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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형 소속사의 실태

꿈과 희망을 잡아먹는 괴물

by 준비

지금도 조금씩 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영화 단역이나 광고 모델을 겸하고 있다. 일을 시작한 지 4년 정도 지났을 때 우연히 소속사 오디션을 보게 됐다. 애초에 연예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연기 공부를 하면서 미래의 연기자를 꿈꾸며 살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소속사 오디션을 본 건 소속사에 들어가고 싶어서가 아닌 영화 단역을 뽑는데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오디션이 끝나고 오디션을 진행했던 소속사 실장이란 사람과 1대 1 상담을 하게 됐는데 어느 정도 연기 기초를 다져야 한 다부터 시작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이 일을 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속는 셈 치고 등록을 하게 됐다. 마침 소속사 대표가 직접 연기지도를 하고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책도 쓴 사람이니 사기꾼은 아니겠다 싶어서 등록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한 달간 속초에서 단기 알바를 할 예정이었어서 한 달 후부터 시작하겠다 하고 카드 결제를 마친 후 돌아갔다


한 달 후 소속사를 방문해서 연기 지도를 받는데, 최초 주 2회 수업을 하기로 했던 게 주 1회로 바뀌었다고 한다.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 일단 결제까지 했는데 받아보자 "라는 마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은 현빈이 나온 드라마 대사 중 일부였는데 나름대로 연습해서 왔지만 온갖 지적을 다 받았다. 뭐 당연한 일이었지만 첫 수업을 들으면서 이렇게 진행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대표는 감정을 더 넣어서라는 말 외엔 딱히 지도해 주는 게 없었다. 그게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감정을 넣는다는 게 추상적인 거고 어떻게 집어넣을 수 있는지를 알려줘야 하지만 캐릭터 분석을 더 하라는 둥, 주인공의 입장에서 좀 더 생각해 봐라,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 것 같냐 등의 질문뿐이었다. 연기에 대해 1도 모르는 사람도 저런 말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카데미 소속사의 실태를 알게 된 건 이후의 일이다.


난 한 달 수업을 듣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만하겠다고 했는데, 소속사 대표는 연기 수업은 받지 말고 행정 직원으로 일해 볼 생각이 없냐라고 물었다. 그래서 페이 어느 정도 선으로 생각하시냐 물었더니 최저시급에 조금 못 미치는 월급을 제시하니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대표님, 연기는 제가 초보라 부족해도 열정페이 이런 건 감안할 수 있는데, 행정업무는 제가 대기업을 다녔던 사람이고 제 몸값이라는 게 어느 정도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이 금액에는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이런 결정을 했던 이유 중 하나도 뭐냐면, 이 소속사에 있을 때 청년경찰이라는 영화 이미지 단역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경찰대 학생 역이기 때문에 헤어를 소위말하는 스포츠머리로 밀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머리를 밀어버리면 그 촬영 외 다른 광고나 일을 절대 잡을 수 없기 때문에 큰 리스크가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 경험이 없고 소속사 통해서 가는 거니 좀 나으려나 싶어서 과감하게 머리를 밀고 촬영 현장에 갔다. 그곳엔 2백 명 정도 되는 보조출연이 있었고, 내 역할은 이미지 단역도 아닌 보조출연이었다. 소속사에서 보조출연을 보낸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안 되는데 거기 온 사람 대부분은 머리를 밀지도 않았다.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찌할 수도 없고 이 소속사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을 쳤다. 그리고 나중에 보조출연비가 입금되었다. 이미지 단역이라고 하고 보냈지만 보조출연이었고, 돈이라도 이미지 단역 페이를 주나 했더니 보조출연비였던 것이다. 참고로 나는 이 소속사를 나와서 이전처럼 프리로 활동하면서 보조출연으로 나갔던 청년경찰 영화 이미지 단역으로 뽑혔다. 한 영화를 두 번 다른 역할로 간 것이다. 소속사는 보조출연, 프리로는 이미지 단역, 소속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어쨌건 소속사에서 행정업무 직원으로 근무하는 걸 거절하고 이제 굿바이를 하려고 하는데 내 오디션을 진행했던 실장이 자기들 프로필 작업을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니 단기 알바 형태로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시급은 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 당시 시급이 6천 원 정도였기 때문에 만원이면 좋은 조건이다 싶어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프로필 작업을 하면서 소속사의 실태를 알게 되었다.


