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년 2월 12일, 미세먼지 가득한 일요일입니다. 사실 미세먼지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았었는데, 수육에 청국장으로 거한 점심식사를 마친 뒤 1시간 산책하고 들어오니 목이 칼칼하고 눈이 따가웠습니다. 중국이 코로나 봉쇄를 완화하고 경제 부양에 힘쓰기 시작했다는 점이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일희일비할 수는 없지요. 오늘은 경록절 마지막날인 2월 12일, 마포아트센터에서 한국 인디밴드들의 멋진 공연을 봐야 하기 때문이지요.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에는 매해 3대 축제가 진행됩니다. 첫째가 크리스마스이고, 둘째가 핼로윈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번째는 무엇일까요? 바로 '크라잉넛'의 베이시스트이자 '캡틴락'인 한경록의 생일인 2월 11일을 전후한 '경록절'입니다. 크라잉넛은 '룩셈부르크,' '말달리자,' '밤이 깊어가네' 등 수많은 명곡을 지닌, 올해로 데뷔 28주년의 락그룹입니다. 이 개구쟁이 그룹도 어느덧 음악계의 대부 이야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연식이 되었군요. 한경록의 이름에서 비롯된 경록절은 2005년, 한경록이 제대 후 처음 맞는 생일에서 치킨집에 친한 인디 밴드를 모아놓고 술파티를 밤새 벌였던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핵인싸였던 한경록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는 점점 규모가 커졌고, 코로나19가 심각해지기 직전인 2020년 2월 11일에는 홍대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무브홀'에서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세계를 강타하고 뮤지션을 비롯한 자영업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코로나19로 인해 2021년과 22년에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던 경록절은 마침내 2023년, 오프라인 공연으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무려 마포구의 협조 하에 5일 동안이나 대규모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경록은 중세 르네상스가 흑사병을 견뎌낸 후 시작되었듯이, 2023년 경록절은 코로나19를 잘 극복한 한국, 그리고 인디 밴드의 성지인 마포구가 르네상스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누구 못지 않게 대한민국의 성공과 행복을 바라는 그의 진심과 열정은 제대로 결실을 맺은 듯합니다.
<마포아트센터>
오늘 일정은 '김상욱 교수의 물리강연'을 보고 싶다는 지인과 크라잉넛의 콘서트를 보고 싶다는 제 소망이 맞아떨어져 이뤄졌네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흥역에 내려, 2번 출구로부터 기사식당 거리를 따라 마포아트센터로 걸어갑니다. 대흥역 주변이 기사식당으로 유명하다는 점 또한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금번은 시간 관계상 방문하지 못했지만, 다음 번에 공연장을 찾을 때에는 런닝맨에도 나왔던 <원조기사님분식> 등을 방문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TV로든 유튜브로든 유명인이 나오는 예능을 보지 않아서, <알뜰신잡>의 스타 가운데 한 명인 김상욱 교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다만 지인이 보내주는 유튜브 등을 통해, 그가 따뜻하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대중들이 알기 쉽게 물리학을 잘 풀어서 설명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더욱 괜찮은 분이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노안으로 인해 사전예약 버튼을 찾지 못했고, 지인과 함께 현장에서 바로 입장했습니다. 김상욱 교수의 인기에 비해, 생각보다 이 훌륭한 무료 강연을 찾는 분들이 적어서 놀랐습니다. 홍보가 덜 된 탓일까요?
<김상욱 교수, 르네상스의 물리학 강연>
1997년부터 홍대 클럽과 공연장을 제 집 드나들듯이 했던 제게, 홍대입구역 부근은 제2의 고향입니다. 저는 김상욱 교수가 손에 공연팔찌를 차고 방방 뛰다가 시간을 내어 강연장에 들어온 것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대중강연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자기가 모르는 분야를 강의해야 할 때에는 'xxx의 물리학' 형식을 취하면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강연의 타이틀인 <르네상스의 물리학>이었습니다. 과연 저도 앞으로는 'xxx의 철학'을 타이틀로 삼아 강연에 임해야겠습니다. 제가 오히려 자료를 구하기가 더욱 용이하겠네요.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그리고 뒤를 이어 만개한 르네상스, 그를 통해 발전했던 광학과 생물학, 그리고 갈릴레이의 물리학까지, 그의 강연은 물흐르듯 이어졌습니다. 특히 그가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에 '부재의 증명(악마의 증명)'가 지닌 폐해를 강조했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악마의 증명(devil's proof)은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용어로," 어떠한 사실이나 인과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입증해야 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악마의 증명은 사실 과학계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분야를 포함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폐해를 낳고 있지요. 가령 더불어민주당의 친이재명 계열 국회의원들은 '악마의 증명'으로 국민을 오도하고 강성 지지층을 결집시켜 정치적 이득을 노리는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예컨대 그들은 '청담동에서 한동훈 장관이 술자리에 있었다'라고 헛소문을 내고 '더탐사' 등과 함께 그것을 살포한 뒤, 그것이 문제가 되면 '한동훈 장관이 술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장관 본인이 증명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합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청담동 첼리스트 게이트'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자가 그 사실을 입증해야 함이 분명한데도 말이지요. 권태윤은 다음과 같이 꼬집습니다.
