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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쁨과 어머니의 슬픔

기쁨과 슬픔의 정비례 관계

by 준비

"우리집의 장점은 화목한 가정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습되어 온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랄까? 진짜로 화목해서가 아닌, 별다른 장점이 없었서, 아니면 그런 가정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집에는 그들만 아는 아픔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집 역시 나름의 슬픈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내 인생에서 이 부분이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꽤나 많은 영향을 미쳤기에 두 편 정도에 나눠서 아버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평범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고집이 좀 세고, 자유로움을 추구하셨다. 그래서 가정을 돌보기보단 굉장히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셨는데, 뭐 외도를 했다던가 그런 문제는 아니고, 그냥 집에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셨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넉넉한 지갑 사정에 있는데, 우리 가정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아버지는 월급의 대부분을 아버지가 쓰셨고, 어머니에겐 생활비를 일부 주는 형태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엄청난 절약정신과 희생으로 집도 마련하고 유복하진 않지만 나름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공무원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니, 그걸 차곡차곡 모아서 계속 저축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집 형편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오래된 티브이, 장롱, 침대 등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지갑은 항상 만 원짜리 지폐로 가득했고 지갑이 잘 닫히지 않을 정도로 늘 현금을 갖고 다니셨다.


그렇게 아버지가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것과 반대로 어머니는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한 푼 두 푼 모아 밖에서 바라보면 중산층의 가정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하셨다. 그래서일까?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이라고 생각, 아니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같은 집안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나뉘는 광경이랄까. 그런 환경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며 나를 키워온지 잘 알기 때문에 과외나 브랜드 의류, 신발 등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내가 사춘기가 없었던 이유도 어찌 보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걸 갖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혹 아침에 어머니가 늦게 깨워서 지각을 하게 되는 날에도 괜찮다며 해맑게 웃고 나갔던 나였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형은 스쿨버스를 탔지만 시내버스를 타는 게 좀 더 쌌기에 나는 그냥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그땐 승차권이라고 하는 작은 종이를 묶음 단위로 판매하고 그걸 하나씩 버스에 넣고 탔는데, 한 묶음에 10개의 승차권이 호치캐스로 찝혀져 있었다. 등하교 각 1장씩 5일이면 10장을 다 쓰는데 나는 10일씩 썼다. 무임승차를 한 건 아니고 하굣길에는 학교 뒷산을 타고 집까지 걸어갔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면 50분 정도가 걸리는데 뒷 산을 타고 내리막에서 빠르게 달리면 15-2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고3이 되어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면서는 밤 12시에 끝났기 때문에 산을 타지는 못하고 버스도 끊겨서 집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집에 가면 거의 한 시가 되었고 다시 6시가 되면 일어나는 지옥의 수험생활을 보냈다. 택시라도 타고 오라고 돈을 쥐어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알기에 오히려 걸어오면 운동도 되고 좋다고 했던 나였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보다 괜찮다는 말을 하는 성격이 된 것이 말이다.


아마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더 커졌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택시를 타고 다니시고, 만 원권 지폐로 가득 차 다 닫히지도 않는 지갑이 바지 뒷 주머니에서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으니, 아버지를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의 잔소리는 사실 절규에 가깝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밖에서 어디에 돈을 쓰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여유 있는 일상을 보내는 기쁨을 느끼는 사이 어머니의 슬픔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칫 무너져갈 수 있는 가정을 이끌어 온 어머니의 희생은 내가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인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번 돈으로 우리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만 할 수는 없다. 다만, 가정에 대한 책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어머니의 삶이, 나의 삶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랄까. 그래서인지 내가 결혼에 대해 좀 두려움을 갖고 있는 부분도 생기지 않았나 싶다. 가정을 온전히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알게 모르게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왔던 것 같다.


사람은 결국 태어나서 죽는다는 불변의 진리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가족에 대한 희생으로 맞바꿔버린 어머니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면, 가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곤 한다. 어머니가 좀 더 이기적이었다면 어머니 인생이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의 삶이 더 힘들어졌겠지만 말이다. 결국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숭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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