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까지 멀쩡하던 컴퓨터가 점심 먹고 돌아오자 먹통이 됐다. 창 닫기를 여러 번 눌러도 엑셀과 파워포인트가 그대로다. 노트북은 큰 소리를 내면서 팬이 돈다. 전원 버튼을 꾹 눌러 노트북을 강제로 종료한다. 다시 전원버튼을 눌러봐도 깜깜무소식이다. 운명을 다 했다. 나는 고작 이년 사용한 컴퓨터다.
삶은 참 아이러니하지. 진료를 앞두면 진통이 멀끔해지고, 지저분했던 머리는 미용실 거울에선 알맞은 것처럼, IT담당자가 살포시 전원을 누르자 금방 켜졌다. 얄궂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강경하게 파업했어요”라고 말하지만 증거가 없다. IT담당자는 이번엔 무사히 잘 켜졌지만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노트북을 사용하는 건 위험하다면서 포맷을 권했다. 그는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껐다 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포맷으로 해결해 왔다. 그러니 이번 증상은 중증인 셈이다.
외장하드를 건네받았다. 포맷하기 앞서 모든 자료를 백업 하란다. 괜히 옆팀 차장님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모든 자료를 싹싹 긁어모으라고 충고를 더했다.
자리로 돌아온 뒤 모든 파일을 영끌했다. 지난 2년간 주고받았던 메일도 옮겼다. 하루하루 살 땐 몰랐지만 정리를 하니 많은 자료가 쌓여 있었다. 보고서로 만들었지만 보고되지 못한 파일도, 매일매일 열어보는 업무 일지 파일도 있다. 실수할 때마다 적어놓은 오답노트도 있고, 장기적인 계획도 담겨 있었다. 공들여 파일을 옮긴 다음 노트북을 가져 놓았다. 돌아오니 책상 위엔 외장하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외장하드를 바라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똘똘한 사람 누구라도 이 외장하드를 잘 뒤적이면 내가 해왔던 업무를 익힐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외장하드엔 내가 일했던 모든 히스토리가 담겨있다. 실제로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전임자가 두고 간 파일을 보면서 업무를 숙지했다. 고급 인력까지 필요 없이 더하기 빼기 잘하는 누구라도 이 외장하드 안에만 잘 뜯어보면 내 업무를 익히기 충분하다. 그 말인즉슨 이 외장하드가 건재하는 한,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자 문득 외장하드가 미워진다.
회사엔 체계가 있다. 시스템이라고도 부른다. 그건 유기적이다. 전통 있고, 업력이 길수록 이 시스템은 견고하고 조직화돼 있다. 한 명의 이탈자가 발생해도 회사는 문제없다. 체계라는 큰 틀에선 금방 공백을 메꿀 수 있다. 만약 어떤 작업이 대단한 능력을 요하면 다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귀하다. 큰 톱니바퀴는 언제든 나사에서 부품을 갈아 끼우는 것처럼 사람을 수급할 수 있다. 이 당연하고 자명한 사실을 몰랐던 적 없었으면서 새삼 백업돼 있는 외장하드를 보고 있으니 불편하다. 이래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나 보다.
나는 입사하자마자 퇴사를 준비했다. 가급적 빨리 이 톱니바퀴에서 벗어나보고자 시도했다. 그게 뭐가 됐든 나만의 작은 톱니바퀴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다. 능동과 수동의 차이일 텐데, 회사에선 큰 질서 아래 저절로 움직여지지만, 톱니바퀴를 스스로 만드는 일은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한다. 동시에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감내하겠다는 말도 된다. 아직 나는 그릇이 작다. 다만 언젠가 벗어나길 소망할 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만약 누군가 내 뇌를 전부 백업하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내 업무 히스토리가 모두 백업된다면 그건 나일까 아닐까.
회사 입장에선 상관없다. 그게 누가 됐든 톱니바퀴만 문제없이 굴러가면 된다. 그게 철수가 됐든 영희가 됐든 민호가 됐든 말이다. 회사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면, 나 역시 회사에 너무 진심일 필요는 없다.
잡념이 마칠 때쯤 노트북이 돌아왔다. 전원을 누르자 방긋 켜진다. 포멧과 백업을 하는동안 오후 중에 할 일을 못 마쳤다.남아서 더 해야할까? 글쎄, 이번엔 내가 파업이다. 내일의 나한테 맡겨야지. 조금은 더 내려놓아야지.조금은 더 거리를 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