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살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쳐갈 무렵, 큰 아이의 궁금증 상자가 열렸다. 밥 먹는 중에도 무슨 생각인지 골똘해진다. 하고 싶고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라서 내 귀와 입은 휴가가 없다. 대뜸, 자기를 어떻게 낳았는지 묻는다. 여러 번 대화를 했었는데 계속 듣고 싶은 가보다. 신나게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두 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남편 눈은 이미 웃고, 끼어들 틈을 찾아 입은 달싹인다.
첫째는 검진 후 얼큰한 감자탕을 먹을 생각에 식사를 거르고 갔다가 얼떨결에 낳았다. 그래서 분만실 천장이 노오랗게 되는 순간을 체험했다. 둘째 때는 분만실의 노란 변화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진통이 오자마자 급한 대로 식빵에 땅콩버터를 치덕치덕 발라 전투적으로 입에 욱여넣었다. 녀석의 우렁찬 응애 소리를 기쁘게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땅콩버터 덕이다. 두 아이를 낳았던 전혀 다른 상황 비교와 표현에 모두가 몰입했다.
임신 때의 이슈들이나 감정, 출산 과정과 이후(출산과 관련된 산모 몸 변화의 극사실성은 온전히 배제)의 부모 시선 등을 전하며 아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출산은 나의 사건인 동시에 작지만 강한 내 가족 공동체의 일이다. 식구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사건 앞에 감히 집중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아이들은 경험해보지 않아서 추상할 수 없는 이야기 속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가진다.
출산할 당시 남편도 자신의 몫에 충실했노라 덧붙였고 첫째도 동생이 태어나던 날의 고충과 이후의 사건들을 풀었다. 가족 역사 형성에 일조를 했음에도 인식이 늦은 둘째만이 그저 듣고 따라 웃다가 시들해졌다.
요즘, 읽는 대로 필사하고 떠오르는 대로 적으며 조각들을 나열하고 있다. '다름'에 대해 정처 없이 떠돌다 얽혀버린 생각 타래를 푸는 중에 내게는 무거운 '가족'이라는 낱말에 닿았다. 두 낱말이 연결된 통로에서 가족의 의미와 정의, 상처와 용서, 머묾과 나아감 등을 떠올린다. 이때 내가 어떻게 태어난 거냐, 그날은 어땠느냐는 아이의 질문은 다행히도 여름날의 짙은 나무 그늘이 되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누구나 갖는다. 그 초기 질문은 공통적으로 '내가 왜 태어났지?' 혹은 '나를 왜 낳았지?'로 시작할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나타났으며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 정책에 힘입어 태어나게 되었다는 허무한 대답에 부모의 애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을 낳으라는데 잘 들어서지 않아 애를 태웠다는 말은 더 황당했다. 아, 내 생은 얻어걸린 거구나 싶어서 운 좋은 탄생으로 애써 꾸며 가치를 부여했다. 사춘기에 묻지 않고 다 자란 20대에 물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작가 이명환 님의 그림 동화책 <가족>은 네 파트로 나뉘어있고 글은 다섯 문장만 적혀있다. 그러나 두꺼운 글책을 읽는 만큼 오래 머문 채 그림을 읽고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작가가 그림으로 전하고자 하는 가족은, '다름이 아니라 같음을 보는 사람들'로 모두 설명이 된다. 똑같은 사물을 보는 표면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같음'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각자의 감정을 소유하게 된다. 그 속에서 의사를 표현하고 경청하고 다름과 다양함을 인정하는 '같음'의 이해에 마음을 둔다.
법정스님은 '진정한 인연에게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라' 그러하면 '좋은 삶을 마련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하셨다. 진정한 인연과 스치는 인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살았다. 애착이 부족한 내면이 계속 인간관계에 대한 갈증 상태였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좋음을 유지하는 한 사람과 연이 닿은 지 20여 년이다. 내게 진정한 인연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상은 가족임을 알려준 사람이다. 마음껏 헤퍼져서 기댈 수 있으면서 마음도 마구 퍼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인연은 지척에 있는 가족 하나 하나다.
당신이 소중한 만큼 나도 소중했어야 하는데 너무나 안타깝다. 스쳐갈 인연이었기에 그랬으려나. 내가 어릴 땐 당신의 걸림돌이었고 다 자라서는 도구적 필요였나, 씁쓸해진다. 겉만 가족이었던 울타리를 부수고 나왔다. 내게 함부로 찾아오지도 않았기에 더 귀하고 진실된 아이들과 속까지 알찬 가족을 만들어가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림 동화책 <가족>의 거인 아이는 자신의 모습과 같은 존재(진짜 가족)를 찾아 떠난다. 그 여정에서 만나는 인연들과 도움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어른이 되고 자아를 찾아 방황한다. 망망대해에서 어쩌다 오리와 고래와 나란히 유영을 한다. 서로를 의식하지 않던 오리와 고래는 떠났고 낯선 곳에 밝혀진 등대를 보고 거인은 다시 돌아선다. 엉뚱한 만남이었고 처음부터 외형이 달랐던 그들. 아이였던 거인은 어른이 되었고 젊던 요정 부모는 늙었다. 변하지만 같아지지 않는 외적 모습은 겉치레일 뿐이다. 한 때,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시간을 공유했던 그들의 재회에 쓰인 마지막 문장 하나,
"기다렸어"
나는 이유 있는 쓰라린 눈물을 마구 삼켰다.
두 녀석이 동시에 자기 요구를 말하는 경우가 잦다. 그럴 때면 귀는 하나씩 따로 알아듣고 그에 대한 말도 동시에 따로 뱉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에 혼자 웃는다. 합의된 하나의 요구를 바라는 건 '엄마 편의 독재 육아'다. 기다림을 알려주고 다른 요구에 적절히 반응한다. 욕구가 만족스럽게 충족되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멀티 엄마의 민주 유지'라고 포장한다. 이후 두 팔을 높이 들어 비루한 몸을 비틀며 조용한 환호성을 지르는 의식을 치른다. 그럼 엄마가 춤추는 줄 알고 일어나 음악 없이 같이 몸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아이들.
그래, 팀워크가 꽤 괜찮은 우리. 내가 이러려고 너희들을 낳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