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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양양 죽도해변 인구해변 나홀로 여행기 (2)

https://brunch.co.kr/@joogangl/511

(앞 글에 이어서) 


가수 박정현을 닮은 교포 여성 두 분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죽도 언덕길을 넘으니, 탁 트여 멋진 뷰를 자랑하는 <쏠티캐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지만 하와이 셔츠를 입고 페도라를 눌러 쓴 간지 할아버지들이 흰 반바지 아래로 허연 털이 수북한 다리를 드러내며 한담을 하고 있습니다. <마할로 호텔> 1층과 2층에 자리한 커피숍은 죽도해변을 방문한 커플이라면 한번쯤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짜 갬성이 충만하거든요. 다만 시골이라서 그런지, 죽도해변의 카페들은 좀 일찍 문을 닫습니다. 하긴, 양양까지 와서 밤늦도록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걸까요? 아니면 책은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로비에서 읽어도 충분한 것일까요? 아유, 나는 그냥 바다 보면서 읽고 싶은디....그러려면 그냥 제가 카페를 차려야겠죠. 아, 그러고 보니 홍콩의 디스커버리 베이 백사장에는 조그마한 텐트를 쳐놓고 와인을 홀짝이며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는 중년 남성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바로 이거지요! This is it!  


언젠가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이 전혀 없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어놓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살면서 꽤나 다양한 일들에 도전을 해봤더랬습니다. 그런데 자극적이고 화려한 일들은 가끔씩 해야 재미있지, 매일 한다고 해서 즐겁지가 않더라고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자극적인 액티비티들은 지겹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지겹습니다." 그리고 질리기도 합니다. 마치 제가 자극적인 홍콩 음식에 몇 달 만에 두 손을 들어버렸던 경험과도 같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평생 해도 지겹지 않고 해롭지 않으며 즐거운 일들은 다릅니다.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 경우에는 역시 독서였습니다. 저는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바닷가에서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살고 싶습니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는 이미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서울에서 근무하기에 바다를 자주 볼 수 없고, 먹고 살기 위해 때로는 지겨운 일도 억지로 해야 하지만, 그런 것들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참을성 없는 어린애는 아닙니다. 돈이 있건 없건, 저는 책을 아주 많이 읽어야 하는 직업을 선택했고, 슬로 앤 미니멀 라이프 철학에 따라 16:8 간헐적 단식으로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며 주로 쌀밥과 두부, 채소와 바나나를 먹고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 군것질은 거의 하지 않으며, 이제는 탄산음료도 거의 사먹지 않습니다. 식비 부담이 없습니다. 고등학생 이후로 체중이 변하지 않아서 옷을 많이 살 필요도 없고, 20대에 은행 다닐 때 입었던 양복을 지금도 대학교 강의 때 입고 있습니다. 의복비 또한 거의 들지 않습니다. 그 외에 웨이트트레이닝과 러닝을 즐기지만, 그것조차도 돈이 많이 드는 취미는 아닙니다. 저는 운동을 할 때 카페인이 든 부스터나, 근육 비대를 위한 단백질 보충제를 전혀 사먹지 않습니다. 내가 벤치 프레스 100kg을 평소에 못 들다가 부스터를 빨고 나서 들 수 있다면, 현재의 나는 100kg을 아직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카페인 빨로 불가능한 무게를 들어올렸지만, 현재의 내 근육과 뼈는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부상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현대인들의 질병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과식"에서 비롯됩니다. 하루 세 끼 식사도 많을 지경인데 거기에 추가로 단백질을 보충한다면, 힘은 세지고 덩치는 커질지 몰라도 절대 건강해지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많이 먹어 흡수되지 못한 단백질은 분해 과정에서 암모니아 등의 독소를 배출합니다. 닭가슴살을 많이 먹는 사람들의 응가 냄새가 지독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zGa2lHutgUg

