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UX writing(4): IKEA의 텍스트
한국인에게는 3번의 설날이 있다고 하죠.
1월 1일, 음력설 그리고 3월 2일 개학일
여러분의 2023년 설날은 언제였나요? 전 아직입니다(뭐?)
학사 스케줄과 거리가 먼 직장인이지만 저는 아직 23년을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우리 회사 회계연도는 4월 시작인데 사실은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이렇게까지 버텨도 되나 싶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늦었지만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년에는 매주 주말마다 다른 글을 써야 해서 브런치를 돌보지 못했는데, 올해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곳에 더 많이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UX writing의 실질적인 두 번째 파트를 좀 정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UX writing을 할 때 사용자의 경험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지난 글 내가 좋아하는 UX writing(3): 넘겨짚지 않고 공감하기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거칠게 말하면 '함부로 사용자의 감정과 경험을 다 아는 척하는 마세요.'였습니다. 섣부른 어림짐작은 건방지고 오만한 인상을 줄 뿐이고, 잘못짚은 추측은 서비스의 엉성함을 상기할 뿐입니다.
끝없는 확인 강요 질문은 사용자의 피로감만 불러오고요.
요컨대, 사용자에게 텍스트로 감정적인 압박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게 지난 글의 요지입니다.
그럼 뭘 어떻게 쓰라는 말이냐?라고 물으실 것 같아서 이번 글에서는 지난 글 마지막에 덧붙인 IKEA 매장 텍스트 사진 몇 장을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 사진 속에 담긴 텍스트를 읽으며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물론 보는 분마다 다른 생각을 하셨을 수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IKEA 고유의 브랜드 이미지를 어렴풋이라도 느끼셨을 겁니다.
IKEA는 그들의 Tone of voice를 다음 아홉 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Be different
Be playful
Be clear
Be visual
Be truthful
Be curious
Be humble
Be proud
Be optimistic
어떤가요? 위 9개의 Tone of voice가 여러분이 평소 생각했던 IKEA 스러움을 잘 표현하고 있나요?
IKEA는 이 Tone of voice가 사람들이 IKEA라는 브랜드를 생각하는 방식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광고, 홍보, 기업 커뮤니케이션, 전시, 제품군, 학습 매뉴얼, 심지어 간단한 이메일이나 매장에서의 인사말에서도 그들 스스로가 정의한 목소리를 또렷이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말하죠.
저 역시도 그에 동의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Tone of voice가 현지화 과정에서도 꽤나 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에요. IKEA 텍스트의 Source(출발어)는 보통 영어 또는 스웨덴어일 텐데, 번역된 Target(도착어)인 한국어에서도 꽤 훌륭하게 IKEA의 Tone of voice가 구현되었습니다. 물론 매장에서 봤을 때 군데군데 문형이나, 문체 등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꽤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one of voice 자체만 두고 보면 굉장히 일관되게 적용된 느낌이었어요. 현지화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렇게 잘하기가 정말 쉽지 않거든요. IKEA 현지화팀 대단해요... 정말.
자, 그럼 구체적으로 텍스트를 좀 들여다봅시다.
IKEA는 직접 운반, 배송을 고집하는 브랜드입니다. DIY는 거의 IKEA 브랜드의 신념이라 할만하죠.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주방 실측이나 플래닝, 배송, 조립 등의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니까 어쩔 수 없어요.
자, 그럼 브랜드의 유구한 전통에 배치되는 부가 서비스를 홍보하려고 할 때, 어떻게 우아함과 긍정적인 인상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비스를 소개할 수 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좋지 않은 예문도 만들어 봤습니다. 같이 비교해 볼까요.
Good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직접 할 필요는 없어요.
고객의 능력에 대한 신뢰(You can do it yourself)가 우선하고, 그 이후에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안, 즉 브랜드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가 옵션 중 하나로 제안되었습니다. 이런 구조의 문장은 사용자의 상황과 능력을 신뢰하면서 그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인상을 줍니다. 서비스의 겸손한(humble) 태도를 느낄 수 있죠. 사용자의 선택을 종용하거나 압박하지 않고 그저 가볍고 날렵한 제안을 던졌습니다. 아주 IKEA 스럽게.
So So: 무거운 가구를 직접 가져가 조립하기 어렵다면 IKEA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요.
브랜드의 직접 조립 원칙을 돌려 까기하고 있습니다. 고객의 Pain point를 잘 알고 있는 척을 하려다가 세련됨을 잃고 다소 부정적인 여운을 남겼습니다. 흔히들 쓰는 가정형 패턴이라서 평소에는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운반과 조립의 DIY를 원칙으로 삼아온 IKEA라는 브랜드에는 다소 맞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Worst: 지금까지 스스로 조립하기 많이 불편하셨죠? 저희가 그 어려움을 해결했어요.
IKEA의 직접 조립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상황을 상기하여 브랜드에 내부 총질하고 있습니다. 고객의 능력 부족을 강조하면서 불확실한 고객의 감정을 어림짐작해서 아는 척하고, 자신들의 명민함을 뽐내며 홍보 목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지난 글에서 설명한 '~불편하셨죠? ~하느라 고생하셨어요' 알림류 st. 들도 이 계열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가장 촌스러운 스타일이라고 생각합니다.
IKEA 상품이 고객의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인 상황이나 난관을 아예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제품 구매가 참 많으니까요.
