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실격 Feb 14. 2022

생산 기획자의 비생산적인 글쓰기

무용한 글쓰기에 관해서

나는 제약회사에서 생산 기획자로 일한다. “일한다”라면 정말 생산을 기획하는 멋진 일을 할 것만 같으니 에두를 필요가 있다. 나는 제약회사 생산기획팀에서 “앗, 넵,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담당 중인 1년 차 신입사원이다.


삶이란 참 알 수 없다. 생산 기획자 이전에 난 20대를 굉장히 비생산적으로 보냈다. 효용에선 멀리 떨어진 문학을 좋아했다. 많은 곳을 여행했고, 음악을 들었고, 영화를 봤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생산보단 체화 쪽에 가까운 행위다. 계속된 인풋은 있으나 아웃풋은 없었다. 공정으로 비유하면 아무리 원재료를 넣어도 완제품이 안 나오는 셈이다. 비생산성의 산물이다. 그런 내가 생산을 기획하는 팀에서 일한다니, 참으로 우리 회사는 생선한테 고양이를 맡긴 셈이다.


생산 기획 팀은 여러 업무를 맡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생산”을 “기획”하는 일이다. 어쩐지 팀 이름에 모든 책임이 명기돼서 시시한 기분마저 든다. 그렇지만 생산을 기획하는 일은 복잡하고 어렵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제약 조건을 고려해서 스케줄링해야 한다. 각 공정별 리드타임을 고려해서 유휴 시간을 줄인다. 생산을 위해 필요한 부자재 발주도 내고 팀장님의 그날그날 기분도 파악해야 한다. 팀장님 기분은 보통 코스피 지수와 비례한다. 물론 내가 이 어려운 일을 도맡진 않는다. 다시 한번 상기하면 나는 앗, 넵,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담당한다.


아직 적은 책임을 맡으면서도, 생산 기획팀에서 일하다 보면 며칠, 몇 개, 몇 명 등과 같은 단위에 예민해진다. 그 작은 숫자들이 큰 톱니바퀴를 멈추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 지 몇 개의 부자재만 없어도 공장이 멈출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하루에 2억이 LOSS다. 그러다 보니 출근해 있는 9to6는 “효율성, 수량, 날짜, 도착시간, 배치 번호, 리드타임, 효용”에 예민해진다. 참으로 일평생 고민해본 적 없던 단어다.


삶이란 모름지기 균형이 필요해서일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날엔 유난히도 무용한 행위에 갈증이 솟는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원래였으면 영어를 공부하고, 재테크를 공부하고, 경제 관련 포스팅을 작성했을 참이다.

 그런데 손에 잡히질 않는다. 효용, 숫자, 데드라인 따위와는 최대한 거리가 먼 행위를 하고 싶었다. 커리어를 위해 필요한 일 보단, 나한테 필요한 일, 읽어야 되는 텍스트보, 읽고 싶은 텍스트를. 그러다 결국, 다시금 몇 달 만에 브런치를 켜고 글을 썼다.


나에겐 오직 쓰는 행위를 통해서만 채워지는 무언가가 있다. 글쓰기는 참으로 무용하다 싶으면서도 그 수상한 포만감은 오로지 쓰는 행위로만 채워지기에 결국 다시 쓸 수밖에 없다. 한참을 게워내고 나니, 오히려 풍만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다시 이 메거진에서 특별히 주제 없는 글을, 비생산적인 글을, 세상에 무용한 만담 같은 글을 적고자 한다. 다짐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다. 투덜투덜 #필패하는자소서를 쓰던 취준생이 사회 초년생이 된 이야기라고 봐주면 좋겠다. 나도 이게 시리즈물이 될지는 몰랐다.


#필패하는자소서

https://brunch.co.kr/brunchbook/feel-fai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