<맥두걸 박사의 메시지: 골다공증과 단백질>

저는 러닝화 또한 비싼 "카본화"는 사지 않습니다. 카본화는 프로 선수들이 좋은 기록을 내는 용도로 만든 가볍고 탄성이 강한 운동화인데, 마라톤 상급자가 아닌 이들은 발목과 다리근육, 골반이 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신발들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세계 최고의 마라토너들도 평상시 훈련 때에는 카본화를 신지 않습니다. 발목이 약해지고 부상의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형 회사들의 마케팅 그리고 그들의 후원을 받는 이들의 홍보에 홀라당 넘어가, 자기 수준과 운동 목적에 맞지 않는 비싼 신발을 신고 부상을 자초합니다. 달리기 초급자와 중급자들의 경우에는 10만원 미만의 "안정화"를 아식스나 써코니에서 사서 신고 달리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슬로 앤 미니멀 라이프는 가난한 삶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삶 속에서 줄여나가는 과정입니다. 소비할 필요가 없는 것을 소비하느라 정신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요. 허허, 양양 여행기에서 주제가 한참 벗어나버렸습니다! 여하튼 핵심은 타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돈과 상관없이 제가 평생 꿈꾸던 것들의 많은 부분들을 이미 누리며 살고 있는데도, 제 삶을 천천히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이지요. 양양 인구해변과 죽도해변에 의도치 않게 혼자서 온 덕분에, 찬찬히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다듬고 제 자신의 상황에 더욱 감사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한적하다면 한적하다고 할 수 있는 양양 죽도해변에서 가장 핫한 곳은 단연코 <길수산>일 터입니다. 강원도에 위치한 해변치고는 특이하게도, 인구해변과 죽도해변에는 횟집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길수산>은 횟집조차도 아니며, 회 포장전문집입니다. 말 그대로 회를 가지고 나와 죽도해변에 죽 늘어선 테이블 벤치에 앉아서 먹으면 됩니다. 근처의 편의점에서 술이나 음료 등을 사오면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정말로 저는 대한민국에서 "갬성"만큼은 길수산이 상위 1% 안에 든다고 자부합니다. 한적한 여름이나 가을 주말(평일이면 더욱 좋습니다), 초저녁에 모듬회 하나를 테이블에 딱 얹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쐬주를 기울이면서 바다를 바라보면, 이야 이건 그냥 무릉도원이 따로 없습니다. 다만 좋은 것들은 소문이 빨리 퍼지는 법이라, 주말에는 오픈런을 하지 않을 경우 좌석을 잡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죽도해변은 까만 밤에도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인구해변과 몇 백 미터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신비하게도 고요하죠. 게다가 동산항 쪽으로 멀리 보이는 캠핑장의 야간 풍경도 기가 막힙니다. 이번에는 초저녁부터 얼굴이 벌건 친구들을 즐겁게 쳐다보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다음 번에는 <길수산>에서 회에 환장한 해운대 사나이의 면모를 보일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사진을 너무 안 찍었네요. 오늘의 기억이 너무도 좋은지라, 조만간 사진 찍으러 한 번 더 와야겠습니다!  


죽도해변을 지나 바베큐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텐트들을 거쳐 동산항 쪽으로 쭉 발걸음을 옮기다가, 이번에는 그 유명한 <제이제이서프> 바로 앞 흔들의자에 앉았습니다. 제 옆에는 서핑을 마무리한 젊은이들이 드론을 날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미소가 정말로 싱그럽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도시에서는 "싱그러운" 미소를 보기가 정말 어렵지요. 싱그러운 웃음은 잘 가꿔진 얼굴이나 피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평안한 바로 그 순간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니까요. 확실히 이 "서핑"이란 스포츠는 무언가 마법과도 같습니다. <제이제이서프>는 양양의 고인물 서퍼들의 아지트인데, 저녁이 되면 바(bar)로 바뀝니다. 그런데 이야, 이 바의 뮤직이 또 끝내줍니다! 주로 20세기에서 21세기 초기까지의 팝송이 나오는데, 가끔씩 클래식 음악도 나옵니다. 뭐가 나와도 정말 죽도해변의 분위기를 한껏 돋워줍니다. 

솔직히 제가 앉았던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곧바로 <제이제이서프>로 뛰어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낮부터 저렇게 멋진 음악을 계속 공짜로 즐겼다는 데에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삐걱대는 흔들의자에 홀로 앉아 바닷바람을 맞는 이 기분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월아, 네월아 하고 뒤로는 음악을, 그리고 앞으로는 파도소리를 즐기며 또 한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번에 일행이 있을 때에는 꼭 이 곳을 방문해서 보답을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흔들의자 옆에 멀뚱하게 앉아 있는 고양이가 귀여워서 사진을 찍다 보니, 저 멀리 모래사장에서 신나게 풍악을 울려대는 bar가 있었습니다. 내친 김에 <제이제이서프>와 작별하고 그 쪽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놀랍게도 <yy beach bar>라는 해변 술집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못봤었는데, 올해 초에 생긴 걸까요? 아니면 제가 그동안 못보고 지나쳤던 것일까요? 아쉽게도 오늘 양양을 방문한 손님이 적어서 한산했지만, 분위기만큼은 끝내줬습니다. 

