 국뽕이 차올라서 제 견해를 반박하는 주장들이 올라올 듯합니다. 21세기 한국 정치와 외교를 이해할 수 있는 고전, 다시 말해 한국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고전이 왜 없느냐! 가령 <환단고기>가 있지 않느냐! <삼부경>은 어떠냐! 함석헌 선생의 씨알은 어떠냐? 왜 고전이 많은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느냐! 하지만 저는 상기한 서적이나 그에 상응하는 기타 서적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나 외교정책에 반영된다고 믿지 않으며, 외국인들에게 21세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와 같은 "고전"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편 저는 퇴계 이황의 철학 전공자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퇴계 이황의 책을 권하는 것도 그들의 니즈에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정치인들이 <손자병법>을 기초로 외교전략을 짜는 것처럼, 한국 정치인들이 <성학십도>를 바탕으로 정책을 구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율곡의 <성학집요>나 다산의 <목민심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고전들은 참으로 세계적인 명저들이지만, 21세기 국가 정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관련이 있다고 억지로 쥐어짠 연구물만이 소수 존재할 따름입니다.


오해는 없어야 할 것이, 저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조선의 특정 저서를 토대로 국가 경영전략을 구상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저도 학자이자 글쟁이인만큼, 엄청나게 고전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연구물을 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판단은 매우 냉혹합니다. 그런 식으로 연구비를 타내어 쥐어짜낸 성과물 가운데 실질적으로 정책에 반영된 사례가 있습니까? 전부 상아탑 글쟁이들의 펜대 놀음일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투덜거릴 수만은 없습니다. 저는 비록 16세기 철학 전공자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는 개항 이후인 19세기 중반에서 경술국치를 포함해 해방 전후까지 이르는 약 1백 년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1백 년도 훨씬 전이지만, 저는 2022년 국제 상황이 이 때와 그게 다르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다양한 이론과 철학들이 자웅을 겨루었고, 많은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히 국제외교와 관련해서는 이 시기 학자들의 저작을 집중 연구하는 것이 매우 생산적일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홍콩에서 일하는 부서가 <공공행정학과(정치학과)>이다 보니, 국제 정치와 외교 이야기를 계속 하게 되는 듯합니다. 결국 국제정치학자들이 원하는 것은 "여러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이 발휘해야 할 21세기 외교정책을 이해하고 수립하는데 정부가 기초로 삼는 '고전'이 있는가? 있으면 좀 권해주라, 나도 읽어보게!" 이것입니다. 아마 외국 못지 않게 한국의 정치인 또한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비록 제 전공이 아니지만, 요즘 들어 부쩍 제 구미를 당기는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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