“네가 거기에 없었다는 것을 네가 증명해라.”이게 바로 야만(野蠻)이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언행이다. “네가 거기에 없었다는 것을 네가 입증하지 않으면, 너는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법이 살아있는 상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은, 하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하는 과정이 연속된다.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은 끝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결국 '없다는 것을 없다고 증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을 '악마의 증명(devil's proof)'이라고 한다.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아주 비합리적인 논리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악마의 증명' 방식을 차용한 그들의 정치 공세는'(김상욱 교수가 말하는)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국민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단 질러 놓고 아니면 말고' 식의 권모술수가 더 이상 합리적인 대한민국 국민에게 통하지 않을 그 날을 꿈꾸며, 김상욱 교수에게 기립박수(standing ovation)을 보냈습니다.
강연 시간이 끝나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김상욱 교수에게(같은 장소에서 다음 공연이 대기 중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경록절의 주인공이 등장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김상욱 교수와 한경록 베이시스트>
평소 크라잉넛의 팬이었던 김상욱 교수는 한경록 씨가 마포르네상스 행사에 참석해서 특별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하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당장 수락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따뜻하고 흐뭇한 광경이었습니다. 한경록 씨는 9시 공연 준비를 위해 이동했고, 김상욱 교수 또한 마지막까지 공연을 즐겨달라며 퇴장했습니다. 저는 지인과 함께 곧바로 이어지는 <더 바이퍼스>의 공연을 즐겼습니다.
더 바이퍼스는 2017년에 데뷔한 한국의 락그룹입니다. 오늘은 <적색거성>, <불꽃놀이>, <개> 등을 연주했습니다. 저는 이 그룹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는 그들의 열정에 매우 놀랐고 감동했습니다. 이들은 데뷔 이후 경록절 공연에 꾸준히 참석했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팬들을 만날 수 없어서 매우 안타까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과거 홍대 '클럽 데이'가 성행할 때, FF클럽 등에서 인디 밴드 공연을 밤새 술마시며 즐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어제인 토요일에도 홍대 각종 인디밴드 공연장에서 경록절 기념 공연들이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네요. 딱히 약속이 없었던 날인데도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공연장을 찾지 않았지만, 내년에는 저도 정신적으로나마 회춘해서 다시 방방 뛰고자 합니다. 이 날 더 바이퍼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새 앨범 발매기념으로 만든 티셔츠 한 장을 관객에게 던지는 퍼포먼스였습니다. 리드 기타리스트가 연주 중에 냅다 집어던졌는데, 그것이 놀랍게도 제 빡빡머리에 정확히 안착해서 촥 감겼습니다. 저는 졸지에 무료 공연을 보고 티셔츠 한 장까지 get했습니다. 집에 와서 살펴보니, 락스피릿이 충만한 티셔츠였는데, 씹선비인 제가 길거리에 입고 다니기에는 좀 색채와 문양이 강했습니다. 소심하게 집 근처 도서관에 갈 때 입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바이퍼스! PEACE!
공연이 끝난 뒤 3층 플레이맥을 나서 2층 갤러리맥으로 이동했습니다. 가수 김창완 등이 참여한 그림 전시를 보기 위해서이지요.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락스피릿이 충만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큐레이터 분의 복장마저도 심상치 않았지요.
지난 십수 년 동안 경록절 홍보 포스터를 전시 중이었습니다.
마감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아, 작가분들의 프로필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들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이 호랑이 그림의 경우 3D 안경을 끼고 보면 색다르게 다가온다고 했는데, 저는 그냥 맨눈으로 보는 편이 좋았습니다.
