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보다는 의지(依支)로서의 액체 종교*
어머니와 할머니를 생각하며 이런저런 가족 행사와 하셨던 말씀을 떠올려본다. 조카들의 기억에 없는 어른들의 모습과 언행을 전하는 김에 우리 가족과 일가의 대소사에 밀접하게 영향을 주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복신앙(祈福信仰)도 그대로 말해주고 싶다.
문자 그대로 복 받기를 비는 기복에 대해 요즘의 MZ세대 조카들이 어떻게 느끼든 복을 비는 것은 그 시절이나 인공지능 시대인 지금이나 변함없는 지배적 신앙행위이다. 그 시절 그리고 지금도 어머니와 할머니가 드리던, 가족 평안을 갈구하고 자식과 공동체에 액운이 없기를 바라는 기복적인 염원은 우리 집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 나라에서 주요 종교의 일반 신자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의식일 것이다. 기독교 교회 모습이든 불교 절의 형태이든 기도처에 드나드는 일반 신도들이 바라는 바는 비슷하다. 기원하는 개인이 천국에, 천당에 들고 싶은 것은 대개의 어머니들에게는 사실 자식을 위한 기복에 밀린 2차적이고 부수적인 염원이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별세, 장수체질로 믿었던 아버지의 입원과 죽음 - 언젠가는 있을 이별이지만 긴 세월 이어진 인연의 굵고 질긴 실이 갑자기 뚝 끊어진다는 것에 허망함을 느낀다. 따라서 지금 이어진 다양한 가닥의 인연의 실로 연결된 일상에 언제 무슨 변고가 있을지 문득문득 긴장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어느 누구라도 결코 피할 수 없고 어쩌면 유일하게 공평한 자연의 섭리인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와 통찰은 어떻게 체득이 될까?
어머니와 나의 할머니 그리고 백숙모님을 생각하면 개개인의 생년일시로 정해진 사주와 살아갈 인생길 사이에 어떤 관련이 과연 있을까?를 종종 의문하게 된다.
내가 자라면서 겪은, 우리 집과 일가 친척집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들은 공학도인 나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초 자연적인 무엇인가가 인간사에는 있을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했다.
어머니의 어머니인 나의 외할머니는 일곱을 낳아서 셋을 건졌다고 한다. 이 ‘건졌다’는 어머니의 표현이다. 어머니로부터 어렸을 때 ‘못 건진’ 어머니의 여동생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유독 뽀얗게 예쁜 동생을 안고 나가면 동네 어른들이 너도나도 안아보려고 했다는 아기 이모 얘기를 두고두고 하셨다. 얼마나 눈에 선하셨으면 어린 아들들보다 더 어렸던 당신의 여동생 얘기를 반복하셨을까. 친 이모가 없는 우리들은 어릴 때 가셨다는 그 이모가 더욱 아쉽기만 했다.
어머니의 살아남은 남매들은 중간중간의 형제들이 먼저 가서 나이 터울이 많게 되었고 어머니는 가까운 이의 이른 죽음에 익숙하셨다. 외가의 어른들 중에 여러분이 육십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와 두 외숙들도 너무 일찍 가셔서 외가를 많이 닮은 나도 철이 좀 든 뒤부터는 은연중에 홀연한 죽음을 의식하며 성장했다.
어머니가 가시고 언제부터인가 나도 대략 환갑이 될 정도까지 살다 갈 것 같다는 운명 설정을 하고 나니 운 좋게 그보다 더 사는 날들은 순전히 덤이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셈이다. 먼 나라의 건설공사 현장에서 환갑을 맞던 때 미련 없이 그해 말엔 퇴임하고 남은 날은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고 본사에 청원했었다. 덤으로 주어진 날들마저 시간의 감옥에서 계속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면 욕심이라 생각했다.
점과 굿. 우리 집안의 대소사는 중요한 순간마다 보살님이 결정할 때가 많았다. 어쩌면 거의 모든 일을 결정하셨을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너무 이르게 홀로 된 할머니가 정성을 쏟는 작은 절에 며느리들이 반은 의무적으로 다니셨다. 그분들이 절에 다니시는 목적이 득도와 인생 해탈 일리는 없었겠지만, 주기적으로 절에서 갖는 고부와 동서들 간의 전당대회는 우의를 돈독히 하는 순기능을 충분히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절집과 부처님 덕에 가족들이 무탈하고 하는 일이 잘되면 언제나 감사드릴 일이 아닌가.