이 "비치 바"는 해변에 넓게 저와 같은 식으로 테이블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기분 좋게 기대 누워서 모히또를 즐길 수 있도록 해놓았지요. 음악도 분위기도 정말 좋았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어서 결국 저 테이블에 앉지는 못했지만 살짝 후회가 됩니다. 분위기상 여름에만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것 같은데 이때 즐겼어야만 했는데 말입니다. 여하튼 저는 죽도해변의 모래를 툭툭 차며 한참을 걸어서, 진하게 키스하는 연인들을 지나 다시 인구해변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인구해변의 중심가에는 <솔게스트하우스><플리즈웨잇><서프클리프><인구시장> 등이 죽 늘어서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서프클리프>는 양양을 대표하는 라이브 바인데, 무대를 활짝 틔워놓아서 길거리를 지나던 행인들 또한 그 자리에 선 채로 공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보통 공연이 7시쯤 시작되는데, 제가 8시가 넘어서 갔을 때에는 "펑키투나잇"이라는 밴드의 라이브 공연이 한창이었습니다. 여름 성수기 때에는 이 가게 앞에 젊은이들이 운집하여 떠들썩하지만, 태풍이 예보된 오늘은 매우 한적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마음 편하게 선 채로 얼마간 음악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서프클리프> 맞은편 인구해변 백사장에 beach bar가 여럿 설치되었는데, 역시 한산했습니다. 오히려 문신을 도와주는 벼룩시장에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린 것 같습니다. 돈과 시간을 들여 양양에 왔건만 물량이 딸려 헌팅에 실패한 분노남들이 터뜨리는 폭죽이 연신 사방에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젊음은 어리숙하지만 그래서 더욱 보기 좋습니다. 친구들, 알다시피 7시 반에서 9시 반까지는 <양리단길라운지> 등에서 바베큐 파티가 있지 않나. 10시쯤 되면 그곳에서 1차를 마친 사람들이 몰려들 수도 있겠지. 너무 빨리 실망하지는 말게나. 하지만 저 같은 아싸 늙은이의 경우에는 10시쯤 오히려 이 곳을 피해 다른 장소에 있어야 하겠죠. 어디가 좋을까요? 


제가 숙소인 <만월도>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눈여겨 둔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양양에서 에스프레소로 유명한 <피프티피프티>인데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특정 걸그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멋진 에스프레소 바의 외관은 아래와 같습니다. 

출처  https://blog.naver.com/codnfl2020/222795049968

몇 번을 지나가도 항상 사람들이 가득했던 터라,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0시가 넘어서 갔을 때에도 야외 테이블은 만석이었습니다. 다만 바에 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어서, 냉큼 앉았습니다. 저는 서른이 넘으면서 카페인 알레르기가 생겨서 가급적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1년에 몇 번 큰 마음먹고 제게 커피를 허락할 때가 몇 차례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여기 에스프레소 콘파냐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한 번 마셔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인지, 지금 제공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대신 시나몬을 추가한 코젤 다크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400ml이며, 시나몬 추가시 500원이 더 붙어 9,000원입니다. 키가 크며 마르고 단단한 체형의, 누가 봐도 서퍼인 젊은이(B라고 부르겠습니다)가 정성스레 거품을 정리한 뒤에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한 모금 마신 순간, 와! 진짜 감탄이 나왔습니다. 저는 흑맥주를 매우 좋아합니다. 특히 코젤 다크를 좋아해서, 그것을 판매하는 바가 있으면 꼭 한 잔씩 마셔보곤 합니다. 제 입에는 이태원 썰파(썰스데이 파티)에서 내놓는 코젤 다크가 가장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코로나 이전 경험이라,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 서퍼는 맥주 전문가가 아니겠지만, 그가 내놓는 코젤 다크 생맥주는 기가 막혔습니다. 시나몬 가루도 아주 정성스레 적절하게 잘 묻혀 놓았습니다. 저는 위스키를 마시듯 천천히 입맛을 다셔가며 음미했습니다. 이 곳의 코젤 다크, 정말로 마실 만합니다!

