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지나가다가 깨끗한 신축 건물 한 쪽을 통째로 덮은 현수막을 보았다. 그 현수막에는 올해 말 영어 유치원이 개원한다는 공고가 쓰여 있었다. 안 그래도 지나다닐 때마다 도대체 이 건물엔 뭐가 들어올까 궁금했었던 차였다. 아파트 단지와 가까운 곳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길래 이왕이면 괜찮은 빵집이나 카페가 들어섰으면 했는데,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나 빵집으로는 월세를 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는 연관이 없으니 잘 모르지만, 예전 회사에서 같이 지내던 유부남 아저씨들 말로는 영어 유치원이 꽤나 비싸다고 했었다. 한 달에 100만 원도 넘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슨 대학교 학자금보다 비싼 유치원이 어딨냐며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영어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볼 만하겠다는 아저씨들의 말씀도 일리는 있었다. 나도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영어가 큰 콤플렉스였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나처럼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수능만 열심히 준비한 경우도 있었지만, 뉴스에서나 보던 별세계에서 온 외계인들도 많았다. 외고나 과고는 물론이고, 외국에서 공부하다가 온 아이들도 얼마나 많은지 영어 정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 같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과목의 수업을 영어로 듣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일부 과목에서는 팀 프로젝트를 영어로 발표하게 시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름대로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강의실 앞에서 버벅대며 중얼거리다가 내려오고는 했다. 학점을 잘 받고 못 받고를 떠나 망신만 남은 창피한 기억이었다.
영어가 고급 정보 습득의 도구라는 건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영어를 잘 하면 수능과 내신도 잘 받고, 그러면 좋은 대학교에 가고, 취업도 잘 하고 승진도 쉽고, 결과적으로 영어만 잘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한다는 환상. 아마 이 환상을 나만 가지고 있지는 않나 보다. 고려대 학생신문인 고대신문에서 200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399명의 고려대생 중 대부분이(84.1%) 여건만 된다면 내 자식을 유학 보내겠다고 응답했다. 유학을 보내겠다고 답한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49.9%) 학생들이 ‘자녀의 시야가 넓어지고 국제적인 감각이 길러질 것 같아서’를 그 이유로 꼽았으며,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27.7%)라는 답이 뒤를 이었다. (고대신문, "본교생, ‘내 자식’은 유학도 보내고 사교육도 시켜야", 2008년 11월 8일※) 그 누구보다도 한국 교육계의 최전선을 몸으로 직접 겪어낸 명문대생들이 생각하는 결과가 이렇다는 말이다.
살다 보면 종종 어떻게 공부했냐는 질문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책 많이 읽고, 고등학교 즈음부터 마음잡고 공부했더니 되더라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한 이야기였다. 우리 부모님은 공부하라고 크게 닦달하지도 않으셨고,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방황하지 않았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몇 번 도망친 정도랄까. 그래서 만약 나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다. 나를 닮았다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믿음도 있고, 내가 해보니 본인이 직접 필요성을 느껴야 되더라는 경험적 증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 유치원이 된다면 조금 생각이 달라진다. 영어는 어렸을 때 해야 된다던데, 발음은 크고 나서 하면 안 고쳐진다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음이 조급해질 것 같다. 내가 영어 때문에 고생했으니 내 아이는 그렇지 않았으면 한달까. 안 그래도 궁금해서 미국 유학을 오래 하신 과장님께 여쭤봤다. 과장님 아이들은 영어를 어떻게 가르치고 계신가요. 역시나 외국에서 배우신 분이라 답도 명쾌했다. 나도 더 배워야 함을 늘 느낀다.
"영어 유치원? 뭐 그런 데를 보내. 나중에 아이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때 배워도 돼. 내가 미국 나가서 해보니 그렇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