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의 전환점이 된 그 날의 기억

아버지 장례 치르며...

by 준비

아버지가 입원하시면서 어머니와 교대로 간호를 해드리다 보니 오랫동안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보지 못했고, 친구 두 명이 위로 차원에서 얼굴을 보러 광주로 내려왔다. 그래서 그날은 오후에 아버지 간병을 하고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친구들 숙소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7시경 눈을 떠보니,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 급하게 충전을 하고 폰을 켰는데 부재중 통화와 문자 한 통이 남겨져 있었다. 한 시간 전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장으로 오라는 어머니의 문자였다. 머리가 멍 해졌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자기들이 주변에 연락을 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보라고 했다. 뭔가 나 때문에 광주까지 오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했더니 "야! 너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너한테 연락 안 하면 안 서운하겠냐?! 얼른 가기나 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장례식장에서 알려주는 장례 절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장례식장에서 염치 불고한 마음으로 지난번 내 글에서 소개했던 중학교 절친과 대학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오히려 말하지 않으면 서운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보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시점이기도 하다.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과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빈소를 지키며 바라보는 장례식 풍경은 다소 기이했다. 슬픈 날이지만 친척들과 조문객의 표정은 한없이 밝아보였다. 응답하라 1988에서 혜리가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드는 가족들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서운함을 느꼈던 그 감정이었달까. 물론 그게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슬프지만 그렇게 웃으면서 아버지가 맘 편히 하늘나라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까지 오기 제한될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친구들이 와주었다.


내가 이렇게 인복이 있는 사람이었나? 싶어서 사실 어안이 벙벙했었다. 심지어 사회에서 알게 된 동생과 친구들은 연차까지 써가면서 3일 내내 장례식장을 지켜주었다. 그때 한 동생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다. 이틀이나 연차를 써가면서 장례식장을 간다고 하니 자기 회사 선배가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보네. 장례식장을 이틀 연차나 쓰면서 갈 정도면..."이라고 말이다. 형이 그만큼 좋은 사람이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 거 아니겠냐며 힘내라는 말을 해주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던 시기였는데, 나는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기보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장례식장이 외롭지 않게 지켜준 지인들을 보며 나도 똑같이 고마운 마음을 갚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광주에 내려와 있던 친구 중 한 명은 백화점에 가서 정장까지 급하게 맞춰 입고 왔는데, 아무래도 장례식인데 캐주얼로 오기 민망해서 그랬다고 한다. 사실 당사자는 와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준 친구의 모습에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었다.


이튿날이 되어서 어머니와 친지분들이 모였다. 염을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는데 30년간 내가 생각해 온 인생관이 송두리째 뜯어져 나가고 새로운 인생관이 자리한 계기였다. 아버지의 시신을 보며 오열을 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나는 "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신 게 맞나?"라는 생각으로 약간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너무도 편하게 잠들어있는 느낌이었다. 아버지 어깨를 흔들면 지금에라도 깰 것 같은데 정말 이게 죽음이라는 걸까? 예전에 할아버지 장례를 치를 때엔 누가 봐도 돌아가셨다는 걸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서 이질감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그냥 관 속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가 현실적으로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날이다. "아, 나도 결국 죽는 거지.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도 아버지 나이가 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성공에 대한 욕심을 내고,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는 갖지 못한 것에 더 집착을 하며 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설계만을 하며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던 나는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30년 후에 죽게 된다면 지금 내가 대기업을 다니고 돈을 모아서 집을 사고, 더 높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그 과정을 만족하며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대답은 확실했다.


"NO"


나의 삶이 앞으로 30년이 남았다면,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모습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결국 죽는데 부귀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한 번뿐인 인생을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가 주도적으로 설계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와 준 지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갚을 수 있을 만큼 많은 돈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회사는 나가는 게 맞았다. 퇴사에 대한 고민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기도 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미래지만, 그만둬야 할 이유가 명확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퇴사 준비를 했다.


나이 서른에 내가 뭘 잘하는지, 꿈은 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 진지하게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내가 수많은 알바를 하면서 나를 하찮게 보는 시선에도 상처받지 않고, 태연하게 내가 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느낀 "결국 나는 죽는다"라는 이유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유한한 삶을 어떻게 의미 있게 살지, 허황된 목표와 꿈이 아닌 실질적으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생각했고,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몰랐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경험해 보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렇게 10년 정도가 지났을 때서야 내가 명확히 무엇을 잘하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는 여러 변수에도 흔들리기보다는 이게 인생의 묘미 지라는 생각으로 모험하듯 즐겼던 것 같다. 물론 거기서 수반되는 경제적 빈곤은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으나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가난함 조차도 변태적으로 즐겼던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뀌게 되었고, 어머니에게도 그 슬픈 현실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마음 한 켠으로 두려우면서도 살아계시는 동안 최대한 행복하게 해 드리자라는 목표가 생겼다. 퇴직금 전부와 얼마 되지 않은 통장 잔고를 털어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빚잔치로 하지 못했던 그것을 내가 해드리고, 앞으로 살아가실 어머니의 보금자리가 좀 더 쾌적하게 바뀌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 시작한 나에게 돈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어머니보다 중요할 순 없었다. 그렇게 형과 어머니가 살 공간을 재탄생시키고 나는 5백만 원 정도를 들고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나의 다소 무모한 도전은 13년째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2025년 설 연휴를 맞아 내일 본가로 갈 예정이다. 평소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고, 두 번의 명절과 아버지 기일 때만 내려가다 보니 한 번 내려갈 때 일주일 정도 머물고 오는 편이다. 그리고 집에서 하는 건 없다.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남김없이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집에 머무는 것. 어머니에게 행복은 대단한 게 아니라 오랜만에 보는 작은 아들이 계속 옆에 있으면 하는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집에만 있기 다소 갑갑한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효도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냥 함께 있어드리는 것. 이번에도 우리 세 가족은 아버지를 찾아뵈러 갈 예정이다. 아버지도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시겠지...


"성공하지도 잘나지도 않은 못난 아들이지만, 계속 꿈을 꾸고 살아갈 수 있게 세상에 존재하게 해 주신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해드리고 와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망고주스를 먹지 않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