사진 속의 B는 혼자서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며 맥주를 음미하는 제가 신기했는지,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맥주와 가게 분위기가 끝내준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서핑 경력이 5년쯤 되는 서퍼인데, 서핑이 너무 좋아서 오랜 고민 끝에 양양에 정착한 케이스였습니다. 알고 보니 롱보드(크게 롱보드와 숏보드 두 종류가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보드들이 있습니다) 쪽에서 제법 실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자기 입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서핑에 도가 튼 고인물 서퍼들은 많은 경우 제법 도인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비물질적이며 영혼이 (도시인들에 비해) 맑고, 현재에 충실한 부류입니다. B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낮에는 서핑 강습을 하고 밤에는 바텐더로 일합니다. <피프티피프티>는 새벽 1시에서 2시까지 문을 여는데, 물론 문을 닫는 시간은 주인장 마음대로입니다. 이곳 인구해변과 죽도해변에는 그런 집들이 꽤 있습니다. B의 목소리는 매우 안정되었고, 그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그의 몸은 슬림탄탄의 교과서였고, 그의 단순하고도 맑은 정신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내게 꼭 서핑을 하라고 권했고,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피부가 약한 관계로 바닷물과 친숙하지 않아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그 와중에 그와 함께 일하고 있던 또 다른 남자인 A와도 말을 트게 되었습니다. 40대 남성으로서 서핑 경력이 10년이 넘는 그는 아내와 함께 주문진에서 살고 있습니다. 매일 이곳으로 출퇴근을 한다고 합니다. 엄청난 동안에 귀여운 수염을 기르고 통통한 체구인 그는 하얀 티 속의 볼록한 배를 숨길 수 없는 귀염이였습니다. 그 또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남들을 많이 배려하는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서핑에 대한 그의 사랑은 못말릴 정도인데, 그 덕분에 저는 켈리 슬레이터라는 세계 최고의 서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빡빡이인 켈리의 외모가 저를 닮았다면서 말입니다. 물론 제가 봐도 켈리 슬레이터가 훨씬 잘생겼습니다. 그는 심지어 그 유명한 <베이 워치 해상 기동대>에도 여러 번 출연한 슈퍼스타인걸요. 저는 이튿날 귀경길에 켈리 슬레이터의 서핑 영상을 유튜브로 시청했는데, 정말 끝내줬습니다. 

https://olympics.com/ko/athletes/kelly-slater

A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폭풍 속으로> 장면까지 인용해가며 서핑을 예찬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팔다리가 길지 않아서, 10년을 타도 서핑할 때 간지가 나지 않는다며 우울해했습니다. 반면에 B는 제가 봐도 서핑할 때 동작이 매우 잘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무슨 스포츠라도, 결국 유전자가 90%인 것은 사실이지요. 물론 우리는 프로 선수들이 아니니,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자정이 넘으니, 바텐더들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1시에 영업을 마친 뒤 가게 문을 닫고 소주 한 잔을 하겠다는 겁니다. 내일 아침 9시에 가게 문을 열어야 하고 오후에 서핑 강습도 있는 선생님들인데, 진짜 거칠 것이 없는 "상남자"들이었습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B가 안주와 술을 사러 뛰어나가고, 이윽고 옆 가게의 여성들이 장사를 마치고 이곳으로 넘어왔습니다. 킵해놓았던 위스키를 꺼내서 곧장 속을 덥히더군요.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온몸의 문신이 매력적으로 꿈틀댔습니다. 정말 끝내주게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인 텁수룩한 늙은이를 연상케 했죠. 저는 코젤 다크 2잔을 마시고 일어섰습니다. 이제 그들만의 자리이고, 1시가 넘었기에 손님이 퇴장해야 할 때이기도 했죠.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저는 가게 문을 나섰습니다. 숙소까지 50m도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걸어갔습니다. <만월도> 도미토리 룸에 들어서자, 아직 아무도 귀가하지 않았더군요. 새벽 1시인데! 저같은 40대 늙은이는 새벽 1시까지 놀았으면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원하게 양치질과 샤워를 마치고 샤워룸을 나섭니다. <만월도>를 운영하는 훈남 훈녀들은 이제 그 유명한 포토존인 야외 카페 좌석에 앉아 낮은 소리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향초 냄새가 은은한 도미토리 1층에 홀로 누워 눈을 감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움직였던 하루가 참으로 길기도 합니다. 하루 동안에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저는 어쩌면 서울에서 너무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곯아떨어진지 한참 지났을 때, 저의 룸메이트들이 살금살금 예의 바르게 입실했습니다. 그들은 또 어떤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을까요? 여하튼 놀 때에는 죽도록 놀아야만 합니다. 어중간하게 노는 것만큼 아쉬운 일이 세상에 또 없거든요. 


