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9일 새벽 5시. 새벽 4시까지 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클럽 음악 소리로 인해 깊이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나는 일찌감치 선잠에서 깨고 말았다. 곯아떨어져 있는 승환을 뒤로하고 나는 게스트하우스 3층의 마루에 나와 테이블의 먼지를 닦은 뒤 앉았다.
나는 여행을 올 때면 당일 저녁이 아닌 익일 아침에 일기를 쓴다.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노는 밤에는 귀가해서 일기를 쓸 여력이 없다. 하지만 잠자는 새 숱한 경험들은 정제되어 차분히 기억의 창고 속에 정리된다. 그렇다고 해서 익일 오후에 일기를 써서는 안 된다. 어느새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하거니와, 새로운 경험에 뛰어들 생각에 벌써 어제의 소중한 추억에는 흥미를 잃게 되니까. 예전에 카오산 로드에 머물 때에는 새벽같이 버거킹 옆 스타벅스로 출근해서 일기를 쓰곤 했는데, 이 주변의 스타벅스가 몇 시에 오픈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하튼 나는 1시간가량 일기를 쓴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7시가 조금 넘자 승환 또한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2층 남자 화장실에서 번갈아 샤워를 한 뒤, 오늘 일정을 점검했다. 오전에는 TK파크 라이브러리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11시에 오픈하는지라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일단 라이브러리 근처에 가서 커피나 한 잔 하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얼마쯤 걸었을 때 승환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나와 그가 읽을 책들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맥 빠진 우리가 숙소로 돌아가 책을 챙겨 나올 때쯤 우리의 위는 아침밥을 달라며 맹렬히 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친김에 우리는 숙소 근처 닭고기 누들 수프를 하는 가게에 들어가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낡은 가게 안에는 러닝 셔츠만 걸친 채로 요리를 하는 아빠, 행주로 테이블을 부지런히 훔치는 엄마, 그리고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는 맨발의 조그마한 소녀가 있었다. 경제적 사정과 상관없이 그들 사이에 넘치는 정과 사랑을 어찌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맨발의 소녀는 온종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식탁 사이를 뛰어다니다간 이내 빨갛고 파란 의자들을 눕혔다가 세운다. 아마 평생토록 학원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할뿐더러, 아마 초등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교육을 잘 받은 한국의 또래들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참으로 미묘한 점이 있다.
따뜻하고 매콤한 닭고기 누들 수프를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니,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정도로 힘이 솟았다. 우리는 TK파크로 가는 대신, 일단 쭐라롱껀 대학교에 가서 11시까지 드론을 날리기로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쭐라롱껀 대학교에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마 내 주변의 학자들은 나더러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것이다. 동양철학 전공자인 필자는 미국이나 중국, 또는 일본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태국의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할 경우, 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완전히 망치는 셈이 아닌가! 그들의 걱정은 온당하며,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발로 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짧은 인생,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도시에서 몇 년쯤 공부하며 살아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서 쭐라롱껀 대학교나 탐마쌋 대학교 박사과정이나 방문학자 코스를 아시는 분들은 제게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어주시길 바란다.
졸업 시즌을 맞은 쭐라롱껀 대학교 교정에는 교복 위에 졸업가운을 걸친 학생들이 발랄하게 몰려다니며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돈이 많은 학생들은 개인 사진사를 동반하여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마치 80년대 잡지에 나오는 어색한 설정은 방관자인 우리들을 미소 짓게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드론 날리기이다.
서울에서 드론을 날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강 일부 지정된 장소에서만 드론 비행이 허용되며, 그것도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방콕은 아직까지 그와 같은 엄한 법을 제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드론 마니아인 승환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그는 드론 조정 난간에 아이폰을 끼운 뒤, 드론 본체를 들고서 전파가 잡히는지 확인하고 드론을 잔디밭에 옮겨 본격적인 비행을 시작했다.
