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2시 1분에 적는 글.
잠에 들다가 깨버렸다. 이 신경통은 정말 몇 년째니. 말썽이야. 따가워! 아무도 모르는 고통이야.
뭘 했지? 뭘 했니? 한 해 뭘 했어? 뭘 한 건지 찾아보고 싶어서 사진첩을 열었다. 뭘 한 게 없구나. 아니 뭘 했지. 뭘 하긴 했지. 다만 기억에 남는 정말 행복한 순간이 있는지 찾아봤더니, 없더라.
나는 목표하는 꿈을 이루면 마냥 즐겁고 들뜰 줄 알았는데 아니네. 아님 내가 너무 차분한 사람인건가? 적당한 스트레스가 오히려 날 살게 했나 봐. 꿈을 이루고 나니 다음 스텝은? 다음은 뭘 해야 해?
그렇다고 허무한 감정만 있는 건 아니야. 나는 늘 게으르고 시도도 잘 안 해. 그런 내가 뭘 해낸 건 정말 하고픈 일이었으니까 그랬겠지. 뿌듯해. 난 그분이 하시는 일에는 막힘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살아왔어. 그래, 내가 한 게 아니야.
몇 달을 원고만 수정했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양으로 작업한 것도 아니고 어떤 하루는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하고픈 날에는 종일 하기도 했지. 인쇄물을 마주하며 앉아있는 시간은 벅찼다. 행복했어. 왜 작업을 시작했냐면 뭔가 화나는 일이 있었거든. 그 분노가 나를 움직이게 하더라고. 선한 마음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 하지만 난 알아. 그 정도 화는 화가 아니란걸. 나는 생각보다 바르거든.
작업을 하다 가장 막혀버린 순간은 표지 작업을 할 때였어. 난 디자인에 정말 문외한이니까. 그래도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어. 나름 괜찮은 표지를 만들었는데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에 부딪힌 거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어느 월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생각난 사람이 있었어. 오래 알았지만 대화는 잘 나눠보지 않았다가 올해 급속하게 대화를 꽤나 주고받은 언니가 생각나더라. 디자인 영역의 전문가. 아침부터 연락을 했어. 몇 가지 사항을 요청했는데 한 시간도 안 돼서 끝났어. 아니 한 시간도 안 됐을 것 같아. 그때 또 생각했어. 이 일은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구나. 나를 하게 만드는 그분이 계시구나를 믿었지. 언니와 연이 다시 닿게 된 건 다 이유가 있는 계획하심이라 믿어.
더 이상 꼼꼼히 하다가는 영원히 책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열 번의 퇴고 끝에 탈고를 하고 그냥 출판사에 보내버렸어. 규칙과 규격은 지켰지만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싶기도 해서, 차라리 반려를 받을 생각으로 투고했어. 피드백을 빨리 받으려고. 이틀 뒤에 메일이 왔더라. ‘승인’됐다고. 기본적으로 한두 번 반려 받을 생각으로 진행하라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아, 나도 그렇겠지’하며 나를 안 믿었어. 나를 잘 믿지 않는 건 내 오래된 습관이야. 나는 항상 나를 잘 못 믿겠더라고.
승인 메일을 받은 날은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날이었어. 원장님이 언제 책이 나오냐고 해서 아직 심사 승인 중이라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시간은 이미 메일이 온 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 난 통과했던 거야. 그래서 다음 날 최종 검토를 마치고, 출간했지. 그리고 내 첫 책을 세 권 샀어.
내 글이 세상이 가장 처음 나왔던 날은 8년 전 여름, 이십 대만이 참여할 수 있던 에세이 공모전이었지. 두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글이었지만, 그 책을 서점에서도 찾을 수 있었어. 그리고 6년 전, 작은 독립서점에서 진행하던 문예지에 내 글을 실었어. 텀블벅 후원을 받아서 세상에 나왔지. <가을에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여섯 페이지 짜리 글을 썼어. 그 글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어봤어. 그때도 지금과 같이 계절 타령을 하더라고. 제목부타. 지금과 다른 건 감정선. 어두운 불만이 가득해. 그때 나 정말 힘들어서 살기 싫었거든. 내 이십 대는 정말 즐겁지 않았어. 우울했어. 그런데 웃긴 건 그때 다니던 회사를 지금까지 잘 다닌다. 물론 업무가 과다하지 않은 자리에 있어서 일지도 몰라. 이전부서에서 허리가 망가져가며 일했으니 보상받아도 되지.
난 이제 곧 다른 자리에 가. 거기도 내 적성엔 안 맞을 것 같은데 나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 하기 싫어도 의연한 척하며 일하겠지. 그래도 이젠 마음 맞는 동료들도 많아졌으니 다행이야. 마음을 풀어낼 사람들이 있다는 건 슬픔 속에서도 내일을 희망하게 하잖아.
출간 후 감정을 기록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쓰고 있네. 지금은 2시 35분. 읽을 땐 짧은 시간이 들겠지만 이 짧은 글도 꽤 시간이 걸려. 내 첫 에세이집을 나도 다 정리하고 나선 전부를 순식간에 읽었어. 물론 열 번이나 읽었으니 빨리 읽을 만도 하지. 감흥이 사그라들어서 더 빨리 읽어 내려가기도 했고.
그래도 내 첫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남는 문장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 웃음이 됐으면 좋겠어. 휴식이 됐으면 좋겠어. 사랑이 됐으면 좋겠어. 책을 덮고 나면 그들이 알던 내가 조금 다르게 보이겠지? 단 한 번도 진짜 나를 보인 적이 없으니까. 그들도 진짜 나를 보이고 산 적이 없는 것처럼. 진짜 나는 언제나 나랑만 만나더라고.
한 달이 남았어. 내년까지.
즐거웠던 일이 있었니?
행복했어?
슬펐어?
아님 너무 힘들었어?
진짜 나를 보여주지 않았듯 진짜 너를 내게 말해주지 않겠지.
되게 뻔한 말인데,
또 내일이 온다. 내일이 와. 내일이 오니까, 한 번 다시 시작해 보자. 포기하지만 않으면, 내일은 언제나 너를 찾아와.
나도 책을 준비할 땐 피곤해서 아침마다 새로운 마음 가짐을 하려고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옷들을 골라 입는 재미로 마음을 다잡았어.
새벽을 깨우는 해가, 너를 두드릴 거야.
새벽을 깨우려 해가 뜨는 게 아니라,
너를 찾아오기 위해 해가 뜨는 거야.
계속 가보자. 2페이지만 세상에 보였던 내가 215페이지를 쓰는 사람이 될 거라 예상 못했어. 예상치 못했던 너를 만나기 위해 계속 가보자.
지금 시각, 2시 45분.
신경통에도 결국 다 이유가 있구나.
이 글을 쓰라고 날 깨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