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나는 차분해졌다. 연일 고온이니 나까지 열과 성을 다할 필요는 없으니까. 봄에서 초여름까지 나는 발랄하고 싶었다. 그래서 발랄했다. 나는 되고 싶은 상태의 사람이 되는 게 자유자재인 존재인 걸까. 자문을 왜 하니. 그런 인간인 걸 알면서. 난 노래 한 곡에도 마음과 표정을 바꾸길 좋아하는 사람이잖니.
아무도 안 물을 걸 아니까 그냥 내게 물어봤어.
더위를 먹은 건지, 나이를 먹은 건지 한여름이 되면서 나는 저속 비행 중이다. 식습관을 보니 저속 노화는 못할 운명이라 감정의 속도는 좀 더디 하자 싶었나 보다.
뽀글 머리를 하고 걸을 때마다 방방이는 머리카락처럼 통통 튀고 싶었는데 어째서인지 머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구미가 배우 려원과 이청아가 되어 버렸다. 언제나 마음 한 켠엔 그들처럼 무드 있는 여성이 존재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대기할 뿐,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되고 싶은 여성의 표본일 뿐, 내가 아니니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한 소리.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니. 정말 더위를 먹은 거니.
당분간은 그냥 차분히 지내련다. 온 힘을 다해 한 해를 다 살아내는 건 나에게 맞지 않는 일. 감정의 굴곡을 따라, 되고 싶은 내가 있으면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게 언제나 나의 계획이었다. 물론 내가 만든 계획은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열 손가락에 찰싹 들러붙어 있어서 뗄 수 없는 손톱 같은 특성이겠지. 태생이야. 원래 그래.
참 희한한 현상은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고 차분히 하루를 지내다가도 집에만 오면 동생에겐 까불고 싶다는 것. 이상한 말투를 쓰고 싶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 별 희한한 행동과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도 그냥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는 건 나를 낙심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무자극의 여름도 내겐 또 다른 희망이다.
바람과 가능성이 꼭 번쩍일 필요는 없다. 은은하게 빛나는 것만으로도 삶이란 항로를 비추기에 충분한 밝기다. 킵고잉 저속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