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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생 Oct 24. 2024

나도 작업이란 걸 합니다.

당신은 밥을 먹고 무엇을 하시나요?

내 주변에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다. 음악을 하는 친형을 포함하여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주어진 재능을 활용하여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이, 난 늘 부러웠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로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주체성’과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을 '계속해서 쌓아간다'는 점을 유독 부러워한 것 같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작업’이란 걸 했다. 작업. 남들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끙끙 머리를 싸매가며 고민하는, 불에 달군 쇠붙이를 끊임없이 두들기는 연단의 과정 같은, 외롭고도 치열해 보이는 그 단어를 나도 갖고 싶었다.


예술 : 미적(美的)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 원래는 기술과 같은 의미를 지닌 어휘로서, 어떤 물건을 제작하는 기술능력을 가리켰다.

<두산백과>


예술을 설명하는 문구에도 '기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듯이, 작업은 나만의 무기, 즉 수단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이 수단을 찾기 위해 20대에 나는 이곳저곳 나를 던져가며 테스트해 왔다. 재밌어 보이거나, 보기에 좋아 보이거나, 남들이 하는 것 중에서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시작하고 봤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금방 싫증이 나 평생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왜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게 없을까? 나도 좋아하는 것만 찾게 되면 평생 밤낮으로 그것만 해가면서 나만의 길을 걸어갈 텐데. 그러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을 텐데.' 하는 생각에 지금 이 순간이 늘 아쉽고 답답했다. 사람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정답을, 먼저 찾는 사람이 유리한 게임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깨달음을 통해 생각이 정리되거나 확장되는 기분을 좋아한다. 친구와의 대화,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유튜버의 콘텐츠나 작가님의 책, 설교 말씀, 과거 회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나에 대해 회고하며 깨달음을 얻는 편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내가 좋다고/예쁘다고/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고, 대게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가 '큐레이션'과 관련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주변 평가와 함께 아래 과거 사례를 돌아보며 깨닫게 되었다.


- 2012년 12월, 수능을 마치고 시작한 알바 첫 월급으로 프라이탁 가방을 샀다. 당시엔 엄마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쓰*기 같아 보이는 가방을 이 가격에 사 온)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 브랜드를 좋아했고 주변에 알려왔다. 최근에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대중화가 되었고 트럭 타프천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즐기는 친구도 보았다.

- 빈티지 제품을 좋아하고, 모자를 즐겨 쓰는 편이다. 2022년도 빈티지 의류가 특히 유행할 시기에 온라인 빈티지샵도 덩달아 늘어났다. 여러 샵들의 제품의 퀄리티와 판매율을 보았을 때 나도 이 정도는 충분히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베이와 같은 해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내 취향에 맞는 빈티지 모자를 구매하여 케어한 뒤, 이를 판매하는 온라인샵을 오픈했다. 약 1년간 3차례의 플리마켓과 천 개가 넘는 모자를 판매했다.

- 대학시절, 타인의 사용하지 않는 영화 할인 혜택을 구매해 혜택 없이도 저렴한 가격에 영화를 보던 나는, 이를 중개하는 서비스를 오픈했고 10만여 명 이상의 고객들이 이용하는 서비스로 성장시킨 경험이 있다.

- 이 밖에도, 일상 혹은 여행지에서 괜찮은 음식점이나 장소 등을 잘 찾아내는 편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앞으로 삶을 살아갈 때 고민을 줄여줄 기준이 생긴다는 것과 같다. 과거에 해온 선택과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마음, 그 기저에 깔린 '알맹이'를 알게 되면 앞으로 더 뾰족한(확률이 높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능하면 자주 깨달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책을 읽을 때에도 꼭 샤프를 옆에 두는데, 내용 중 와닿는 한 꼭지를 잡고 한편에 메모를 적으며 내 생각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실 안 해도 괜찮다.(실제로 잘 안 해왔다) 생각이 정리되고 확장되는 그 느낌이 즐거울 뿐이지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깐.


음악을 하는 친구와 어느 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의 배경을 먼저 얘기하자면,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해왔지만 집안 사정으로 중단 후 공대를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마케팅 직무에서 일을 하고 있다.(필자도 공대를 졸업하고 마케팅 직무에서 일하고 있다) 최근 친구는 회사 업무와 다시 음악을 병행하고 있고 추후에는 음악에만 전념하고 싶어 한다. 이와 같이 배경이 비슷한 친구에게 작업에 대한 나의 갈증과 책을 읽으며 메모하는 즐거움에 대해 얘기했다. 나도 너와 같이 작업이란 걸 하고 싶다고. 너는 작업을 왜 하냐고 물었다. 친구는 퇴근 후 피곤하지만 작업을 하는 이유는 즐겁고 살아있는 기분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 해도 상관없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앞으로도 평생 할 것 같다고. "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네가 책을 읽고 메모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내가 작업을 하는 이유와 같은 것 같다. 그 과정을 너의 작업으로 진행해 보면 어떨까"하는 제안을 해주었다.


아! 표현하기 전 나를 아는 것까지가 작업이구나. 결국 나를 표현하는 것이 작업의 목적인데, 정작 '표현할 나'를 알아가는 것은 게을리하고 '표현할 수단'만 찾아왔구나. 어차피 수단을 찾았어도 무엇을 표현할지 막막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던 깨달음의 시간은 나로서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었다. 단순히 즐거운 느낌을 받는 것을 넘어서,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멈춰 죽어가는 것. 부단히 의도적으로 깨달음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야겠다. 당장은 이 과정을 글로 기록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게 맞는 수단을 찾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못 찾아도 상관없다. 수단 없이도 작업은 계속해야만 하니깐.


이제야 나도 작업이란 걸 합니다.     

 

서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데, 조르바가 두목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목, 당신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주십시오.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게요.” 이 문장이 원인이었다. 이 문장은 나에겐 해방이었다. 나는 밥을 먹고 하는 일이 없었고 고로 아무도 아니었다. 아주 심플했다.
 
<아무튼, 메모>, 정혜윤 지음, 위고, 2020,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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