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게 빅스비 종족이 되어버렸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입니다. 아이고 길다.
아닙니다. 그냥 제가 게을러서 그래요.
생각지도 못한 비판에 삼성은 Label을 변경합니다. 사용자 반응에 귀 기울이고 빠르게 반응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업데이트된 화면을 보고 나서는 좀 놀랐습니다.
이분들의 문제 해결 방식이 좀... 의외였거든요.
먼저 개선된 화면을 한 번 볼까요.
2017년 9월에 캡처를 뜬 빅스비 '설정> 언어 및 음성 스타일' 화면입니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캐릭터가 생겼어요. 사람이 생긴 거죠.
기존 여성/남성 음성 스타일이 기능적으로는 변경된 것 같진 않습니다. 다만 거기에 내수향은 윤정, 우호라는 캐릭터만 부여한 것 같아요. 성우 서유리 씨의 음성을 추가하여서 유리라는 캐릭터를 하나 더 추가한 점도 눈에 띕니다.
영문 버전(아마 글로벌 향도 그럴 것 같습니다만) Stephanie, John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역시 음성의 톤이나 성능에서의 디테일한 수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업데이트를 보고 좀 많이 당황했습니다.
성차별적인 해시태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캐릭터를 만드는 것으로 대응하다니. 이건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재건축'같은 느낌이거든요. (재건축이 무조건 좋다는 생각을 버려...)
원래는 서비스로써의 빅스비와 AI 어시스턴트인 빅스비만 존재했는데 갑자기... AI 빅스비 종족이 생긴 느낌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죠.
이전, 이후 화면을 나란히 봐주세요.
1. 성차별적인 해시태그(#)를 수정할 생각 말고 해시태그를 버릴 생각은 안 들었나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해시태그(#)의 핵심은 용이한 검색을 위한 메타데이터로써의 성격입니다. 성차별적이라고 지적하니까 바꾸긴 바꿨는데, '빅스비 여자', '빅스비 남자'로 바꿨습니다.
이건 마치 참가자 명단 비고란에' 섹시한 언니' ' 순종적인 엄마 '라고 적었다가 욕먹으니까 ' 인간 여자' '인간 남자'라고 적는 거나 다름없어요.
... 비고란에 그런 거 적지 말라고!
검색 결과로 잡히게 할거 아니면 터치도 안 되는 해시태그 쓰지 말라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느낌표 남발 중)
우리 서유리 님에게 '빅스비 여자'라는 해시태그를 붙이다니... ㅠ.ㅠ
2. 인간을 만들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나
이전에 여성/남성으로 레이블링 했을 때에는 빅스비라는 서비스 네임과 동일한 AI 네임만 신경 쓰면 되었습니다. Google Home이 오직 이름으로써 'Google' 만 책임지면 되듯이, Siri가 오직 Siri만 책임지면 되듯이. 별도의 캐릭터와 호칭이 없었기 때문에 서비스 자체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졌고 최신 기술로써의 AI가 부각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정과 우호를 캐릭터로 세움으로써 책임져야 하는 문제들이 많아졌습니다.
일단 이름이 주는 고정관념에 대응해야 합니다.
사용자 주변에는 분명 윤정 씨가 있겠지요. 윤정 씨와 사용자 관계가 밀접할수록 (엄마거나, 절친이거나, 원수거나 뭐든 간에) 서비스의 자연스러운 접근과 실행은 방해받게 됩니다.
캐릭터에 대한 불필요한 기대가 발생한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현실적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의 캐릭터를 서비스 전면에 세우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디자이너는 캐릭터에 대한 사용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합니다. 사용자는 이름을 보며 그녀/그의 성격, 톤, 언어 습관, 일상생활 등 이름이 환기하는 모든 것을에 대해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전면으로 드러나든 아니든 우리는 잠깐이나마 떠올릴 수밖에 없어요.
이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고. 그냥 사용자가 친근하게 느끼도록 한국적인 이름을 붙인 건데요?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아무도 이거에 대해 상상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말아요.'라고 대답한다면
전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아... 그건 정말 좋지 못한 전략인 것 같습니다. 윤정이라는 텅 빈 캐릭터에 실망하고 왜 이런 이름을 내세웠는지 궁금해하게 될 거예요. 굳이 왜 이런 일을 사서 만든 거죠?'라고요.
책임지지 못할 인간은 (낳으면) 만들면 안 돼요.
뭔가를 만들고 싶었다면 Character가 아니라 잘 디자인된 Personality를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3. 서유리로 인해 현실이 환기되어도 괜찮겠나
빅스비 성우로 호란을 섭외했다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님아 술 좀...) 성우 서유리 씨로 교체된 사실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 꽤 되실 것 같습니다. 이번 업데이트에서는 서유리 씨 목소리를 신규 음성 스타일로 추가하면서 이름과 사진 썸네일도 메뉴에 추가했는데요. 음성 기반의 AI 어시스턴트 서비스에 전문 성우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이름과 얼굴을 전면에 내세워 스타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말 필요했을까요.
