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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적어둔다

by 주명


마구 읽어버리고 싶은데

아껴 읽고 싶은 책이 가끔 있다.


너무 좋아서 다음 장을 넘기다

줄어드는 두께에 이내 멈추고 덮는다.

내일 다시 읽을 수 있는 분량이 남아 있어서 좋다.

좋은데 다 알고 싶지 않다.

지금 다 알아버리면, 쉽게 끝나니까.

무언가를 아낀다는 건 좋아한다는 거다.

알고 싶지 않아서 덮는 게 아니라

기대하고 싶어서, 미지를 기다리고 싶어서.

또 어떤 말들로 나를 띄우게 만들까 궁금하다.


지금 읽는 책이 좋은 이유는

자꾸 피식하게 만든다. 감탄하게 만든다.

나 같아서, 되고 싶은 말로 거기에 있어서.


책은 이미 지나간 시간의 형체.

그 과거에 내가 있다.

나 아닌 모습으로.

오늘의 나도 과거의 나로 있겠지.

너 아닌 모습으로.


책을 읽는다면서 나를 읽고 있다.

글이 궁금하다는 핑계로

아직도 모든 나를 발견하지 못한

나를 궁금해하고 있다.


나중의 나에게 나를 보이려

오늘의 나만이 진짜라고 우기면서

나를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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