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작은 해시태그(#)에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사실 '빅스비(Bixby)의 섹슈얼리티(1)'을 써버려서 어떻게든 '빅스비(Bixby)의 섹슈얼리티(2)'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렸어요.
동네에 작은 슈퍼 하나 열면서 '본점'이라고 뙇! 간판에 써놓은 느낌이랄까.
자기 무덤을 알아서 잘 파놓고 잠깐 쉬면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그런 느낌. 아무튼 일단 파놓은 거니까 어떻게든 무덤으로 들어가 봅...아... 아닙니다.
그저 오늘은 어떻게든 아퀴를 지어보렵니다.
빅스비의 초기 콘셉트는 중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론칭 초기 인터뷰에서 '빅스비는 일단 남성과 여성을 모두 커버하는 중성적 이름이다. 성차별이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고요.
지난 글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중성적인 AI 캐릭터를 설정한 것은 상당히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물의 이름(샌프란시스코의 다리 이름)에서 따왔다고 말하면서까지 자사의 야심작인 AI를 인간계의 영역에 포함시키지 않은 전략은 안전하고 똑똑한 결정이었죠.
좀 더 나이브하게 말하자면, 반여성주의적, 여성 혐오적 콘셉트나 레이블, 설계를 은연중에 할 위험을 원천 차단하고자 중성을 고집하는 것은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안전하다 그뤠잇! 입니다.
그동안 '나, 여성주의적이고 싶다, 여성 우호적이고 싶다. 여성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하는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여성주의적인 것'을 만들어낸 여러 분들이 계셨죠.
제 기억에 그 결과물의 상당수가 '겁내 반 여성적'이었던 것 같아요. 좀 슬프지만 그랬어요.
열심히 해보려는 마음은 좋습니다만, 깊게 고민하지 않을 거면 (이브 엔슬러를 불러올 정성을 원한 건 아니었습니다.) 넣어둬, 넣어둬요.
성차별 비판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빅스비.
그런데 문제는 뜬금없이 설정 화면의 해시태그(#)에서 불거졌습니다.
#chipper #cheerful #confident #assertive
(#clear는 왜 중복이지...)
사실 이 해시태그는 태생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해시태그는 분류와 검색을 용이하도록 만든 일종의 메타데이터입니다. 태그를 터치하면 그에 대한 검색 결과가 나오는 게 자연스럽죠.
이쯤 되면... 이 메뉴 화면에서 '이 해시태그를 눌렀을 때 뭐가 검색되어서 나오는 거지...'를 먼저 상상해 보게 됩니다.
검색 결과로 뭐가 나올 것 같으세요?
전 #chipper를 터치하면 시리 여성 버전, 알렉사, Google home의 구글, 코타나가 검색될 것 같고, #confident를 터치하면 남성 캐릭터의 금융 챗봇이랑 시리 남성 버전이 검색 결과로 나올 것 같아요.
이 해시태그를 만들어낸 사람의 논리에 의하면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chipper로 Google 이미지 검색하면 나무 절단기 사진이 나오고 인스타에서 #chipper로 검색하면 운동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나오네요. #chipper의 개념이 뭔지 더더욱 모르겠는 영어 못하는 1인...)
설정 화면의 입장에서 본다면 低맥락도 아니고 無맥락인 이 해시태그를 왜, 뭣땜시, 저 좁은 공간에, 한사코, 낑겨서, 넣어가지고, 사서, 문제를, 만들었는지... 저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해시태그를 터치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메타데이터인 걸 포기한 건가...)
몇 번이고 해시태그를 눌러보며 '이게 인터넷이 연결이 안 되어서 이런 건가... 와이파이 잡히면 S8 기기 내에 #chipper한 기능들이 막 통합 검색되어서 보이나...' 한때는 그런 생각까지도 했었습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사용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레이블 선택(잘못 결합되면 성차별적인 맥락을 생산할 수 있는 형용사) +바람직하지 못한 형식 (메타데이터 표기 형식인 해시태그)+ 잘못된 위치(여성/남성 메뉴)가 3단 콤보로 결합되면서 안타깝게도 성차별적인 UX라는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레이블은 웬만하여서는 사용자 코멘트가 잘 안 나오는 UI 요소인데(... 말해 놓고 자신의 존재감 없음을 시인한 것 같아서 슬프다...) 이런 걸로 지적을 받다니 진심으로 안타까워요.
