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달을 살아야 끝나는 일 년이다. 아직 12일 밖에 살지 않은 한 해의 시작에 살고 있다. 예배를 드리다 문득 ‘끝’이 떠올랐다.
어떤 도전에 우린 시작을 두려워할까 아니면 끝을 두려워할까.
나는 시작이 두려워 출발하지 못한다. 생각이 많아서 실행하는데 쓸 힘을 골몰하는데 쓴다. 야망도 없고, 성과주의자도 아니어서 결론이 어떻게 나든 중요하지 않다. 많은 생각의 가지를 다 걷어내고 출발해서 걸어가는 과정이 내게 중요하다. 생각의 가지를 걷어낸다 말했지만 거의 나무뿌리를 뽑아내는 정도의 강단이 있어야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끝이든 무언가 시작했으니까 이뤄진 결과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바라던 결과면 흥분되고 신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며칠 힘들고 낙심하다 살아가던 삶을 다시 살아간다.
예배를 드리다 ‘끝’이 생각난 이유는, 세상의 한 사람으로 보면 나는 그럭저럭한 존재다. 밍숭맹숭하게 목표에는 관심 없는 사람. 그러나 그분의 주관하심 속에서의 나를 바라보면 내겐 정확하게 결정되는 ‘끝’이 있다.
영원을 사는 삶.
진짜로 내가 그 삶을 누려도 되는 합당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전, 동생이 백 년도 안 되는 인생으로 영원과 영겁의 삶이 결정되는 건 억울한 일이라고 했다. 주어진 기회가 너무 적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그럼 다행인 거 아니야? 고작 백 년으로 천국과 지옥이 나뉜다면 짧은 시간 동안만 노력하면 되잖아?” 동생은 자신과 반대되는 나의 의견에 벙찐 얼굴을 했다. 자신의 말도 맞고, 자신은 생각 못 했던 내 말도 맞으니까.
끝이 정해져 있으니 끝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거사를 치르진 못해도 주어진 내 삶에서 주신 시간을 기쁨으로 누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내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니, 여러 학문과 미신과 무속신앙에 기대어 끝을 점친다. 오늘을 모르고, 내일은 더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인생.
나의 하루가, 내 일 년이, 나의 평생이 어떻든지
영원에 도착하는 끝이 내게 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도, 초조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자.
그렇다 해서 거만하지도, 가볍지도, 앞서가지도 말자.
매일 주어지는 이 하루를 잘 살아내 보자.
딱 하루만큼의 힘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내자.
그게 내게 하루를 허락하신 이유다.
쓰다 보니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분과 함께하는 인생은 시작도, 과정도, 끝도
빛나는 영원으로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