이때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부정적인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불편함을 담백하게 상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너무 과한 가중치를 주지 않는 것이죠.
저는 이 문장에서 아래 두 가지 문장 요소가 특히 마음에 듭니다.
'손이 닿지 않아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죠'
'약간의'는 불편함의 강도나, 그로 인해 사용자가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 어마무시한 것은 아니라는 걸 드러냅니다. 그 때문에 사용자가 뭔가 대단한 도움이나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서비스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도요. 불편한 순간을 굳이 강조하지 않고, 그냥 그런 상황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optimistic 한 톤을 유지합니다. 높은 곳에 물건을 보관하는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면(깔끔하긴 하지), 부정적인 면(꺼낼 때 힘들긴 해)을 모두 말해서 전체적으로 너무 어두운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했고요.
'있죠'도 긍정적인 상황 인식과 멋진 상품 소개에 꽤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죠'라는 어미를 통해 그런 상황이 사용자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그걸 IKEA가 이미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하게 뽐낼 수 있었거든요.
'-죠'는 종결 어미 ‘-지’에 보조사 ‘요’가 결합한 말 '-지요'의 줄임말입니다. '-죠'를 맥락에 따라 잘 사용하면 꽤 멋진 뉘앙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답니다. 보통 대화체, 구어체 평서문에서 '-죠'는 듣는 사람이 알고 있을 법한 내용에 대해 말하면서도, 동시에 상대에게 수긍이나 동의 리액션을 구하고 싶을 때 자주 쓰입니다. 위의 텍스트처럼 세련되게 공감과 친근함을 드러내고 싶을 때 말이죠.
또 발화자만 알고 있는 사실을 청자에게 너무 으스대지 않는 느낌을 주면서도, 은근 스마트한 간지(?)를 풍기며 알려주고 싶을 때에도 양념처럼 '-죠'를 쓸 수 있습니다. Apple도 홈페이지 상품 소개에서 '-죠'를 잘 활용하곤 합니다. 또 외화나 다큐멘터리 더빙에서도 '-죠'가 많이 쓰이는데, 이들 프로그램 대부분이 해설자, 진행자가 시청자에게 정보를 설명을 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죠'를 쓰며 정보를 풀어내는 해설자에게선 이지적인 쿨 내가 은근히 풍겨 나옵니다.
+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할 일이 있습니다. 성장과 발달이죠.
세상 나이스하고 험블해 보이는 IKEA의 글쓰기에서도 단호하고 단정적인 서술이 발견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중요한 명제, 예를 들어 어린이, 공정 무역, 환경 보호, 지속 가능한 생산과 관련된 이슈를 다루는 문장에서죠. 이런 명제들은 IKEA 브랜드 이미지와 아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는 신뢰감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truthful, proud) 톤으로 서술됩니다.
주로 '하십시오체'를 쓰는데 그 이유는 전에도 설명했듯이 '하십시오'체가 발화자를 보다 전문적,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문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어린이의 성장과 발달을 천명하고, 그를 돕기 위한 IKEA의 준비(제품)가 어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상품 설명의 시작은 이렇게 단호한 문체로 작성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뉘앙스가 중요하니까요.
이런 내용을 신뢰감을 주는 말투로 서술하면 어린이 가구/용품의 핵심 구매자인 부모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브랜드는 어린이에 대한 좋은 철학이 있구나, 이 제품이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대해 고민하고 있구나'와 같은 느낌을 은근하게 받게 되는 거죠.
실제로 IKEA가 그런지 아닌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소비자의 입장에선 실제로 그랬으면 좋겠지만...
뭐 암튼 UX 라이터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그래 보이도록 쓰는 겁니다.
요컨대, 사용자의 경험을 말해야 할 때 서비스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1. 사용자의 경험, 능력, 가능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라
설득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대화 상대로 바라본다
2. 부정적 상황 묘사에 천착하지 말고 문제를 넘어설 가치에 집중하라
부정적 감정 표현에 집중하지 않는다
3. 사용자의 경험을 잘 들여다 보고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표현하라
피상적인 공감이 아닌 깊이 있는 이해를 나타내라
사실 1번은 UX writing을 할 때의 태도이기 때문에 잊지 않고 있으면 됩니다. 이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면 내가 쓰는 텍스트에 자연스럽게 사용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배어 나오게 됩니다. 내 안에 사용자의 상(像)이 구체적으로 형성이 되기 때문에, 1번이 잘 잡혀있으면 사용자를 함부로 막 대하는 글을 쓸 수 없어요.
2번은 글쓰기 스킬이라서 훈련이 좀 필요합니다. 하지만 결코 어렵지 않아요. 의식적으로 사용자의 감정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하고, 긍정적인 톤을 유지하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화면의 Mood를 글로 조정하는 것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3번인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어렵다고 생각해요. writing 결과물에 대해 보는 사람마다 다른 평가를 내릴 확률도 크고요. 근데 UX writing의 진미는 역시 3번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문장력과 UX 역량 다 있어야 하니까 좋은 건을 만나기가 무척 어렵지만, 또 가끔 군침이 싹 도는 재미있는 레이블을 보게 되면 정말 '기분이가 좋크든요.'
3번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어지는 글에서 쿠팡의 알림 센터 버튼 레이블 하나를 사례로 들어, 사용자의 경험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제 생각을 풀어보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금방 또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