말 나온 김에 마저 레이블 측면에서 작은 거 하나 더 이야기해 봅시다.
Hi, my name is Bixby
이 디스크립션이 여기에 꼭 있어야 할까요?
UX Writing 측면에서 디스크립션은 타이틀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에만 필요합니다. 다른 메뉴와의 변별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사실 없는 게 제일 좋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저를 소개할 때 'Joo Jun'라고만 말해도 다 이해하는 게 좋죠. 제 이름 밑에 '이거 인간입니다.'라고 밑에다가 쓰면 뭐랄까... 제가 좀... 비루해지지 않겠습니까? 상황과 맥락 속에서 인간임이 인지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름만으로 제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인간이라고 이름 아래에 덧붙여 다른 사람에게 설명한 것이니까요.
레이아웃, 플로우, 선행하는 화면, 다른 메뉴와의 병렬적 또는 계층적 관계 안에서 fuction과 feature가 잘 드러난다면 디스크립션은 필요 없습니다. 레이블 하나가 UI 컴포넌트랑 어울려서 역할을 잘 수행하면 그게 정말 슈퍼 울트라 그뤠잇 인거죠.
디스크립션을 쓸 때에는 '아이고, 내가 말로 때우려고 하는 거구나, 여기서 내가 자신이 없구나, 이 부분이 UI가 좀 약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통탄해 하면서 텍스트를 넣어야, 또는 레이블로 커버 치는 대신 UI를 고쳐 보려고 노력해야 불필요한 텍스트를 줄일 수 있고 더 나은 디자인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Writer로서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Hi, my name is Bixby라는 디스크립션은 없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1) Female, Male이라는 메뉴 타이틀과도 아무 연관성이 없고 2) 상하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어 변별성을 갖지 못하며 3) 우측 아이콘을 터치하여 나오는 음성의 스크립트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적 중복까지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귀한 화면에 무례하게 빨간펜을 그었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일단 없애고 한 번 보시라고 올려보았습니다.
허전하다고 느끼실 수 있겠습니다만, 허전한 게 나아요. 잘못된 것보단.
아이콘과 텍스트를 정렬하면 더 깔끔하고 단정한 메뉴가 되겠죠.
무엇보다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고 훌륭한 기능 자체를 사람들에게 맘편히 자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부럽고 좋은 기능이에요. 빅스비는.
엄청 잘하고 있는 회사의 엄청 대단한 기능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내심 굉장한 부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볼만한 거리들이 있어서 하나의 사례로 다루는 것이니 혹시 관계자 분이 보고 계시다면 노여워 마시고 저를 살려주시옵... (상당히 소심하다.)
오늘 포스팅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도 잘 만든 성평등 UX를 보고 싶습니다만, 아직 본 적은 없어요. 잘못 시도하였다가 자칫 큰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중성 또는 섹슈얼리티를 강조하지 않는 전략을 쓰는 게 안전하겠습니다.
레이블로써 해시태그는 맥락에 맞게 씁시다. 안 눌러지면 화납니다.
디스크립션 없이 타이틀만으로 잘 이해되면 레이블을 정말 잘 쓴 겁니다.
빈 공간은 아름답습니다. 뭔가 글자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은 자 이제 그만.
빅스비(Bixby)의 섹슈얼리티 시리즈는 (3)이 마지막입니다.
위 문제점에 대해 삼성이 고객 피드백을 받아들여(그뤠잇!) 설정 화면이 변경되었는데, 변경된 화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오늘도 아퀴를 짓지 못하였네요.
그럼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