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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Jan 31. 2024

의사결정 안 내려주는 상사 밑에서 성장하는 법

5가지 방식으로 문제 해결하기

의사 결정이 늦는 상사의 대부분은.... 지도 몰라서일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설렌다. 첫 출근, 첫 등교, 첫사랑. 하지만 처음 다음 명사가 "업무"면 말랑말랑하던 분위기는 스릴러/호러 장르로 바뀐다.


낯선 업무가 부여된 건 24년 1월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회사가 신제품을 런칭했다. 21년 입사 이후로 처음이었다. 호재라 주가도 아주 살짝 들떴다. 그 덕에 단지 "아들 회사"가 투자 이유의 전부인 부모님도 조금은 한숨을 덜었다. 그래봤자 -40%에서, -37%가 됐지만.


신제품 런칭이 오랜만인 만큼 회사는 단단히 준비를 했다. 마케팅 팀이 PM(Project manager)이었다. 각 부서별 주차 간트 차트를 그렸다. 팀마다 준수해야 하는 타임라인이 명확했다. 회사 안에선 신제품 론칭이 늦춰지면 안 된다는 비장함이 돌았다.

 마케팅 팀은 "회장님"을 암행어사 마패로 사용하기로 결심한 듯, 문제가 생길 때마다 "회장님이 말한 ~~런칭 타임을 생각하면", "그런 사유는 다 괜찮은데, 일전에 회장님이 말했던~~에 따르면"과 같은 화법으로 대화에서 승기를 가졌다. 회장님 이름을 빌릴 수 없는 잔바리 팀은 그저 어명을 전하는 마케팅 팀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팀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신제품 런칭에 대단히 연관돼 있는 부서는 아니다. 생산 일정 계획만 잘 짜면 그만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원료도 체크하고, BOM, RECIPE 제정, 제조 우선순위도 정하고, 어쩌고 저쩌고 고려할 것도 많지만 타 팀에 비해선 루틴 한 업무였다.


적어도, 그 1월에 갑자기 마케팅 팀이 암행어사 마패를 들고 새로운 업무를 요구하기 전까지는.  


업무의 내용을 디테일하게 기술하진 않겠다. 골자는 "런칭에 앞서 몇 가지 사전 작업을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요구였다. 실로 간단한 주문이지만 뒤에는 얽매여 있는 게 많았다. 그리고 큰 문제는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가장 무서운 암묵지 상태.


내가 뭔가를 모르는데, 무엇을 모르는 지조차 몰라서,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빵구가 나기 딱 좋은 상태.


팀장한테 문제를 리포트하고 가이드를 요청했다. 여러 번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를 마음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팀장은 확인해서 알려주겠다고만 할 뿐 며칠이 지나도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의사 결정이 늦어지면 신제품 런칭 일자에 영향을 주고, 그러면 마케팅 암행어사는 우리 팀을 쥐잡을 듯이 잡을 테니 어떻게 하면 될지 당장 의사 결정을 내려 달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1월은 아직 작년 고과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기간이다. 그렇게 들이박았다간 A 받을 거 B 되고, B 받을 거 C가 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고과 기한이 아니라도 그 정도로 직진하는 건 내가 해왔던 방식은 아니다. 결국 급한 사람이 우물을 찾는 일. 스스로 발 벗고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그래서 나는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어찌어찌 물어가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뒤돌아서 생각해 보니 아래의 5가지 방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단을 깔끔하게 매듭지으면서 분명 내면에서 커리어적으로 한 뼘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나처럼 의사결정 안 내려주는 팀장을 만난 사람이 있다면 아래의 다섯 가지 스텝을 따라보자.


1) 답답하면 직접 공부한다.

일단 친숙한 엑셀을 열고 작업을 정리했다. 배경과, 목적, 그리고 최종 완성됐을 때의 모습을 적었다. A4 반 페이지 분량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에 예상되는 RISK를 나열했다.

 그러나 혼자 RISK단계를 검수하기엔 모르는 게 많았다. 무언가 계속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된 모든 부서에 메일을 돌렸다. 내용은 "마케팅 요청 사항으로 ~~ 종류의 작업을 하게 될 텐데, 이게 제품 런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느냐"라는 메일이었다. 그리고 "~~ 까지 꼭 회신을 부탁하며 아무것도 없다면 N/A로 표기해서 회신을 달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이건 사실 굉장히 치사하면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언제나 메일은 증거가 된다. 만약 추후 문제가 생기더라도 메일은 면피할 무기가 돼준다. 혼자 진행했다면 독박이지만, 이미 관련 팀에서 영향 평가를 했기에 그 팀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다. 사실은 비겁한 방법이지만, 이 또한 회사에서 잘 살아남는 방식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꼭 증거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다른 팀들의 의견을 통해서 예상되는 RISK의 질과 양이 확실하게 개선됐다. 메일 속 답장을 모아 한 페이지로 정리했다.


