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투병 생활
어느 날 아버지가 감기 기운이 좀 심해서 병원을 다녀오셨는데,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머리에 돌이 떨어진 느낌이란 게 어떤 건지를 실감할 수 있던 날이었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서울에 있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예약을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가서 정밀 검진을 시작했다. 생존 확률은 거의 희박하고 희박한 확률이나마 치료를 위해 항암 치료를 할 것인지, 아니면 남은 시간이라도 아버지 맘 편하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덤덤한 표정으로 항암치료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광주로 내려와 집 근처에 있는 병원에 입원 수속을 밟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투병 생활은 시작되었다. 형은 소방 공무원 시험 준비 때문에 아버지 병간호를 하기 힘든 상황이라 어머니가 거의 병원에 상주해 있다시피 하고, 나는 회사가 끝나면 병원으로 가 어머니와 교대를 해드렸다. 병원에 머물면서 느꼈던 점은, 병원에 있다 보면 건강한 사람도 점점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워낙에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병원 생활이 갑갑하고 누워있기만 하기 힘들다 보니 계속해서 베드를 올려달라고 했다가 다시 내려달라고를 10분에 한 번씩 요구하셨다. 침대 옆 조그맣고 낮은 침대에 앉아 있다가 나는 10분에 한 번씩 계속 베드 높낮이를 조절하다 보니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참지 못하고 "아빠, 제발요.."라고 내뱉은 그 말을 평생 후회하며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말, 그리고 힘든 순간에도 절대 내뱉지 말고 더 참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면서 아버지가 드실 수 있는 음식이 제한되었다. 항암치료를 포기했기에 그전에는 드시고 싶은걸 열심히 사다가 먹여드렸는데, 어느 순간 속에서 음식이 잘 받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평소에 망고주스를 드시지 않던 아버지가 이상하게 망고주스만은 속에서 잘 받는지 계속 드셨다. 그때 당시 이효리가 TV 광고 속에서 망고를 외치던 그 망고주스가 아버지가 가장 찾는 음료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거라도 맛있게 드실 수 있어서 망고주스는 나에게 있어 굉장히 고마운 음료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단 한 번도 나는 입에 대질 않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과 내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너무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기 전, 우리 집에는 거대한 폭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갔다. 아마 아버지가 도박에 손을 대신게 아닌가 싶었던 게, 아버지가 대출을 받은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만기일이 도래하자 아버지가 그 사실을 어머니께 말씀드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오열을 하시며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혹 그 일 때문에 직장에서 아버지 입장이 곤란해질까 결국엔 그 돈을 해결해 주셨다. 오랫동안 천 원, 이천 원 모아 온 돈이 5천만 원이 되었고, 그 돈으로 오래된 집수리를 할 마음에 내심 들떠 있던 어머니의 희망은 금융사 계좌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5년 전이니까 나름 큰돈인데 우리 가족은 그 돈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보냈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최대치에 이르던 시기였는데 아버지의 암 말기 판정으로 그 증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몇 개월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결국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제 갓 환갑을 넘긴 젊은 나이...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내어 나에게 "융통성 있게 살아라"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부당한 걸 참지 못하고 따지는 내 성격을 알기에, 좀 더 참고 그냥 물 흐르듯 살길 바라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우리는 허탈하고 침울해 있을 시간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때 말했던 그 사고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빌릴 수 있는 대로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리셨고 그 금액만 일억 원이 넘었다. 정말 다행인 건, 처음 사고가 터졌을 때 어머니한테 아파트 명의를 어머니로 바꾸라고 제안드린 것이다.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돈이 좀 들더라도 명의를 바꾸시라 말씀드렸고, 결국 그때의 선택 덕분에 우리 가족은 집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소송준비를 해야 했다. 이미 재산의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였기에 변호사를 선임할 돈조차도 선뜻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변호사 친구에게 자문을 구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소송 준비 과정에 대해 알아본 후 법원에 갔다.
아버지는 보험이 딱 한 개 있었는데, 유가족에게 1000만 원가량 상속되는 소액 보험이었다. 어머니께서 여러 번 아버지 이름으로 보험을 여러 개 들어보려 했으나, 보험사에서 연락 오면 아버지는 그런 거 안 한다며 끊어버리시는 바람에 보험이라고는 1,000만 원짜리 하나였다. 아버지는 자신 앞으로 보험이 들어진 것 자체가 찝찝다고 하셨다. 참 속이 터질 일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상속포기를 하면서 아버지가 진 채무에 대해 벗어날 수 있는 희망과, 천만 원이라도 수중에 쥐는 것이었다. 워낙 오래된 보험이라 약관이 자세히 적혀있지 않아 판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속 포기를 했음에도 상속이 되느냐, 아니면 불가능하냐였는데 다행히 승소하여 천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그렇게 사람을 피 말리게 해 놓고 가는 그 순간까지 사람을 미치게 한다며 한탄하셨다. 원 없이 돈은 쓰고 갔으니 아쉬울 것은 없겠다고 하셨던 어머니지만 매년 우리를 데리고 아버지를 보러 가는 어머니를 볼 때면 부부의 정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싶다. 그래도 아버지가 공무원이셨던 터라 연금의 70%가 어머니에게 나오기에 어머니는 최소한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 나름대로도 외로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자꾸 밖에서 그렇게 철없이 행동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이해를 해보려고 한다. 아버지 덕에 내가 존재하고 아버지 덕에 우리 식구가 먹고, 자고, 배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끔 꿈에 나왔지만 그 꿈에서 아버지께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쳤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꿈에서 깨고 난 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그런 거야라며 자책하면서 혹시나 아버지가 꿈에 나오면 다정하게 말을 건네야 지란 생각을 되뇌고 되뇌었다. 하지만 꿈이라는 게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듯 쉽지가 않았고, 한 동안 아버지는 내 꿈속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리고 1년 전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다정하게 소풍을 떠나는 꿈을 꾸고 난 후 그동안 쌓인 미안한 마음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푼 것 같았다.
최근에 촬영장에서 만나게 된 배우 지망생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도 아버지가 암 투병 중이셨고, 부모님과의 갈등 문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혹 아버지가 밉더라도 살아계실 때 후회 남기지 않도록 좀 더 보듬어 드려라라고 했던 적이 있다. 시간이 좀 흘러서 다시 그 동생을 만났는데, 그때 내가 해 준 이야기 덕에 아버지랑 최대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이야기도 많이 하면서 보냈던 그 시간이 자기한테 너무 의미가 있었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의 경험이 누군가의 인생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중요한 무엇을 놓치지 않게 해 주었다는 부분이 굉장히 뿌듯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내 인생을 돌아보며 기억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나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거나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다음에 계속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