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출연의 세계
인간으로서가 아닌 도구로서의 삶
걸어가는 행인, 카페에 앉아 있는 손님, 피칠갑을 한 채 누워있는 시체역등 영화나 드라마 광고에는 적게는 10명 미만에서 많게는 수 백명의 보조출연이 필요하다. 내가 보조출연을 하게 된 계기는 투잡을 뛰고 있을 때 쉬는 날 유동적으로 일용직 알바를 할 수 있는 게 뭔가 검색하다 보니 우연히 드라마 보조출연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연예인도 볼 수 있고, 아무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호기심에 시작했던 보조출연이 내 30대를 새롭게 수놓은 시작이 될지 그때는 몰랐다.
-당신은 인간이 아닌 도구입니다-
일단 나는 보조출연 경험이 많지는 않다. 특히 드라마 보조출연은 더더욱 그렇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보조출연 세계는 같잖은 갑질이 만연했고, 내 성격상 그런 걸 그냥 보고 넘기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보조출연은 현장 분위기와 어떤 촬영이냐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다. 가령 신과함께 촬영장은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고, 그런 곳은 그냥 깔끔하게 내 일만 하고 나오면 되니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근데 야외촬영이라던가 옷을 갈아입는다던가 밥을 먹는다던가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배려를 해주고 안내를 해주는 곳이 있는 반면에 땡볕 아래에서 대기 공간도 없이 마냥 몇 시간씩 대기해야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배려도 해주지 않는 곳도 있다. 그저 장기판에 올려진 장기짝처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도구로 여겨지곤 한다. 사실 저 정도만 해도 그렇게 화가 나진 않을 것이다.
모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아침 6시에 모여서 다음날 새벽 2시에 끝났던 촬영 현장이 아직도 생생하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대기 공간도 없이 밖에서 떨다가 회사 건물 내부 촬영을 할 때 비로소 바람을 피할 수 있었으나 난방이 되지 않아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몸을 싸매며 온기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에 마냥 대기하면서 추위와 지루함과 싸워가면서 그래도 9시간을 훌쩍 넘겼기에 오늘 일당은 좀 괜찮겠네라고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리고 각자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다시 촬영을 하며 이맘때쯤 끝날 때가 됐는데 왜 안 끝나지를 생각하다 어느덧 새벽 2시쯤이 되어서 끝이 났다. 대기할 땐 그나마 패딩을 입고 있지만 슛이 들어가면 외투를 벗고 얇은 봄 옷을 입고 가야 하기 때문에 20시간을 그렇게 일을 하면 감기는 확정이다. 그래도 오늘 일당은 얼마가 되려나 떠올리며 계산기를 두드리며 위안을 삼고 있을 그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일지를 끊어서 간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지란 내 인적사항과 더불어 시작시간과 끝나는 시간이 기록되는 종이를 말하는데 그걸 끊어서 간다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웅성이고 있는 무리 중 한 명에게 물어보았다. 9시간을 초과하면 1.5배 수당을 줘야 하니 9시간으로 하나를 끊고, 다시 하나를 더 끊어서 18시간을 기본급으로 지급하고 추가된 2시간만 1.5배 수당을 챙겨주겠다고 하는 꼼수였다. 그 말을 현장 반장에게 전해 듣고 아무도 따지지 않고 웅성대고 있는 걸 보니 좀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다 들으라는 소리로 말을 했다.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럴 거면 9시간 마치고 새로운 보조출연자들을 부르던가 아니면 우리에게 그렇게 할 거라고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 말을 들은 반장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제작비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회당 수천만 원씩 받는 배우들 돈은 손도 못 대면서 코 묻은 돈 수준밖에 되지 않는 보조출연자들 돈을 손대서 제작비를 아끼겠다고 하니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보조출연 돈 떼가면서 제작비 아껴야 될 상황이면 제작을 안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는 돈 들어오는 거 보고 만약 제대로 입금 안되면 임금미지급으로 제작사 고소할게요."
이렇게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떴다. 순간 제작팀 쪽 분위기는 싸해지고 보조출연자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웅성이며 무리 중 일부는 내 뒤를 조용히 따라 나왔다. 20시간 동안 한 마디도 나와 말을 섞지 않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내 연락처를 물어본다. 혹 자기들은 일지를 끊어서 적용된 돈이 들어오고 나만 초과 수당이 적용된 일당이 들어올까 걱정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나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청하고자 함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말할 때 한 마디라도 거들어줬다면 모를까 가만히 뒤에 서서 구경만 하다가 손해는 보기 싫어서 나한테 의지하는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저만 그렇게 주겠어요?"
