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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Feb 15. 2022

회사일에 주객전도 되지 않기

생산 기획자의 비생산적인 글쓰기

독서 모임을 4년 차 운영 중에 있다. 지금은 7명이나 돼서 독서 모임 대기업이지만 당시는 언론사를 준비하던 친구와 나 단 둘이었다. 우린 대학생 마지막 학기와 취준생 경계에 있었다. 감상적인 표현을 걷어내고 말하자면 시간이 아주 많던 백수였다. 매주 문학책 한 권을 읽고 이디야, 스타벅스, 카페베네, 탐엔탐스에서 책과 인물과, 작가에 대해 떠들었다. 우리는 모임에 진심이었다. 친구는 더 스마트하게 독서하기 위해 아이패드를 구매해 e-book으로 읽었다.

 그런데 그 이후 애플 워치, MAC, 그리고 신형 아이폰도 산 걸 보면 꼭 e-book이 목적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나와 독서 모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다툼이 있어서도, 어려운 책을 읽어서도 아니었다.(물론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을 땐 위기긴 했지만)

 책 읽는 절대 시간량이 부족해졌다. 우리라고 언제까지 취준생일 수는 없지. 나는 2020년 5월에 첫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자 격주에 한 권 읽는 책도 부담이 됐다. 나는 내가 가진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회사와 맞바꿨다.


첫 회사에서 빈번히 야근했다. 가이드가 명확하지 않던 팀장 탓도 있었고, 업무의 절대량도 많았다. 회사 분위기도 남달랐다. 매년 큰 폭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양옆 동료들은 집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나라고 근로계약서대로 6시 됐다고 땡 하고 집에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와 남은 일을 더 하고, 귀가해서 씻으면 정말이지 하루가 끝났다.


그러니 독서는 사치였다. 나는 책 읽기 같은 말랑말랑한 일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잠시 독서 모임을 유보하려 했다. 일에 적응한다는 핑계도 좋았다. 사실 이미 그렇게 그만둔 친구들이 많아서, 모임을 떠나는 젠틀한 인사 방법이기도 했다. 지금 와서 왜 취업하면 책 모임을 그만둘까 생각해보니, 독서 모임은 취준생에겐 특식 같고 직장인에겐 조금 철 지난 취미로 포지셔닝된 느낌도 든다.


숨겨둔 사직서를 품은 마음으로, 혼자 마지막으로 예정한 모임에 참석했다. 부천이었고 푹푹 찌던 여름이었다. 월 마감이 가까워져 한참 예민했다. 모임 마지막에 밝힐 참이었다.


책 모임이 시작됐다. 늘 그랬듯 근황에 대해 먼저 얘기 나눴다. 다음은 준비해 온 질문을 주고받았다. 책에서 거리가 먼 질문부터 책의 핵심부와 가까운 순으로 진행됐다. 질의에 대한 답변 중 반박도 오갔다. 얘기가 진전되던 중 누군가 시덥잖은 가설을 꺼냈다. 그리고 누군가 그걸 또 “맞아 실제로 작가가 그 부분을 의도했을 수도 있어요”라고 진지하게 받았다. 그렇게 2시간 동안 공방이 오간 뒤 각자 별점을 정하며 모임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모임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그만뒀다.


가끔씩 바로 앞 일에 급급하다 보면 더 중요한 걸 놓칠 때가 있다. 이 케이스가 그랬다. 회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독서 모임을 그만두는 건 행복 총량 관점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다. 독서 모임을 하는 두 시간 동안 정말이지 회사에선 얻지 못하는 깊은 즐거움이 샘솟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경제적인 고민 없이 하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 그러니, 회사를 핑계로 독서모임을 접으면 앞, 뒤가 바뀌는 꼴이다.


나는 좋은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 문장이 정갈하거나, 내면을 깊이 탐구한 묘사는 혼자 입을 틀어막으면서 읽는다. 그렇게 읽은 책을 모임 친구들과 얘기하는 일은 더 즐겁다. 책 이야기는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다. 어디 책만 그럴까. 축구도, 영화도,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도, 회사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가끔 회사 일에 몰입하다 보면 내가 대단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건 "회사 일"일 뿐이다. 땀이 뻘뻘 나던 부천역 독서모임을 하는 2시간 동안 그걸 깨달았다. 이 모임은 "회사 일"만큼,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내 행복에 중한 일이라고.


요즘도 가끔 퇴근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많다. 만사가 귀찮고 누워서 유튜브만 보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저녁을 보내면 억울하다. 회사 일 때문에 정작 중요한 내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못해버린 것만 같다. 결론적으로 회사에 진 기분이다.


그래서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는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책 읽고, 가계부를 정리하고, 단기적인 목표를 짠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던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하나 둘 해치운다. 자주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간 또 착각할 수도 있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게 경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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