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뽀 후 일 년, 드디어 되돌아보는 지난 날들 - 2. 계약직 이야기
"결점 없는 피부를 선사합니다. 그럼 지금 내 피부가 결점 투성이라는 건가?!"
보이지 않는 선 밖에 놓였다고 느꼈던 인턴 생활이지만, 내게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준 이가 있었다. 뛰어난 능력으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부장이라는 직함을 단, 멋진 학교 선배. 그는 내게 그가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회사를 소개시켜 주었다. 있는 경험 없는 경험 긁어내 꼬깃꼬깃 적어낸 내 레쥬메를 단숨에 그 회사로 쏴주었고, 그렇게 화장품 회사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을 위해 산 까만 정장을 입고, 처음으로 산 백화점 브랜드 핸드백을 메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당장 일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핸드백은 빵빵했다. 면접장에 들어서기 직전 갈아신을 검은 하이힐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남역의 좀비같은 인파를 뚫고 선 그 높은 빌딩 앞에서, 황급히 불편한 그 면접 구두를 신었다. 면접은 순탄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몇 명 보지 못했던 당당한 여성 임원, 그 앞에서 나도 덩달아 당당한 척 웃으며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결과 통보를 듣고 나도 드디어 정규직이 될 차례인가 기대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회사는 모두들 계약직에서 시작한다고, 신입이 정규직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간 '파견 계약직'(근무하는 회사에 소속된 게 아니라, 제3의 HR 에이전시에 속해 근무하는 곳으로 '파견'나오는 계약직을 일컫는다.)으로 일하는 계약서에 싸인했다.
들어간 팀은 화장품 브랜드의 PR팀. 협찬이 일상인 하루를 보냈다. 하루 종일 코스모폴리탄, 엘르, 보그 같은 잡지사 에디터들의 어시스턴트들에게 화장품 제품을 퀵으로 전해준다. 몇십 권이 되는 잡지를 뒤적이며 제품이 언급된 칼럼이나 이미지가 있는지 살펴보고 스캔을 뜬다. 또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에게 "제품 시딩"을 준비하고 배송하는 일을 했는데. 다른 말로는 무료 협찬이다. 광고 콘텐츠와는 다르게 인플루언서들에게 제품을 쥐어주면, 이들이 컨텐츠로 제품을 노출해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대다수 다음번에도 시딩 리스트에 오르고 싶어서 노출해주는 편이다.) 이런 인플루언서들에게 한 병에 20만원을 호가하는 화장품 제품을 주려고, 백화점 판매원처럼 화장품을 패키징하는 방법을 읽혔다. 내 생애 그렇게 많은 리본을 묶어본 건 처음이었다지.
하루는 파운데이션 제품 관련 자료를 번역하고 있을 때였다. "For your flawless skin 당신의 결점 없는 피부를 위해"라는 제품의 해시태그 라인이 그렇게 눈에 밟혔다. 학부시절 배웠던 어줍잖은 인문학을 들먹여보면, 우리의 언어는 구조적으로 두 가지 카테고리로 인식하게 되어있다. 백과 흑, 긍정과 부정. 광고는 가장 쉬운 언어를 지향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진영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포맷을 가지기 쉽다. 내가 번역하던 파운데이션 자료에서는 제품을 사용했을 때 가질 수 있는 피부를 "결점 없는 피부"라 말했다. 그 순간 제품을 사용하지 않은 내 자연적인 피부는 "결점 있는 피부"라는 맥락이 만들어진다. Flaw, 결점과 오류. 이를 정의하는 권위가 어떻게 화장품에 있을 수 있는가.
어차피 먹고 사는 일이라, 그렇게 진지하게 따지고 들면 너만 힘들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입으로 내 생각과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기는 싫었다. 애초에 화장 잘하는 사람도 아닌 걸. 일을 시작한지 보름 차에 더이상 계약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전했다. 후임자를 찾아야할테니 최초에 계약한 한 달만 하고 나오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먹고 사는 일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걸 좋다고 떠드는 일이 하고 싶었다. 화장품은 단지 내가 좋아하는 리스트에 있던 게 아니었을 뿐. 그렇게 내 인생 두 번째 회사를 한 달만에 그만두었다. 내게 그 곳은 아직도 면접 때 신었던 그 까만 구두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