이렇게 말을 하고 연락처는 알려주지 않았다. 역시나 다음날 감기 기운은 찾아왔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하루종일 땀을 내며 누워있었다. 그래, 이게 비정규직의 맛이지.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바라는 건 사치고, 내 권리를 찾기 위해 굳이 목소리를 내야 하고, 그 목소리를 내는 순간 다음에 나를 불러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현실이니까. 두 달 후 다행히 돈은 제대로 입금이 되었다.
-보조출연 길들이기-
보조출연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드라마 촬영장은 절대 가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 특히나 공중파 드라마는 최악 중의 최악이라고 보면 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드라마 촬영 현장에 있는 반장들은 보조출연자들을 노예로 취급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말은 기본이고, 얼토당토않은 걸로 군기를 잡는 일들이 보여서 코웃음을 치게 했다. 예전에 보조출연 업체에서 시간과 장소를 안내받고 시간에 맞춰 갔는데 현장에 있는 반장이 일지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 당시엔 일지가 뭔지도 몰랐고, 뭘 준비해서 가란 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가서 그런 걸 안내받지 못해서 준비를 못했다고 말했다. 반장은 어이없다는 듯 그딴 정신상태면 그냥 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니 안내받은 것도 없고, 그냥 가라고 해서 간 건데 뭐가 문젠데요? 그리고 정신상태요? 나 알아요?"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반장을 보며 "그럼 갈게요" 하고 뒤돌아서 가면서 해당 업체에 전화를 해서 도대체 이게 뭐냐고 화를 냈다. 업체에선 제발 가지 말라고 잡으며 자기가 전화해 보겠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반장은 다시 나를 불렀다. "다음부터는 잘 챙겨 와요 알았어요?"라고 하길래 "말을 해주면 챙겨 오겠죠?"라고 응수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가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현장에 왔고, 그냥 가면 오늘 하루 일당은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면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 처참한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일지를 작성하라며 반장이 건네준 종이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A4용지를 그냥 대충 손으로 찢은 종이쪼가리. 거기에 내 이름과 연락처 주소 계좌번호를 적는 것이었다. 일지란 게 이런 거였구나. 이딴 걸로 저렇게 유세를 떤 건가 싶었다. 얼마나 사람을 하찮게 보면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배우지 못한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를 절실히 느꼈다. 회사에서 선배랍시고 갑질을 하던 사람들은 신사였다.
-무너지는 생태계-
이 마이너 세계에는 등급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 기준으로 보면 보조출연 윗 등급이 이미지 단역, 그리고 단역이 있다. 그 위의 조단역이나 조연, 주연은 다 알다시피 소속사 출신의 연예인들이 한다고 보면 된다. 보조출연은 최저임금을 받지만 이미지 단역은 통상 15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의 페이를 받는다. 그리고 단역은 등급에 따라서 비용이 나눠지게 되는데 최소 30만 원에서 시작하게 되고 내가 가장 많이 받은 단역 페이는 60만 원이었다. 단역을 따내는 것도 엄청난 경쟁이기에 사실상 쉽지 않고 일만 잘 풀린다면 단역만 해도 먹고살 수 있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게 쉽지 않을 뿐. 어느 생태계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합쳐지면 기존의 룰을 무너트리는 상황이 발생이 되는데 이곳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역과 이미지 단역을 구분 짓는 것은 "대사" 유무이다. 말 그대로 보조출연이나 이미지 단역은 대사가 없다. 즉 카메라 앵글에 얼굴이 나오지 않는 게 보조출연이고 이미지 단역은 살짝 비칠 수 있는 정도이고 단역은 자기 얼굴이 앵글에 잡히고 대사까지 하게 된다. 그 대사 하나로 페이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단역으로 간 현장에서 갑자기 반장이 보조출연자한테 대사를 시키는 것이었다. 아마 현장에서 추가로 대사를 할 사람이 필요했던 듯해서 짧은 대사이기에 그냥 보조출연자에게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 대사 유무로 페이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게 되는데 최저임금을 주는 보조출연자에게 대사를 시키고 앵글에 담으면 당연히 단역 페이를 줘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외로 보조출연자들은 그 대사를 자기가 하기를 원한다. 화면에 조금이라도 얼굴이 나올 수 있다면 그게 하나의 자랑거리가 되서인가.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싶다. 30만 원은 줘야 될 일을 만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퉁쳤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 점점 생겨나면서 보조출연임에도 이미지 단역 같은 역할을 맡게 되고, 이미지 단역이면서 단역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들 스스로 그들의 노동 현장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깎아먹으며, 생태계를 무너트린다.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해서도 안되고, 받아들여서도 안되지만 이기심과 욕망의 두 집단이 마주하면 의외로 윈윈 하는 합의점에 도달한다. 피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소위말하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돌아오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보조출연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S기업 광고를 찍을 때 보조출연으로 가서 현장에서 단역 역할로 바뀌자 당연히 페이 문제를 거론했고, 담당 반장은 감독 눈치를 보며, 촬영 마치고 그 부분 협의 할 테니 일단은 찍자라고 회유했다. 그때 그 말을 들었으면 안 됐다. 촬영이 마친 후 해당 업체와 페이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그 부분 더 챙겨주겠다고 하고 마무리했는데, 내가 어리석었지. 만원이 더 들어올 거란 생각은 예상치도 못했다.
