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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봉 Jul 31. 2021

논문 주제는 잘게, 더 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책으로 써라

     본 조언은 내가 이 책(?)을 기획한 결정적인 동기가 되기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어느 단체에 보낼 연구계획서를 쓰는 중이었다. 계획서를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연구 주제에 대해 골몰해보았다. 일단 주제를 설정해야 그에 알맞은 계획서의 단계들을 하나씩 채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구계획서는 총 10페이지를 작성해야 했다. 자신이 어떠한 연구를 수행할 것인지 한눈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에, 계획서를 꼼꼼하게 작성한다면 논문의 약 2~30%는 완성한 것과 다름없다.


     좋은 논문은 훌륭한 연구 주제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주제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성급하게 주제를 결정하였나보다. 내 딴에는 창의적으로 주제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제에야 깨달았다.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을 말이다. 학제 간 연구가 중요하다는 말이 누누이 들려서, 학문 분야도 세 영역에 걸쳐서 주제를 잡아버렸다. 그랬더니 나름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상당히 모호한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이 주제가 학계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전달하려는 내용이 불분명한 것 같은데…’와 같은 상념이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며칠에 걸쳐 고민하고 조사하며 글을   필요 없어져 버린 순간이었다. 이왕  건데 지원이라도 해보는  낫지 않을까? 라는 마음도 들었다. 근데 이건 내가 보기에도 너무 주제가 불분명했다. 학부생인 내가 심사위원이라고 해도  계획서를 채택할  같진 않았다.  시간을 끌기에는 낭비인 듯싶어 연구계획서 작업을 종료했다. 전편에서 말했듯이, 이렇게 끝내고 마는  아쉬워서  시리즈를 기획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연구 주제를 너무 광범위하게 잡아서 곤욕을 치른 적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지난 학기에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했다. 학기 말 과제가 기말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기말고사 대체 과제였기에 조금 더 신경 써서 준비했다. 그때도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주제를 잡았기에, 연구가 잘 진척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주제에 관한 선행 연구들을 조사하는데, 웬걸 너무 방대한 게 아닌가? 국내 연구뿐만 아니라, 국외 연구들도 참고하려니까 제출 기한이 어느새 코앞에 와 있었다.


     꾸역꾸역 자료들을 참고해서 써나가고 있는데, 결국 제출 마감 시간이 도래했다. 늦게 내는 것보다 덜 쓴 채로 내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쓰던 미완성 원고를 교수님께 보내드렸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자신이 서술한 보고서를 중심으로 ‘발표회 시간’을 가졌다. 비록 보고서를 다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PPT를 만들어서 전개하고자 했던 논지를 설명했다. 학생들의 발표가 끝나면 교수님께서는 논문과 발표에 대한 평가를 해주셨다. 그때 내가 들은 코멘트는 이렇다.


      “주제가 너무 광범위합니다. 이건 기말 제출용 소논문이나 일반적인 학술 논문의 주제와는 맞지 않아요. 아마도 석사 논문 주제로 잡아도 다 쓰지 못할 겁니다. 박사 학위 논문에나 등장할 법한 주제라고 보아야 해요. 그래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주제 잡는 법을 연습해나가시면 됩니다. 다음엔 더욱 구체적으로 써보세요.”



     라고 말이다. 정확히 내가 겪은 고초를 꿰뚫어 보고 건네신 말씀이었다. 주제가 광범위하고 모호했기에, 나는 그것과 관련한 상당한 양의 연구를 참고해야 했다. 또한, 연구를 수행하더라도 한정된 지면으로 인하여, 타 연구들과 차별화된 특별한 내용을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선행 연구를 분석하고, 개념 설명이나 전제해야 할 내용 자체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두 번의 미완성 사례를 통해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논문을 쓸 때는 최대한 구체적이고 잘게 나누어 주제를 잡아야 한다는 점을.


     연구 주제를 구체적으로 잡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무엇보다도, 주제에 관해 충분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너무 성급하게 주제를 잡아버리면, 그만큼 모호해지고 넓어질 확률이 커진다. 가령, ‘김치의 세계화’와 같은 소재로 보고서나 논문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그냥 이렇게만 주제를 잡아버리면, 김치가 만들어진 처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모든 역사와 전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김치가 어떻게 유통되고 소개되는지 다 써야 한다. 너무 방대한 작업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연구 주제를 조금씩 좁혀가야 한다. 기한을 설정해서 ‘2010년부터 2020년까지’를 붙인다든지, 지역을 구체적으로 정해서 ‘일본의 도쿄시에서’와 같이 잡음으로써 말이다. 세계화라는 말도 꽤 모호한 용어다. 이것을 보다 명확하게 측정·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는 게 낫다. 예를 들어, 일본 도쿄시에서 판매되는 김치 매출량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10년 전과 비교하여 김치가 어떻게 상품화되고 있는지 등을 설정할 수 있겠다. 아무튼, 요점은 연구하고픈 주제의 범위를 계속해서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초반에 이 작업을 확실히 해야지, 중간에 주제를 바꾸거나 불필요한 일이 발생하는 걸 막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제를 잘게, 구체적으로 정하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연구자 자신’이다. 그만큼 선행 연구를 모두 조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공부를 덜 하려고 주제를 축소하라는 게 아니라,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함이다. 주제를 축소할수록 글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게 된다. 이는 달리 말해서, 그 좁은 연구 분야에서만큼은 가장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얼마나 큰 메리트인가?


     그러나 이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도 또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어쩌겠는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계속 찾아보고. 아마 이 공리는 신참 대학원생인 나부터 연로하고 저명한 노학자(老學者)에게까지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게 너무 많다고? 괜찮다. 그건 나중에 책으로 쓰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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