우선 어떤 영화 오디션이 있다고 공고를 올린다. 진짜로 그 오디션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왜냐고? 어차피 오디션 보는 사람마다 똑같은 소릴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학원 형태로 수업 등록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상담 실장이 상담을 하는 사이 새로운 오디션 지원자가 오면 인포 업무를 보는 여직원이 들어가서 면접을 본다. 그리고 옆에 있는 댄스 강사에게 같이 들어가자고 한다. "어? 제가 들어가도 되나요?"라고 묻는 강사에게 여직원은 "아, 그냥 앉아만 계시면 돼요"라고 하고 둘이 들어간다. 어차피 멘트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돌리면서 한 명 걸리면 수강생 1명을 얻는 것이다. 그게 나였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소속사엔 중고등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다. 딱 봐도 아이돌 준비하는 것 같지 않은 학생들이 그냥 수학 학원 다니듯 다닌다는 느낌을 받아서, 요즘엔 학생들이 이런 소속사에 다닌다는 것이 하나의 자부심 같은 걸로 느끼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저녁 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이 학생들의 꿈과 희망은 소속사의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이 있다.


상담실장은 학생들에게 프로필 촬영 패키지 내용을 설명하면서 부모님과 상의해서 프로필 촬영 하고 싶은 사람들은 등록하라고 안내했다. 나는 프로필 선별 작업을 하면서도 귀를 열여 둔 채 어떤 내용은지 하나하나 들었다. 프로필 촬영을 하는데 50만 원 정도의 금액이 들고, 그 정도 금액이라고 하기에 당연히 포토그래퍼를 섭외해서 소속사 부근 스튜디오에서 프로필 촬영을 하나보다 싶었다. 그 당시 프로필 촬영 50만 원도 절대 낮은 금액이 아닌 높은 금액에 속하는 비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속사 사무실 한 곳에 롤스크린을 설치하고 상담 실장이 DSLR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테스트 촬영을 했다. 순간 "에이, 설마 프로필 촬영을 저기서 하겠어?"라는 나의 우려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 광경을 보고 "와, 얘네들 진짜 양아치구나"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나는 막대한 분량의 프로필들을 회사 양식으로 옮기는 단순 반복 작업을 쉬지도 않고 하면서 기한 내에 겨우 끝낼 수 있었다. 처음엔 같이 하는 걸로 되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만 하고 있다 보니 출근해서 퇴근까지 단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작업을 했다. 그래도 시급 만원이니까 나쁘지 않네라는 생각으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왜 자기 수정사항 반영 안 했냐는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그 부분을 물어보고 확인받고 한 건데 그 당시 본인이 대충 훑어보고 그렇게 하라고 했던걸 내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해 주니 몇 초간 말이 없다가 "알겠어요" 한 마디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페이 부분에 대한 말이 나왔다. 실장이 잘못 알아서 만원으로 안내한 것 같다고, 최저시급에 맞춰 주겠다고 했다.


그래, 이 바닥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최저시급이었으면 하지도 않았을 일이고, 시급이 만원이었기 때문에 한 것이고, 그 부분을 잘못 전달한 실장에게 차액을 채우던지 전달하시면 될 듯합니다라고 말해줬다. 이미 오만정이 떨어진 곳이라 굳이 대표라는 이유로 내가 굽히고 들어갈 일은 전혀 없었다. 내가 그 조직을 나오는 순간 서열관계는 무너지고 평등하게 사람대 사람이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듯하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니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말에 "네, 그럼 원하시는 금액 입금하세요. 그거 들어오는 거 확인되면 임금 미지급으로 신고할게요" 아무런 감정 없이 정확히 내가 할 행동을 전달했다. 대표는 어이없었는지 코웃음 치는 게 전화기를 통해 그 미세한 바람 소리가 전해졌다. 그리곤 내 계좌가 우리은행이 아니니 타행입금 수수료는 제하고 보내겠다는 유치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타행이체 수수료 700원이 빠지고 아르바이트비가 입금되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난다기보다 귀여웠다. 나이만 먹었지, 생각이나 행동하는 수준은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니 화를 내기보단 어린아이 바라보듯 귀엽게 봐주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 경험을 해서인지 몇 번 정도 그런 비슷한 루트의 오디션을 진행하는 곳은 그냥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뭐에 홀린 듯 결제를 할까 말까 하다가 쿨하게 나가버리는 나를 보고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를 말하며 뒤따라 나온다. 그리고 밖에서 이런 업체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간단히 설명해 준 후 집으로 귀가한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려서 놀랍지도 않고, 어디에나 사기 또는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비껴간 사기에 가까운 행위들을 하는 곳이 있다지만 이곳은 참 많긴 하다.


만약에 내가 연기자나 모델에 대한 꿈을 꿀 정도로 재능이 있거나, 외모가 출중했다면 나의 간절함이 눈을 가려 그런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았을까 싶다. 잘생기지 않은 나의 외모 덕에 사기를 당하지 않았으니 간만에 어머니께 감사의 전화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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