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유난히도 힘든 날이었다. 아침 9시부터 중요한 회의를 마쳤다. 출장까지 마치니 늦은 저녁이었다. 집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했다. 배차 간격이 길었고, 출발지였던 만큼 승객은 적었다. 버스가 와서 적당한 자리를 골랐다. 의자는 뒤로 눕혀져 있었다. 전 탑승객이 원복 하지 않고 내린 듯하다. 자리에 앉았다. 꼿꼿하던 옆 의자보다 편했다.
서울역에서 신촌으로, 신촌에서 홍대로 갈수록승객이 많아졌다. 사람 많은 금요일 저녁이다. 송도와 서울을 오가는 버스는 몇 없다. 탑승객이 우르르 탑승했다. 금방 자리가 채워졌다. 뒷좌석에도 사람이 앉았다.
눈을 감은 채로, 의자를 올려야 할지 고민했다. 젖혀있는 의자를 세우는 게 뒷사람을 배려하는 일이다. 그런데 내 앞 의자도 마찬가지로 나를 향해 누워있다. 사실 의자가 뒤로 좀 누워있다고 유난히 폐 끼칠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의자를 올려도 되지 않아도 되는 가장 큰 당위는 “내가 눕힌 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의자는 내 손에 피 안 묻힌 편한 의자다.
바빴다던 그날은, 점심을 먹으며동료와 국민연금 제도로 열불 나게 토론했던 날이다. “고령화 속도를 보면 젊은 세대들의 국민연금 부담률은 더욱 높아지고, 낸 만큼 못 받을 수도 있는데,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 “는 불만이었다. 학문이 짧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들은 거기서 거기였으며, 결국엔 “연금 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지”라는 낭만적인 해결책으로 합의했다. 대의를 위해선 개인의 이익은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꼭 그런 기회가 생겼을 때 먼저 연금 수혜액을 낮추자고 말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하필 그 의자에서 그 대화가 떠올랐던 건 왜일까.
국민연금을 지키는 사람들과 의자를 바로 세워야 고민하는 내 모습이 오버랩 된다. 누구나 자신의 것을 내려놓기 어렵다. 연금이라면 더 그럴만하지. 누구라도 적게 내고, 많이 받고 싶다. 만약 친구와 내가 65살 어느 날에 점심을 먹으며 국민연금을 얘기했다면 오늘 대화는 정반대로 흘렀을 거다. 연금 부담률이 더 높아야 한다고.
나는 국민연금 수혜자가 뒷세대를 배려할 줄 모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건 아직 연금과 거리가 멀어서 내뿜는 쿨한 정의감일 거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선, 그 사람 입장이 돼 봐야 한다. 나는 고작 기울어져 있던 의자에서도 마땅한 일을 바로 세우고 싶지 않았다. 의자가 편하더라.
이 글이 국민연금에 대한 논의를 위함은 아니다. 실질적인 필요성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 그 보단 내 이중성에 대한 고백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불편하지 않는 선에서만 정의로웠다. 내 이상은 “환경을 지켜야 한다 “고 생각하지만 여름엔 에어컨 없는 곳엔 가지 않았다. 법은 모두에게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땐 내 쪽으로 조금 더 유리하길 바랐다. 장애인은 배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꽉 찬 주차장에서 비워져 있는 장애인 주차 구역을 볼 때 “어쩌면 저건 낭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국민연금에 대한 생각도 그 연장선 중 하나다. 점심에 내가 열불을 냈던 이유는, 내가 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받을 나이가 되면, 뜨거웠던 나를 어색해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 이상은 실제 내 모습과 너무 달라서 그 괴리감에 나는 자주 부끄러워했다.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과, 실제 내 모습이 일치할 수 있을까. 같아지진 못하더라도 비슷해질 수 있길 바란다. 감았던 눈을 떠서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