16일 아침, 6시가 조금 넘자 습관처럼 눈이 번쩍 떠집니다. 과연 일기예보처럼 비가 올까요?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가 봅니다. 어휴, 엄청 화창합니다. 일기에보는 또 다시 틀렸습니다. 햇빛은 짱짱하고 습도는 낮고 대기는 맑고 시원합니다. 정말 최고의 아침입니다! 저는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아침의 인구해변과 죽도해변은 못 참죠. 꼭 봐야만 합니다. 

아마 성수기 때에는 이렇게 수도 없이 꽂힌 파라솔 아래에 사람들이 운집했을 터입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다소 썰렁한 분위기입니다. 물론 공기가 시원하면서도 깔끔했기에,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황량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밤새 불태웠던 선수들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듭니다. 저처럼 중늙은이 정도 되어야 뒷짐을 지고 아침 바다를 즐길 수 있지요. 저 아름다운 하늘을 보십시요. 태풍 란은 겁만 주고 한반도를 스쳐 지나간 모양입니다. 아침 파도와 바닷바람이 정말 상쾌하고 좋습니다. 눈과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입니다. 이 정도면 주문진까지 걸어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항상 상황은 예기치 않게 변합니다. <만월도>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 철푸덕 앉아 계시는 동네 어르신 두 분에게 제가 다가가, 혹시 양양버스터미널이나 주문진버스터미널로 가는 마을 버스가 있을까요? 라고 묻자, 두 어르신은 한 목소리로 "한 5분 뒤에 양양 버스 터미널 가는 시내 버스 12번이 올거야! 빨리 준비해서 나와!"라고 외치셨습니다. 저는 본디 주문진까지 12km를 걸어가며 해파랑길을 즐긴 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귀경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의상 예! 예! 하다 보니, 어느새 짐을 다 싸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버스 12번이 왔고 동네 어르신들은 벌떡 일어나셔서 "바로 저 버스야! 저걸 타!"하고 열띠게 응원해주셨습니다. 별 수 있겠습니까? 타라면 타야지요. 그래서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귀에 커다란 헤드폰을 쓴 여고생 뒤에 자리한 뒤, 창밖으로 풍경을 즐기면서 말입니다. 만월도여, 안녕! 

 바닷가를 따라서 운행되는 시내버스를 탄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입니다. 속도가 느리기도 하고, 창문을 열어놓으면 바닷공기를 맡을 수도 있지요. 제 앞자리 여고생은 어르신이 탈 때마다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다 다시 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참으로 예의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8시 경에 버스를 탔고, 40분 정도 지나서 양양 종합터미널에 하차했습니다. 어제도 느꼈지만, 굉장히 힙한 감정의 음악들이 여객실에 나옵니다. 새로 지은 건물도 깔끔하고 멋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시 반전. 저는 원래 <티머니go>로 9시 50분 버스를 예약했더랬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싶어 매표 창구를 가보니, 8시 50분에 출발하는 임시 차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빨리 카드부터 주세요! 빨리 끊어서 지금 당장 타야 해요!" 오늘은 아침부터 왜 이렇게 급한 것일까요? 결국 저는 1시간을 터미널에서 날리는 대신, 딱 맞게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 버스는 잼버리 단원들을 태우는 임시 차량인 것 같았습니다. 외국인 잼버리 단원들이 꽤 탑승하고 있었고, 버스 벽면에는 세계 국기 스티커가 붙어 있었죠. 그런데 학생 몇 명만 태우고 가기가 그래서였는지, 저 같은 일반인까지 태웠던 것 같습니다. 물론 매표소에서 표는 정식으로 발권되었습니다. 불법이란 뜻은 아니고, 여하튼 이 시기에만 볼 수 있었던 특이한 경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817138000062?input=1195m

제가 버스 안에서 내내 곯아 떨어져서 온 것까지 자세히 적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제가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려 7호선을 타고 긴 여행을 거쳐 마들역 근처의 제 집에 도착하니, 12시 15분이었습니다. 주문진까지 도보 여행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또 집에서 쌀밥에 두부, 김치와 채소로 배불리 먹고 나니 이곳이 천국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 기분을 날리지 않기 위해, 금요일날 잡혀 있었던 술약속을 오늘로 당겨 저녁에 대학로에서 양꼬치에 연태고량주로 시원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이번 여행의 기억이 너무도 좋아, 앞으로도 어쩌면 갑자기 혼자 양양으로 떠날 일이 종종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푸른 여름을 좋아하는 해운대 남정네이기 때문이죠. 그 때에도 변함없이 넋두리를 브런치스토리에 남길 것을 기약하며, 이번 여행글은 여기에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All is well! 

https://brunch.co.kr/@joogangl/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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