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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Nov 22. 2023

글쓰기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의지박약 직장인의 퇴근 후 글쓰기

오늘도 글을 안 쓰면 확 죽기로 했다.


저녁 5시 퇴근 시간이다. 하루 종일 모니터에 코 박고 있어 뻑뻑해진 눈을 꿈뻑인다. 아침에 까먹고 안 먹은 루테인이 생각난다. 어느덧 영양제를 매일같이 챙겨 먹는 나이가 됐다는 사실에 문득 서글프다. 양 어깨를 제껴 기지개를 켠다. 뭐가 됐든 퇴근 시간이다. 하루종일 전화에, 팀장에, 마감에, 숫자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 시간부터는 휴전이다. 열 나 있던 동료도 조금은 쿨다운한다. 


사무실 분위기도 웅성웅성 괜히 들뜬다. 5시 땡 하고 퇴근하는 사람은 겸연쩍다는 듯이 "오늘 급한 약속이 있어서"라며 문을 나선다. 타이밍을 못 잡은 사람들은 5~10분 정도 더 앉아 이것저것 정리하는 척 연기한다. 나는 매일같이 10분 정도 더 남는다. 내일 할 일을 적고, 답장 못 한 사람들에게 다음날 회신하겠다는 메신저를 남긴다. 그런 뒤 주섬주섬 집에 갈 분위기를 풍긴다.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퇴근에 좋지 못하다. 무언가 퇴근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비칠 수도 있다. 조금은 느긋한 척 "이깟 퇴근"같은 센 척을 하며 사무실을 나선다. 


오늘은 꼭 퇴근한 뒤에 글을 써야 한다. 누가 시켜서 쓰는 글이 아니다. 온전히 스스로와 다짐한 약속이다. 나는 퇴사하고 싶어서 글 쓴다. 회사와 영원히 작별하려면 나만의 무기가 필요하다. 문과를 졸업한 평범한 사무직은 이렇다 할 재주가 없다. 프로그래밍도 못하고, 누군가의 영상을 편집하는 일도 못한다. 

 그래서 더 부지런히 글 쓴다. 정확한 그림은 몰라도 부지런히 써나가면 그것이 나를 퇴사에 조금은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글이 아니라, 남들이 좋아하는 글을 탐색한다. 정보가 넘치고, 재미있고, 읽으면 부자가 될 것만 같은 그런 종류의 글들. 글을 써야 한다는 결기는 회사 스트레스와 정확히 비례해서 대게는 오후 2시에 가장 강하다.  


나는 정말이지 평생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싶다. 회사를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 나는 글을 쓴다. 오늘마저 글을 안 쓰면 어쩌면 나는 회사를 좋아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다. 그럴 리 만무하다. 평생 남의 일만 해주다 정년을 맞는 건 내가 꿈꾼 삶이 아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노래 2개 들으면 딱 맞게 도착한다. 고심해서 선곡한 다음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데 어째. 퇴근한 순간부터 세상이 조금 평화롭다. 공기도 상쾌하고 노을도 예쁘다. 오후 2시에 차가워서 꽁꽁 얼어 있던 결기가 조금씩 해빙된다. 음악이 유난히 달콤하다. 큰 성취감과 보람이 샘솟는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글을 쓰기 전에 잠시 소파에 앉는다. 그리고 잠깐 핸드폰을 연다. 이 정도 보상은 해줘도 괜찮다. 유튜브에 성시경의 먹을 텐데가 새로 업로드 됐다. 그냥 먹을텐데면 참아도 게스트가 나온다. 성시경은 매력 있는 호스트다. 그는 어떤 사람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단단한데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영상을 켜면서 새삼 "성시경은 회사 다녀본 적 없겠지?"싶은 마음에 질투가 생긴다. 30분이 흐른다. 피식대학 새로운 시리즈를 본다. 다음 30분이 지난다. 


회사에서 생긴 분노와 결기는 알고리즘의 도파민과 함께 누그러진다. 영상을 몇 개 보다가 귤을 까먹고, 그러다가 맥주를 한 캔 꺼내서 호로록 마신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9시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그런데 뭐. 글 한 편 안 쓴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또 글 한편 더 쓴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 하루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다 왔는데 굳이 또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새로운 일을 할 필요 있을까? 할 때 하더라도 이것까지만 보고 움직이자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다음 맥주 캔을 깐다. 다음 유튜브 영상을 본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니 11시 30분이다. 이제는 잘 시간이다. 


다음날이 되고 근로계약서에 서명한 대로 아침 8시 꼭 맞춰 출근한다. 회사에 앉아있지만 영혼은 다른 데다. 오후 두 시가 된다. 회사에선 화 나는 일이 많다. 갑자기 생기는 문제들, 보고서 작성 요청, 그리고 옛날에 내가 저질렀던 실수까지. 화장실에 가서 마음을 고쳐 잡고 다짐한다.


정말이지 오늘은 글을 안 쓰면 확 죽기라도 하겠다고. 오늘은 꼭 퇴근하고 글을 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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