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변 따라 달리기, 발렌시아

by 주명


무언가 쓰고 싶지만 딱히 쓸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 빈도보다 얼마나 꾸준히 ‘지속’하는가가 습관을 판가름 내는 거 아닐까. 그래. 글 쓰는 습관, 나쁠 거 없지.


습관처럼 살아낸 일상을 다 산 것 같다. 즐거웠고 감사한 하루가 이제 조금 지루하다. 하루하루를 특별한 일 없이도 신나게 지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즐거움도 유효기간이 다 됐는지 차분한 일상을 보낸다. 아니 어쩌면 이젠 조금 버티기에 돌입한 거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 어째 너무 오랫동안 즐거웠다 싶다. 결국 나는 또 다른 내 모습을 맞이한 거지. 이게 본모습일지도 모르지. 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나는 자주 쓴다. 나는 나를 정말 모르거든. 이렇게 나를 두둔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장마라며 기온이 묘하게 낮아지니 혼자 벌써 ‘어 이건 가을 느낌인데’ 하며 지난 일요일 아침에 누구보다 먼저 가을을 느꼈다. 코트 자락을 스쳐야 할 것 같은 바람을 먼저 맞아 그런가 차분해져 버렸다. 바람으로 계절을 구분하는 건 숨 쉬는 자가 가진 특기겠지.


특별한 생활계획표를 만들 때가 왔다. 여행을 가고 싶다. 결국 이 평화가 지겨워 또 다른 자극을 찾고 있는 비평화주의자. 우연히 그림책 하나를 봤다. 호아킨 소로야의 그림이 겉표지였는데 단숨에 바다가 그리워졌다.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의 웃음이 들리는 듯했다. 웃음소리가 햇빛에 부딪혀 잔잔히 부서질 때의 찬란한 순간을 혹시 당신은 아시는지. 그런 순간을 우리 모두 살았다. 잊었을 뿐.


넋을 놓은 채, 그러나 분명 무언가를 떠올리며, 그러나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상한 모드로 바다를 보는 걸 좋아한다. 바다를 본다는 핑계로 내 마음을 보고 있는 거겠지. 거대하지만 고요한 파도는 언제나 마음속에서 포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얼마나 다양한 감정의 거품을 내고 있는 건지. 건드리면 사라질. 그 사라질 물거품을 왜 품고 사는 건지.


수많은 의문, 그러나 해결할 수 없을, 해결하지 않을 물음표를 가지고 어쨌거나 떠나자. 떠나야 해.


떠나서 그림처럼 해변을 달리는 소녀 말고,

바다가 되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싶어.


맞다. 호아킨 소로야 그림의 제목은

<해변 따라 달리기, 발렌시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음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