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감에서 안도감으로
왕복 6차선 도로 앞에서 신호를 대기 중이었다. 10살 근처였을 거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출발이 조금 늦었던 나는 먼저 출발한 앞사람 걸음에 시선이 갔다. 또래로 보였던 아이는 시선을 아래로 둔 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뎠다. 걸음을 출발할 때 들었던 의구심은 마침내 건너편에 다다랐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분명 횡단보도 흰색 부분만 밟으며 건너고 있었다.
어렸던 나는 무언가 들키고,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하얀색만 밟는 건 횡단보도와 나만 공유하는 규칙이었다. 그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나 말고 누군가 하얀 부분을 의식한다는 사실은 시점을 1인칭에서 3인칭 세계로 확장하게 된 최초의 경험이 됐다.
이제 더 이상 신호등을 건너며 앞사람 발걸음을 의식하지 않는다. 대신에 좋은 문학을 읽을 때 당시 느꼈던 경험을 상기한다. 이 행성에서 횡단보도 하얀색을 신경 쓰는 게 내가 유일한 인류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처럼, 문학을 읽는 동안 온전히 나만의 생각, 감정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때가 많다. 얼마 전 읽었던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을 읽으면서 자주 느꼈다. 지금 읽는 중인 남아 있는 나날도 마찬가지다.
다만 10살 때와 차이는 배신감 여부에 있다. 어렸던 나는 모든 내 감정이 고유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그런 착각할 만큼 순수하진 않다.
이제는 책을 읽으며 되려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느낀 무언가가, 누군가도 느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 내 생각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음을. 이 행성에서 횡단보도 하얀색에, 혹은 부끄러움에, 위선에, 계급에, 세대에, 삐뚤어진 마음에 관심을 가지는 게 나만이 아니란 사실은 위로가 된다.
그런 몇 번 소중한 감정과, 생각과, 세계의 연대를 경험하면 문학 읽기를 중단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