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판나코타(2)

사진: Unsplash의Denis Blzz

by 주이슬

그랬던 경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원도에 간다. 오늘은 혼자서 여유롭게 강원도의 맑은 공기를 만끽할 예정이고 내일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으로 간다. 심지어 경선이 먼저 그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경선은 강원도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자신의 대범함을 떠올리며 괜히 키득거렸다.

경선은 항상 눈이 내리는 새하얀 자작나무 숲에 가고 싶었다. 시린 눈이 온 세상을 덮고 그 한가운데 본인이 서 있는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차가워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싶었다. 그 공기가 부여한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감도 얻고, 절친도 사귀고, 여행기도 쓰고, 책도 내고, 여행작가 지경선의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일화에 감동한 독자들이 눈물을 훔치고……. 하지만 울진에서 도망치듯 나온 경험은 경선에게 두려움을 심어줬다. 그 두려움을 깨기엔 너무 먼 곳이었다. 그렇게 망설이고만 있던 어느 날 수현의 글을 읽고야 만 것이다.

경선의 유일한 취미는 여행 카페를 탐방하는 것이었다. 생동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많은 카페 회원 중에서도 특히나 부러운 사람이 바로 수현이었다. 수현은 경선과는 달리 예쁜 카페에 당당히 들어가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경선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던 공간들을 수현은 자유롭게 쏘다녔다. 국내는 물론 스물세 살 때 혼자서 남미 여행도 떠날 정도로 종횡무진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남미에서 노르스름하게 익은 자신의 피부가 생동감을 더해 주는 것 같다며 주기적으로 태닝샵을 방문했다. 주말이면 가볍게 짐을 꾸려 국내 여행을 다녔다. 경선은 수현의 글이 올라올 때마다 꾸준히 댓글을 달았다. 어떤 날은 본인에게만 달린 수현의 답글에 우쭐해지기도, 어떤 날엔 본인에게만 달리지 않은 답글에 하루 종일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했다. 수현은 본인과 달랐다. 작고, 마른 체구가 당장에라도 날 수 있을 듯 자유로워 보였다. 경선은 동경과 질투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자꾸만 마음이 뾰족해지려고 할 때마다 더 열심히 댓글을 달았다.

경선이 읽은 수현의 글은 다음 주 토요일 강원도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 중이니 여행지를 추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동행 문의도 환영한다는 끝머리를 읽자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척추 아래에서도 박동이 느껴졌다. 얼마나 세차게 뛰었던지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아 경선은 허리를 굽히고 심호흡을 몇 번 해야 했다. 어느 정도 진정 되자 경선은 황급히 강원도 인제군의 일기예보를 살펴봤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많은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 기사가 속속 올라와 있었다. 경선은 이번에야말로 눈이 쌓인 자작나무숲에 갈 기회임을 확신했다. 20여분 간 말을 썼다 지웠다 하던 경선은 결국 수현에게 쪽지를 보냈고, 수현은 경선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둘은 토요일에 만나 함께 자작나무 숲을 오른 뒤 점심까지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인제 터미널 앞,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이었다. 구미에서는 인제까지 한 번에 가는 차편이 없었다. 경선이 구미시에서 원주시를 경유해 오전 8시 30분까지 인제군에 도착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하루 일찍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다.

차편 예약까지는 수월하게 마쳤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머물 곳을 어디로 정할지 고민이 됐다. 경선은 서른 중반이 되도록 본인을 위해 하루에 10만원 이상 투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경선이라고 잘 꾸며진 호텔을 가고 싶지 않았을까. 넓은 침대와 큰 창, 눈부시지 않은 노랗고 아늑한 조명, 마음까지 씻어줄 것 같은 커다란 욕조와 거품 목욕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예약하려고 하니 1박에 15만원 정도 하는 금액이 발목을 잡았다. 차편이 애매해서 여유롭게 일요일까지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에 연박을 하게 된다면 30만원이 넘어갔다. 돈도 써본 놈이 쓴다고 경선은 결국 1박에 6만 5천원 하는 ‘호텔’을 예약했다.

장장 6시간 동안 버스에 실려 있던 경선은 찌뿌둥한 몸을 좌우로 돌리며 인제 터미널 로비에 들어섰다. 숙소 입실까지 세 시간 정도가 붕 떴지만 문제는 없었다. 시간을 보낼 곳은 이미 다 정해놨기 때문이다. 터미널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기적의 도서관이 나온다. 그 곳의 웅장한 원형 건축물을 구경한 다음엔 내부로 들어가 천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맞이할 것이다. 천천히 둘러보며 여유로움을 만끽하다 제목이 끌리는 책을 한 권 집어들 것이다. 종이가 적당히 익은 냄새를 충분히 맡은 뒤 밖으로 나갈 땐 공기가 한결 포근해져 있을 것이다. 이후엔 터미널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입실하는 것이 목표였다. 경선은 손차양을 만들고 눈을 한껏 찌푸렸다. 하늘이 너무 파랬다. 파랗고, 파랗고, 파래서, 넓은 하늘의 미아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경선이 누구인가. 이제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함께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났으니 괜찮을 것이다.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긴 경선은 도서관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하필이면 오늘이 휴관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망연자실하게 건물 앞에 서 있다가 다시 터미널 쪽으로 몸을 돌려 밥집이 모여 있는 거리를 향해 걸었다. 하지만 순댓국집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바글거려서, 백반집은 주인장과 눈이 마주쳐서, 막국숫집엔 손님이 너무 없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정처없이 헤매던 경선은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인제 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그곳에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 핫바, 소시지, 햄버거, 과자와 사이다를 구매했다.

“샌드위치는 감자 샐러드 들어간 거 하나 있는데, 이거 물래? …삼각김밥도?”

애꿎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실체 없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 터미널로 돌아간 경선은 몇 개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두 시간가량을 내리 앉은 채 목석처럼 버텼다. 배겨오는 엉덩이와 매표소 직원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묵묵히 견딘 후에야 ‘호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좁고 덜컹거리는 숙소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선은 수현을 떠올렸다. 수현은 1박에 15만원, 어쩌면 50만 원도 훌쩍 넘는 진짜 호텔에 머무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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