저는 빅스비에서 서유리 씨라는 유명인이 환기되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관심을 끌 순 있겠지만 현실 인물과 서비스의 연계는 득 보다 실이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성우는 전문가 자원으로서만 역할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실 속의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리스크를 서비스나 상품이 안고 가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만약 호란씨가 녹음을 다 마치고 서유리 씨 대신 빅스비 캐릭터로서 전면에 등장했을 때, 바로 그때 음주 운전 이슈를 얻어맞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바로 업데이트로 호란씨 목소리를 뺐겠죠. 그 와중에 비용 손해와 이미지 손실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명인 음성 마케팅은 위험합니다. 큰 프로젝트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이건 그저 그런 내비게이션에 아이돌 목소리를 추가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당장 '서유리 목소리와 비슷하네 안 하네.. ' 자꾸 사용자들이 빅스비라는 서비스를 서유리라는 개인과 연계하여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좋지 않습니다.
Label은 기획, 리서치, UI 디자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까기만 실컷 까놓고 뒷일에 대해 아무 말 없는 사람을 꽤나 싫어하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대안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1차 분류 기준으로 관형어를 사용하고 그에 대한 여성/남성 음성 페어를 준비한다.
문제는 여성과 남성을 먼저 나눠 놓고 거기에 관형어를 성차별적인 시각으로 매칭하여 해시태그로 붙였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형어를 먼저 배열하고 거기에 각각 여성, 남성 음성 페어를 모두 제공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활기찬 음성
-여성
-남성
차분한 음성
-여성
-남성
이를 위해서는 사운드 디자인 초기 음성 콘셉트에 대해 고민할 때 여성/ 남성 페어를 모두 준비해야 합니다. 남녀 성우 녹음 시 활기차게, 차분하게라는 콘셉에 맞게 가이드되어야 하고, 사용자가 명확하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도록 음성 페어가 제공되어야 하겠습니다.
UI도 함께 변경되어야 합니다. 관형어로 구성된 메뉴를 터치하면 여성과 남성 음성 중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 팝업을 올리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이런 대안을 적다 보니 기획, 리서치, UI 디자인, Writing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해보게 되네요. 실제로 잘못된 상품 기획이 만들어낸 괴작이 리서치에서 UI 디자인까지 무비판적으로 통과되어서는 프로세스 거의 끝단에 있는 Writer에게 까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Writer는 울면서 Label로 커버를 쳐줍니다. (그럴 때마다 전 직업윤리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요...)
만약 제가 저 상황에서 라이팅을 해야 했다면 괴랄한 관형어 해시태그를 제거하고 중립적인 표현으로 대체해 주었겠지요. 그러면서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아니 이런 구조와 이런 기획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거죠? 제발 Label로 이런 걸 커버 쳐달라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머리를 좀 뜯고 괴성을 질렀을 거예요.
보통 그럴 때 UI 디자이너는 슬픈 얼굴로 '미안해요, 근데 나도 개발이(상품기획이 또는 품질 부서가) 던지고 밀어붙인 거라서 어쩔 수 없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만.
아우 나 눈물 나려고 해...
2. 넘버링과 중립적인 관형어를 사용한다.
숫자나 기호로 넘버링을 하거나 (사실 저는 세일러문 친구들처럼 우라노스, 주피터를 붙이는 것을 좋아합...아.. 아닙니다...) 기업 특성을 반영한 네이밍을 넣어서 음성 스타일을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은 콘셉트 추가 시 관리가 용이하고 여성/남성 페어를 모두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성 A/ 남성 B/ 여성 α/ 남성 β / 여성 1/ 남성 2...
물론 이렇게 넘버링할 경우에는 디스크립션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기호 자체가 주는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이때 잘못 생각하면 '친절한 여성', '차분한 남성'이 나오게 됩니다. (아.. 아 안돼... 돌아가지 마요...) 디스크립션을 쓸 때에는 중립적인 관형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성 A
높은 톤으로 빠르게 발화합니다.
남성 A
낮은 톤으로 느리게 말합니다.
여성 B
#높은 톤 # 빠른 속도
관형어의 대상이 성이 아니라 음성이나 톤에 맞춰져 있어서 성차별적이라는 지적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사용한 관형어 역시 톤과 발화 속도에 관련된 것입니다. 세 번째 예시는 죽어도 해시태그를 유지해야겠다고 할 경우 써보시라고... 적어봤습니다. (못 버리는 사정이 있겠죠...)
어째 오늘은 의식의 흐름으로 글을 쓴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정리만 잘해봅시다.
AI 어시스턴트 구성 시 Character와 Personality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퍼스널리티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캐릭터는 엄청 잘 준비한 게 아니라면 안 만드는 게 낫습니다. 캐릭터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승전 이름을 잘 지읍시다.
UX Writing과 Label은 UX 프로세스와 UI 디자인 전반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Writer를 참여시켜주세요. 잘못된 콘셉트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Writer는 문제가 되는 지점을 빠르게 파악하여 관련자들에게 문제 발생의 가능성을 경고해 줄 수 있습니다. '이거 말로 표현할 수 있어요?' '이거 레이블로 쓰면 크게 문제될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라는 간단한 질문만 던져봐도 나와서는 안 되는 콘셉트는 걸러지게 되어있습니다.
Label로 이슈를 커버 쳐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그야말로 대증적인 처치일 뿐입니다. 댐이 무너지기 전에 근본적인 원인을 수정해야 합니다.
Label로 커버 쳐야 할 때 Writer는 직업윤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살려주세요.
두서없이 마무리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렇게 아퀴를 짓습니다.
그럼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