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비프
2017년 8월 18일 새벽 5시에 잠이 깨었다. 전날 강의 준비를 하느라 3시 넘어 눈을 붙였으니, 2시간도 채 못 잔 셈이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 방콕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어린아이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나 보다. 사실 방콕을 여러 차례 다녀온 내가 이번 여행으로 인해 유달리 설렐 까닭은 딱히 없다. 다만 7월에 계절 수업을 한 뒤에도 끊임없이 할 일들이 생겨서 많이 지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작년에 고승환과 함께 방콕에 다녀온 뒤 너무 좋아서 곧바로 다음 해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작년 8월에 항공권을 구입해서 올해 8월에 떠나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저렴하기도 했지만,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였다. 여행은 가는 것만큼이나 기다리는 것도 즐겁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승환이와 한성대 입구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향한다. 남자 둘이서 두 번째 여행을 떠나다니, 이것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버스 안에서는 우리 전공에 관한 이야기들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왜 방콕으로 여행을 떠나면서도 버스 안에서 학문 이야기를 할까? 어쩌겠는가. 좋아하는 것,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걸.
에어아시아 XJ701편을 타고서 오전 11시 14분에 인천을 출발했다. 비행기 안에서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와 하워드 슐츠의 <온워드>를 읽었다. <파타고니아>는 기행문의 성전과도 같다 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이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당나귀와 함께 한 세벤느 여행>이 훨씬 좋았다. 특히 스티븐슨이 여행 동안 타고 다녔던 작은 당나귀 모데스틴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당나귀와 헤어질 때 스티븐슨이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던 장면은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는지.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도입부였다. 어릴 적 삼촌이 파타고니아에서 발견했다고 여겼던 브론토 사우르스 살가죽. 하지만 그것은 브론토 사우르스 살가죽이 아니었다. 그러나 채트윈은 그때부터 이미 파타고니아로 떠날 운명이었던 셈이다. 브론토 사우르스 살가죽이라. 얼마나 신나는가. 이 도입부 하나만으로도 내 호불호에 관계없이 훌륭한 문학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책을 읽느라 정신없는 동안 태국 시각으로 오후 3시에 돈므앙 공항에 도착했다. 유심칩을 교체해주시는 여자분이 올해에도 마찬가지로 그 가게에 계셨다. 여행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신난다.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후텁지근하고 매캐한 방콕의 공기가 여전했다. 택시를 잡아타고서 호텔이 아니라 <베스트 비프>라는 가게로 향했다.
<베스트 비프>는 배틀 트립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와 더욱 유명해진 가게로, 2시간 동안 육류와 해산물 등을 맥주와 함께 무한으로 제공한다. 가격은 작년보다 다소 올라 1인당 439밧이지만,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한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런데 온눗 역 근처에 있는 <베스트 비프>로 가기까지 교통 체증이 너무도 심했다. 도저히 차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우리는 지하철로 2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 세븐일레븐에 들러 캔맥주를 사서 마시니, 다리에 좀 더 힘이 올랐다. 원래 무거운 배낭을 메고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맥주와 함께 걷는 것이 배낭여행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6시가 되어 <베스트 비프>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다.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었지만, 넓디넓은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분주하다. 우리 왼쪽에는 직장인들로 보이는 여성들이, 오른쪽에는 고등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정해진 메뉴를 주문한 뒤 마음 편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방콕을 몇 번씩이나 와 보았던 내게 이번 여행의 테마는 '로컬'이었다. 원래 좋아했던 곳을 가보는 것과 동시에 로컬 분위기를 내는 장소들도 방문해보고 싶었다. 이 가게는 그 일환 중의 하나이다. 나중에 주문이 밀릴까 봐 미리 시켜놓은 가리비와 새우 등 각종 해산물이 매우 싱싱헀고, 육류도 맛났다. Chang 맥주를 무한으로 마시는 동안 우리 둘의 배는 북처럼 부풀어올랐다.
맛집 기행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추억을 정리하는 자리일 따름이므로, 음식에 관한 설명은 길게 하지 않기로 한다. 7시가 넘으니 밖에 늘어선 대기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이 가게는 4시에 오픈하는데, 6시가 넘어가면 그때부터 조금씩 줄을 서야 한다. 개인적으로 택시로 오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지하철로 온눗 역까지 와서 조금만 걸으면 대로변에 있는 가게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어떤 도시의 인도를 직접 발로 디디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내게는 드물기에, 나는 그냥 그렇게 걷는다.
어느덧 8시가 되었다. 또 다른 일정이 있었기에, 이제 그만 일어나기로 한다. 가게 안팎은 이미 많이 어둑어둑해졌다. 술이 얼근한 상태로 가방을 메고 일어서서 온눗 역으로 향했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