잔디밭에 놓인 드론은 제초기처럼 풀들을 베어 날리며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았다. 300미터, 400미터, 500미터... 힘차게 날갯짓한 드론은 500미터 상공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아이폰 화면으로 끊임없이 제가 본 것을 전송하고 있었다. 나는 드론이란 놈에 단숨에 반했다. 기계치나 다름없는 내게 승환은 드론을 조종할 기회를 주었는데, 어설픈 주인의 손아귀에 든 드론은 어정쩡하게 하늘 위에서 비틀거리다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드론 촬영을 마친 우리는 졸업식 예행연습이 한창인 대학생들을 뒤로하고서 무료 셔틀버스 2번을 타고 캠퍼스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캠퍼스 가운데 도로가 나 있을 정도로, 쭐라롱껀 대학교는 규모가 있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캠퍼스는 야자수로 가득했고, 건물들을 따라 세심하게 조성된 연못에는 잉어가 가득했다. 우리는 자유를 만끽하며 캠퍼스를 거닐다가, 셔틀버스 1번을 타고 싸얌 역으로 향했다. 나는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반드시 대학교를 방문해서 강의동을 둘러보고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는 취미가 있다. 나는 그렇게도 대학이 좋다. 가능할 법하지 않지만, 내가 서울 시내에서 가장 살고 싶은 곳은 모교인 서울대학교 캠퍼스이다. 나는 영원히 캠퍼스에서 살다 죽고 싶은 만년 학생이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이내 싸얌 파라곤이다. 싸얌 파라곤에도 푸드코트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싸얌 센터 4층에 있는 <푸드 리퍼블릭>으로 향했다. 시설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작년에 좋은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승환과 푸드 리퍼블릭을 방문했을 때, 트랜스젠더 요리사가 멋지게 불맛을 내는 데리야끼 볶음밥을 우리에게 맛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정말 그렇게 불맛이 그윽하게 나는 볶음밥은 난생처음 먹어보았다. 이번에도 그 맛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호라, 트랜스젠더 요리사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멋진 미소를 지닌 다른 요리사가 우리를 위해 볶음밥을 만들어주었지만, 예전 맛만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맛보기 힘든 훌륭한 요리였기에, 불평 없이 깨끗하게 긁어먹었다.
배가 터지게 점심을 먹고 나니, TK파크 라이브러리에 갈 생각은 사라지고 한시바삐 실내 서핑을 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싸얌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프롬퐁 역에서 하차한 뒤, 30분가량 걸었다. 실내 서핑장인 <플로우 하우스>는 <A Square>라는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찾는데 다소 애를 먹었다. 할리 데이비슨의 험상궂게 생긴 점원이 우리에게 위치를 알려 주었다. 할리 데이비슨의 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터프한 외모 또한 지녀야 하나 보다.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1시간에 550밧이지만, 우리처럼 현장 구매를 하면 750밧였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섰을 때, 어린아이 3명이 부지런히 자빠지며 서핑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방콕 시민들은 주로 야간에 서핑을 하러 <플로우 하우스>를 방문한다고 한다. 하긴 실내에서 서핑을 하는 만큼, 야간에 하면 참으로 멋지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순번이 자주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가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1시간 동안 부지런히 매트 위를 굴렀다.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으며, 잘 타는 것과 상관없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런 가운데 배꼽에 피어싱을 하고 몸에 문신이 새겨진 타이거 맘이 상기한 사진에 보이는 통통한 아이를 꾸짖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총 3명 있었는데, 저 통통한 아이는 그다지 서핑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서핑을 하기보다는 그냥 매트 위에서 물살에 휩쓸려 굴러다니는 재미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거 맘의 눈에 서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식은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나 보다. 미소의 나라 타일랜드에 와서 그렇게 소리 지르는 여성은 처음 보았다. 여기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덩치가 산만한 아버지는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부디 저 아이가 행복하기를.
서핑을 마치고 다시 프롬퐁 역까지 걸어가면서 우리는 시원하게 맥주를 한 캔씩 하기로 했다. 자고로 최고의 음주는 보행 음주이지. 보행 음주라는 말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리는 많은 이들이 유럽에서 한 손에 맥주캔을 들고 다니는 백인들을 보면 오히려 멋지다고 감탄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나는 보행 음주를 비난하는 이들도 나름 존중한다. 다만 그들이 일관성을 갖추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우리들이 즐기는 보행 음주는 주머니에 고량주나 소주팩을 꽂고 다니는 알코올 중독자의 그것이 결코 아니다. 보행 음주를 하면 안주를 많이 들지 않아서 살도 찌지 않을뿐더러, 혈액순환이 촉진되어 술도 빨리 취한다. 맥주를 마시며 걷는다고 해서, 그가 주폭을 일삼지는 않는다. 남들이 커피를 마실 때에 우리는 맥주 한 캔 할 따름이다.
그러나 오호라, 태국에서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맥주 판매가 금지된다. 우리가 편의점을 몇 군데 방문했는지 이루 셀 수도 없다. 나중에는 오기가 나서 프롬퐁 역과 연결되어 있는 엠포리움 백화점을 방문해서, 식품매장에 들어가 맥주를 사고자 했다. 그러나 맥주 냉장고는 굵은 밧줄로 묶여 있고, 유리에는 5시까지 맥주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글이 영어와 태국어로 쓰여 있었다. 우리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정말로 철저한 사람들이구나. 대한민국은 참으로 술 마시기 좋은 나라구나.
이래서 술 한 방울 마시지 못하고 1시간이 넘게 땡볕에 걸어 다닌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로 가서 땡모반(수박주스) 하나를 해치운 뒤, 야시장을 방문하기에 앞서 잠시 늦은 낮잠을 청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