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르바 Aug 25. 2022

이혼하자. 신뢰가 깨졌어.

부부 사이에 신뢰가 이렇게 중요한 것인 줄 나도 몰랐어.

 신랑이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동안, 나 몰래 주택담보대출로 돈을 빌려 주식을 하고 큰돈을 잃었다는 것은 나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나는 신랑의 모습을 내가 생각하는 테두리에 가둔 채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그렇지 성품만은 좋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신랑은 다른 남자들과 달라. 따듯하고 마음씨가 좋아.'라는 신랑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순간, 거짓으로 범벅이 되어 나를 속인 신랑만 남았다. 


 그건 엄청난 지진이었고, 끊임없는 여진을 남겼다. 내 마음속에서는 끊이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스스로를 고통을 몰아넣는 여진이 시도 때도 없이 몰아쳤다.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하혈을 했던 날에도, 신랑은 나에게 "쉬어."라는 말을 하며 갓난아이와 나를 남겨두고 도서관에 가서 주식을 봤겠구나. 자기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겠지? 

 내가 '이혼'을 무기로 공부에 매진해주기를 바랐을 때, 그렇게 힘든 척을 하더니 결국 주식 때문에 힘든 거였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할 수 있었지?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날들 동안 내가 신랑의 합격을 기다리고 애썼던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새로운 학교에 출근하면서 밤에는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겠다던 것도 다 거짓이었잖아. 공부는 개뿔. 그냥 나를 구슬려보려고 하는 말이었어. 거짓말쟁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왔던 날들은 과연 믿을 수 있는 날들이었을까? 우리는 아이를 가질 때 말고는 관계도 별로 갖지 않았었잖아.


 예전이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상상까지 끄집어내면서,  신랑의 모든 행동을 의심하며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불신 지옥'에 빠진 당시, 나의 사고는 과장되지 않았고,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확신하였기에 더 힘들었다.  


 나는 웃음을 잃었다. 신랑에게는 이제 편하게 살고 싶다고, 더 이상 힘들게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고 이혼을 하자고 했다. 우리는 주말부부였으니, 내가 집을 나가거나 신랑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주중에 각자의 자리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주말이면 신랑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으로 가서 아이들을 보고 일요일 저녁이면 나에게로 아이들을 주고 신랑은 직장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식이었다. 


 이혼을 요구했지만 신랑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이혼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자, 아이들을 누가 키울 것인지, 이사하려고 사둔 집은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그리고 이혼 후의 삶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폐쇄적인 교사 집단에서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겠구나.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안 가져주면 좋겠다. 아이들도 어둡게 자라겠지? 내가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밝게 키울 수 있겠어. 이사 가려고 구해놓은 집은 시댁과 너무 가까우니 친정과 가까운 집으로 이사를 해야겠어. 아예 친정으로 들어갈까?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상처받으시겠지? 제일 잘 살 줄 알았던 막내딸이 이 꼴로 나타나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망할 놈의 상상은 이미 이혼 후의 삶을 칙칙한 흑백으로 그리며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내 상상에는 색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집에서는 부모로서의 역할, 학교에서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집을 벗어나 학교에서는 평소 하던 루틴대로, 평소 대하던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는 어설프게 관성을 유지하며 사람 사는 흉내를 낼 수 있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급격히 우울해졌고, 아이들을 재운 밤에는 더욱 미칠 듯이 고통스러웠다. 혼자 있는 시간은 독약처럼 몸에 스며들어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온전한 정신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 같았다. 잔인한 시간이었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내가, 간절히 소주를 들이키고 싶은 정도였으니. 뱃속에 아이가 있지 않았다면, 그 때 술을 배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일하게 색이 있는 상상을 하는 시간은 과거를 그리는 때였다. 우리가 아이들과 같이 동물원에 가서 나들이를 하던 날, 첫째가 두 돌 즈음 되어 잘도 걸어다니고, 내가 둘째를 뱃속에 가졌을 때잖아. 그때는 부모 노릇한다고 어디라도 가자고 해서 나간 그저 평범한 하루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날은 정말 행복한 날이었구나. 그 날 우리 주변을 걷던 많은 가족들도 사실 다 행복했던 사람들이었어. 부부가 그냥 모양만 갖추고 사는 것도 어려운 것이구나. 속이야 어떻든 간에 같이 산다는 것이 이렇게도 대단한 일이었다니. 난 이제 그 시기로 돌아갈 수가 없구나. 잃어버리고 나서야 후회를 하다니. 


  '부부의 무늬를 유지하며 사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어.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일이야. 난 그걸 견디지 못했구나.'

 '이혼이란 것이 인생에 엄청난 일이구나. 이혼을 한 사람은 엄청난 일을 겪어낸 사람이었구나.' 


 남동생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첫 휴가를 나와서 한 말이 이랬다. "누나. 이제 휴가 나와서 길가에서 해병대 선임을 보면 진짜 달라 보여. 와, 이런 일을 겪어낸 사람들이구나.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보는 눈이 달라진다니까." 나는 이혼을 앞두고 주변에 이혼을 한 사람들을 한 두 명 떠올리며, 이런 고통을 견디고 살아가는 대단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다. 이혼은 흠잡을 것이 아니구나. 인생에 없어도 될 큰 사건을 겪으며 성숙해지는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구나.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이혼하지 말고 제발 살아달라고 애달프게 부탁을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랑이 아니라 '시아버지'였다. 

작가의 이전글 신랑이 취직을 했지만, 우리는 첫 이혼 위기를 겪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