그룹 <산울림> 출신의 음악계 대부인 가수 김창완이 이번 경록절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1954년생으로 올해 일흔인 그의 가슴 속에 이런 열정이 있다니, 정말로 본받고 싶었습니다.
지인과 함께 막간을 이용해 떡볶이와 순대로 저녁을 대충 때웠습니다. <신촌맛집 떡볶이돈까스>라는 집인데, 우와, 이 집 순대와 라면, 돈까스가 제법 훌륭합니다. 가성비를 생각하면, 2023년 물가를 감안할 때 이런 집이 서울 시내에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꿀맛 같은 분식을 해치우고, 서둘러 1층 아트홀맥 공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이제 <몽니>와 <크라잉넛>의 공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고백합니다. 사실 저는 몽니라는 그룹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대와 함께>라는 노래는 카페에서 종종 들었으며, 여행을 좋아하는 저는 그 리듬을 자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무려 2005년에 데뷔한 당당한 중견 그룹인데도 제가 몰랐다니요! 저와 지인은 보컬 김신의의 열정적이고 탄탄한 보컬에 그만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크라잉넛을 좋아하지만, 그들의 곡들은 제게 익숙합니다. 게다가 홍대 죽돌이자 축제 매니아였던 저는 그들의 공연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런데 몽니의 경우에는 정말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베이시스트인 이인경 씨가 작사 작곡한 <비밀>이라는 곡은 어찌나 제게 강하게 와닿았는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노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혹시 아직 접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링크합니다.
그룹 몽니는 올해에 새로운 소속사와 함께 다양한 행사를 줄기차게 준비중이라는데, 저는 <비밀> 한 곡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공연을 가 볼 용의가 있습니다. 몽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런 곡을 제게 들려주셔서!
이제 5일간 지속되었던 경록절 행사의 마지막 코너인 크라잉넛 공연입니다.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아트홀맥은 점점 입장객의 숫자가 많아지더니, 이제 제법 넉넉하게 찼습니다. 나이가 제법 있으신 마포구민들도 자리하셨으니,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결집한 축제입니다. 그리고 2022년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누구보다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평가되는 크라잉넛이 노구를 이끌고 공연장에 들어섰습니다.
크라잉넛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펜타포트 공연 실황을 full로 업로드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이번 경록절 공연 자체는 뭐, 더 설명을 덧붙일 수가 없습니다. 진정 크라잉넛다운 공연이었습니다. 게다가 <말 달리자> 연주 도중 흥분한 관객이 윗통을 벗고 난입해서 무대 위에서 덤블링을 하다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만, 그것 또한 크라잉넛 공연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다음에 잘하자> 연주 때에 일어나 "샴페인 풍덩! 데낄라 원샷! 생맥주 마셔! 인생 즐겨!"를 반복해서 외쳤으며, <말 달리자>에서는 말 그대로 말처럼 뛰었습니다. 엔딩곡인 <밤이 깊어가네>를 따라 부르며, 저는 오늘 결국 귀가해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본디 크라잉넛의 경록절 공연은 저녁에 시작해 '지옥에서 끝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마포아트센터 공연은 거짓말처럼 예정된 시간인 저녁 9시에 정확히 종료되었습니다. 물론 젊지 않은 나이인 제게는 오히려 이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나이는 먹었으되 절제심은 초딩 수준인 제게, 공연이 이 선에서 마무리된 것이야말로 진심 감사한 일이죠. 술을 마시지 않는 지인과 냉큼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서, 집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 유명 수제맥주 공장인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업어온 몽크IPA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핵심은 무지 맛있다는 것입니다. 단점 아닌 단점은 350ml 캔이 없다는 점입니다. 위가 쬐그만 저는 가끔씩 500ml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서입니다. 대형 화면으로 몽니의 <비밀>을 반복재생하며 IPA 맥주를 들이키니, 제가 마치 20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최근 잠이 부족한 탓에 맥주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12시 전에 곯아떨어졌습니다만, 오늘은 2023년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앞으로 제 기질을 어기지 않고, 부지런히 'forever young' 정신으로 각종 인문 행사와 공연장을 찾을까 합니다. 홍대를 한국의 피렌체로 만들기를 꿈꾸는 크라잉넛 공연 중 '생일축하장면'과 '말달리자' 영상을 올리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