2) 상사에게 객관식으로 묻기

위의 한 페이지짜리 "작업 내용 마스터 파일"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그렸다. A, B안으로 2가지 방법이 나왔다. 두 개 모두 팀장에게 보고했다. A는 공장에선 수고스러움이 덜하지만, 본사에서 판매하거나 유통할 때 어려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B안은 꼭 그 반대였다. 장, 단점 외에도 A와 B로 갔을 때 어떻게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을지를 함께 적었다.

 그렇게 주관식에서 객관식으로 문항이 바뀌자 매번 대통령처럼 거부권만 행사하던 팀장님도 결국 특정 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공장이 힘들지만 본사에선 팔기 좋은 안이 채택됐다. 그러니 시나리오와 컨셉은 다 결정된 셈이다.


3) 전체 회의 소집 후 그 자리에서 R&R 결정짓기

이제 방향, 컨셉, 타임라인은 전부 결정됐다. 이제는 "누가",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할 지에 대한 R&R정리가 필요했다. 이런 산만하고 정돈되지 않는 일을 할 때는 유난히도 "똑같은 온도"와 "똑같은 사전 약속"을 공유하고 있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예시를 들어보겠다. 만약 물류팀에서 제대로 된 정보, 가령 엑셀 한 줄만 다르게 보내도 본사 SCM팀에선 전체 수량이 틀어진다. 고작 "엑셀 한 줄"이라고 말하면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한 줄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전체 출하 타임라인에 영향을 준다. 그러니 분명 사소하면서 동시에 중대한 논의다. 그리고 그런 중대하면서 사소한 결정은 꼭 실무진들끼리 가능하다. 그래야 정말 디테일게 논의될 수 있다.


RISK평가를 요청했던 실무자들에게 전체 미팅 콜을 보냈다. 미팅에 앞서 대략적인 작업을 과업별로 툭툭 잘라놓았다. 그 후엔 단계 별로 어느 팀이 담당할 수 있는지를 결정했다. 그 미팅 안에서 모든 R&R을 최종적으로 FIX 시키는 게 핵심이다. 그렇지 않았다간 추후엔 뒷말이 나온다. 팀과 담당자 이름까지 정확히 기입해 넣으면서 담당자를 결정지었다.  


4) 말을 문서로, 회의록 공유하기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회의가 마치면 분명하게 회의록이 나와야 한다. 이 회의록도 말하자면 "증거"의 역할을 한다. 미팅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참석했더라도 내용을 다르게 이해했을 경우도 있다. 그러니 거기서 생긴 모든 말들을 내 언어로 다시 번역해서 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회의 마친 다음날 오전에 회의록을 뿌렸다.


5) 문제 집행 및 종료

그리고 특이사항 없이 과업을 끝냈다. 공장에서 "끝냈다"의 알파와 오메가는 "제품이 출하 승인이 되다"이며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제품 생산의 A to Z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니 문제를 잘 해결한 셈이다.



나는 이 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크게 두 가지를 느꼈다.

첫 번째, 의사결정을 안 내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지를 바꿔 보자. 주관식에서 객관식으로.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가 문제의 출제자가 돼야 한다. 출제자는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디테일한 이해가 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가이드를 받기에 앞서서 오히려 가이드를 팀장한테 줘라. 그쯤 되면 의사결정을 피할 도리가 없다.

두 번째, 마패는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일하겠다는 사람이 집어 드는 거다. 처음엔 마케팅 팀만 멋진 마패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급해지자 나 역시 그 마패를 들먹였다. 위 일을 하는데 수동적인 팀을 만면 "이거 언제까지 회장님이 출하 승인 내달라고 요청한 건인데"라는 말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러니 사실 마패는 누군가가 부여하는 게 아니다. 급한 사람, 혹은 문제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집어 드는 명분인 거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아니라 그냥 만만디 의사 결정이 느린 상사도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결정도 아니고, 심지어 결정을 다 내렸음에도 기안 승인을 안 해주는.


그건 그냥 뽑기에서 실패한 거다. 당신에겐 죄가 없다. 적어도 스스로 열심히 했다면. 다음 회사에선 좋은 상사 만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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