이 업계에서 보조출연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쉬운 존재인 게 맞다. 부당한 대우를 해도 할 사람은 넘쳐나고, 계속해서 일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유대관계를 쌓아간다. 꼰대 같은 아저씨들이 여성 보조출연자들한테 껄떡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은근슬쩍 그런 더러운 플러팅에 호응해 주며 하하 호호하는 모습도 나에겐 좀 역겨운 광경이었다.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이렇게나 힘든 일이다.
-내 돈도 내 돈이고 네 돈도 내 돈-
비단 보조출연뿐 아니라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발생되는 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출연료 지급 문제다. 이쪽 업계에 몸 담은 사람 중에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만약 겪어보지 않았다면 촬영을 그만큼 많이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 장담한다. 물론 난 단 한 번도 돈을 못 받은 적이 없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받아내고, 나중에 나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마인드이기 때문이었다. 돈을 주지 않아도 강하게 따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중에 다른 촬영에서 불러주지 않을 거란 두려움과 워낙 업계가 좁다 보니 소문이 나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내가 정당하게 일해서 받아야 할 돈을 못 받는데, 당당하게 달라고 하면 오히려 내가 피해를 입는 이런 뭣 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통상 촬영을 하면 입금은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후에 입금이 된다. 그래서 내가 잘 챙기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입금이 되지 않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미루는 업체들이 있는데, 일단 한 번 미루면 나에게 돈을 줄 마음이 없다고 이해하고 대응하면 된다. 나는 두 번 정도 기회를 준 후 세 번째에도 입금을 하지 않고 미루면 상냥했던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과격하게 나간다. 오히려 고자세로 왜 이렇게 닦달하느냐란 식으로 말했던 보조출연 업체 직원은 태세 전환된 내 말을 듣고 바로 꼬리를 내리며 바로 입금해 줬었다. 결국 이 놈들도 강약약강이다. 이렇게 강경하게 나가고 반 협박 태도를 취해서 받아내는 방법이 있고, 광고 촬영 같은 경우엔 광고 회사로 전화를 하면 된다.
어차피 이곳도 철저하게 먹이사슬 구조이기 때문에 광고주가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고 그 아래 대행사가 있으며 대행사는 메인 에이전시에 일을 맡긴다. 그리고 그 메인 에이전시에서 일을 받아서 하는 하청 에이전시가 있는 구조이다. 즉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회사에 전화하면 1분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온다. 어차피 내 돈은 광고주가 떼먹는 게 아니라 하청 에이전시에서 떼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무서워하는 보스에게 내용을 전달하면 깔끔하다. 어차피 돈을 준 입장에서는 그런 일로 문제가 불거져서 회사 이미지에 타격 입는 게 훨씬 클 거니까 말이다. 물론 다음에 나를 불러줄 일은 절대 없을 거란 것을 감안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의 돈은 받을 수 있지만 앞으로의 생계 활동에 타격을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억울하다고 소리쳐도 도와줄 사람은 없다. 그냥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현실은 냉혹하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왜 내가 싸워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가 살면서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가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참혹한 현실인가. '억울하면 유명해져라'라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현실적으로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그런 현실을 그냥 넘겨버리며 억울한 사람들의 문제에 귀 기울이기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그냥 받아들여라라고 하는 것 같아서이다. 유명해지지 않아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 현장에서 처절하게 발버둥 치며 미래를 향해 발돋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나를 내가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