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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Aug 24. 2022

37살에도 이어지는 신랑의 공무원 시험 도전기

당신도 정말 열심히 했지. 그리고 나도 독박육아로 참 힘들었지.

 내가 카톡을 보낸 그 이후 즈음부터, 신랑은 가혹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듯 급격히 시들어갔다. 나는 신랑이 내가 보낸 글을 전혀 예측하지도 못한 사람처럼 너무도 급격히 위축되는 것을 보고 마음 한 켠으로는 놀라고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안쓰러운 일이지만 곧 둘째가 태어날 시기였기에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 짧고 굵게 수험 기간을 줄여야 한다는 선의로 합리화를 하면서, 신랑의 힘겨움에도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 정도는 참고 공부해야 합격하는 거야.' 우리 가족에게는 신랑의 합격이 간절했다.




 신랑은 말이 없어지고,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많이 줄었다. 아침이면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도서관에 가고 점심은 도서관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식사를 하거나 혼자 대충 끼니를 때우고 저녁이면 집에 와서 나와 식사를 한 후, 별 말도 없이 식탁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갔다가 밤 12시가 되어야 돌아왔다. 반주로 술을 자주 하던 사람이 그 시기에는 술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거의 없었고, 식욕이 너무 떨어져서 며칠째 점심을 굶었다는 얘기를 하곤 했었다. 저녁을 같이 먹고, “갔다 올게.”라고 말하며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서는 뒷모습에 가장의 무게가, 내가 지어준 그 힘겨움이 묻어나서 참 미안하고 슬펐다. 전에는 저녁밥을 먹고 나면 나와 단 30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다 갔었는데, 이젠 몇 마디 대화도 없이 침묵하다가 자리를 떴다. 내가 너무 잔인했나 싶었다. 아쉽고 서운하고, 또 내가 외로운 마음에 "잠깐 앉아서 쉬고 소화라도 시키고 가."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이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공부하려는 데, 내가 흐트러뜨리면 안 되지.' 싶어서 "잘 다녀와."라는 말로 배웅을 했다.


 신랑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했고, 살도 많이 빠지고, 한동안 혼자만의 고민을 쓰리게 삼켜내는 표정으로 지냈기에, 내가 '이혼'이라는 무기를 들고 적이 되어 절벽이 있는 궁지로 신랑을 몰아가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 죄책감 때문에, 나는 나 자신 또한 절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신랑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 지 2년 차가 되던 해인 2016년에는 2월에 둘째를 낳았다. 애를 낳고 나면 서운한 일도 많아지는 법.


 해산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어느 날인가 몸이 땅으로 가라앉듯 몹시 무겁고 힘든 날이 있었다. 아침에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았는데, 느낌이 싸해서 밑을 바라보니 변기에 붉은 핏물이 가득했다. 진한 빨강 물감을 풀어놓은 듯 투명하고 빨간 핏물이었다. 이제 막 도서관에 가려고 나서는 신랑에게 "자기야, 나 방금 소변을 봤는데 엄청 빨갰어. 피가 많이 나왔어."라고 말했다. 그날은 갓난아이를 내 품에 안을 힘조차 없는 것 같아서 신랑이 둘째 아이를 돌보아주고, 내가 혼자서 쉴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래. 오늘은 공부를 쉬고 애를 봐줄게."라고 말하기를 바랐으나, 신랑은 나에게 "그래. 좀 쉬어. 자기야."하고는 나갔다. 그날은 정말 외롭고 힘들었다. 신랑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하라고 했잖아.'라며 서글픔을 삼켰다.


 첫째를 낳고도 젖이 많아서 유선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둘째를 낳고도 그랬다. 막힌 유선에 젖이 불었지만 아무리 애가 빨아도 힘이 약하니 막힌 곳이 뚫리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대로 온찜질을 하고 유축기로 짜내 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루쯤 시간이 지나니 온몸에 열이 펄펄 나고 가슴에 뭔가가 닿기만 해도 저릿저릿하게 아팠다. 전에도 유선염으로 고생한 날들이 많았지만 그 날은 손꼽히게 힘든 날이었다. 너무 힘들다고, 아프다고 말을 했음에도 "자기야, 00이랑 쉬어."라며 이내 시간에 맞춰 도서관으로 향하는 신랑이 참 야속했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2개월 만에 복직을 했다. 내가 돈을 벌어 생활해야 했기에 육아휴직을 할 수 없었던 사정이었지만, 그건 전적으로 시부모님이 갓난쟁이 둘째 아이를 돌봐주신 덕분에 가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손주들이라면 정성껏 돌봐주시고 사랑을 듬뿍 주시며, 어느 것 하나 서운하다 힘들다 내색 없으신 시부모님께 정말 감사하다.


 시댁과 우리 집은 차로 1시간 거리였기에, 나는 금요일이면 퇴근길에 큰 아이와 함께 시댁으로 가서 둘째 아이를 만났다. 주말 내내 시댁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조금 데면데면해서, 시어머니가 차려주신 금요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애들을 데리고 집으로 1시간 정도 운전을 해서 집으로 왔다가, 일요일 저녁에 둘째 아이를 시댁에 다시 맡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보냈다. 혼자서 애들을 데리고 운전을 많이 했었다. 주말이면 아이들과는 늘 동네 아파트 놀이터를 전전했다. 여기는 꿀벌 놀이터, 저기는 개미 놀이터, 저쪽 끝에는 해골 놀이터, 그 옆에는 나비 놀이터. 아파트 놀이터마다 이름을 지어주고 작은 애를 아기띠에 메고, 큰 애 손을 잡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가끔 아는 사람을 만나서 "애아빠는 뭐하고?"라고 물어보면, "네. 쉬는 날인데 일이 많아서 출근했어요."라고 둘러댔었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우리 가족은 언제쯤 다 같이 나들이라도 가볼 수 있을까?' 하고 바라던 시기였다. 독박 육아였지만,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하라고 했잖아.' 라며 견뎠던 시간이었다.




 그 시기에 신랑이 거의 유일하게 나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은 밤 12시쯤, 지친 몸으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탁구나 칠까?" 해서 아파트 지하실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탁구장에 가서 탁구를 칠 때였다. 나는 "공부하느라 지쳤을 텐데, 이 밤에 웬 탁구야?" 하면서도 우리가 연애를 시작할 때 같이 탁구장에 자주 갔던 것을 생각하며, 또 서로 정신없이 때리고 막는 공에 까르르 웃으며 신랑이 잠시라도 무거운 짐을 털어버렸으면 하는 바람에 속으로 기분 좋게 따라갔었다. 나도 늘 출근하랴, 애들 돌보랴, 늦은 시간까지 잠을 쫓아가며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랴 피곤했지만, 신랑이 그렇게 먼저 다가오면 내가 가혹하게 몰아붙인 것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았다. 자는 애가 깰까 봐 30분 남짓이나 치고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탁구를 치러 가서 서로 "아직 안 죽었네." 하면서 늦은 밤이라고 실컷 소리 내어 웃지도 못하고 테이블 모서리를 잡고 까르르 웃던 때가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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