반야심경도 다 못 외는 어머니와 백모님 모두 미신이라는 생각은 없이 신뢰하는 분의 가르침에 따르는 순응하는 어머니들이었다. 상식으론 불합리한 것도 그 절의 존경하는 어른인 보살님 지침이면 따라야 할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나의 막내 숙모님 댁 사촌 여동생 생각이 난다. (조카들에겐 당고모가 되겠다.) 어린 동생이 큰 병을 얻어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백혈병으로 양림동 언덕의 적십자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 병상에 누워 숙모님이 선물한 예쁜 공주 옷을 환자복 위에 펼쳐 덮고 좋아하던 일곱 살짜리 어린 동생의 모습이 기억 속의 마지막 모습이다.
집안의 어른들은 그 애를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셨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염원에 굿을 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던 모양이다.
나의 할머니(너희 증조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백숙모님 모두 화순 적벽의 맑은 물가에서 굿을 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셨던 작은 어머니마저 딸의 호전을 바라고 그 굿판에 참석했고 결과적으로 별 무소용이었다.
어머니는 그 어린 조카딸을 특히 이뻐하고 안타까워하셨는데, 작은 어머니를 위해 아픈 애의 오빠를 우리 집에서 데리고 봐주실 때가 많았다.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내신상에 아주 나쁜 변고가 예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살리기 위해 보살님의 처방대로 통금시간이 막 끝난 캄캄한 새벽에 광주 시내의 가장 큰길 네거리에서 굿을 했노라고 동생이 알려주었다. 병역을 마치고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난처하고 민망한 이벤트이긴 하지만 동생은
‘어쨌든 형이 무사히 제대해서 다행이쟎냐’고 하면서,
‘다 그 굿 덕이라고 믿는 것이 속 편한 일 아니겠냐’고 했다.
‘이러니 보살님의 점괘는 틀릴 일이 없겠다’고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여러 사촌들과 형제들의 혼사에도 어머니와 고모님, 백숙모님은 보살님의 영험한 예지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셨다. 혼기를 맞은 집안 남녀의 사주와 궁합의 궁극적 판단은 보살님의 당연한 책무이자 역할이었다. 보살님의 점괘가 괜찮으면 결혼이 순풍을 달고 성사되었고 보살님이 말리면 따르는 게 도리였다. 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고 거역할 용기도 없어 결국 보살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랐지만, 그래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했다. 그런데 결과론적이지만, 보살님의 직관이 대체로 맞았다고 인정한다. 그 보살님은 어머니 보다 반년정도 먼저 가셨는데, 절의 신도들 사이에선 보살님이 아끼던 어머니를 데려간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55세의 한창나이에,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에 홀연히 가셨다.
어머니 가시던 날 아침에 막내 동생에게 불교 경전의 한 페이지를 읽어 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내는 선생님 사모들 몇 분이 모여 식사를 하는 모임을 가지셨는데, 그날은 유명한 화가이기도 한 김교장 댁에서 점심을 함께 드시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 모임에 나가시기 전에 평소에 전혀 읽지 않으셨던 경전을 동생에게 왜 읽어달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동생과 형제들의 화두가 되었다. 뭔가 예감이 있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 절에 다니셨으니 어머니의 종교는 불교라고 해야 할까? 내 기준으로는 아니다. 그냥 절에 마음 편한 분들을 보러 다니신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어머니께도 내게도 너무 어렵지만 그 절의 분위기는 평안했다.
어머니는 종교에 너그러우셨고 형편에 맞게 의지하셨다. 불교도 기독교도 천주교도 다 좋다고 하셨다. 미션스쿨에 다니던 내가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것도, 어느 며느리가 교회에 나가도, 다른 며느리가 성당에 나가는 것도 다 좋게 보셨다. 그저 사이좋게 마음 편하게 의지하는 것이 좋으셨을 뿐이다. 작은 노력으로 영명한 분이 내다본 예견된 액운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무속을 보셨다.
어머니의 장례는 다니시던 절의 스님이 염불 하는 가운데 불교식과 아버지의 뜻이 반영된 유교식 반반으로 섞여 치르게 되었다. 그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신앙은 믿는 것이 아닌 의지하는 무엇이어서 정해진 틀이 없었다. 절이라는 모양에 담긴 액체였다. 자유와 유연성 측면에서 타 종교도 인정하고 포용하는 입장이니 어머니의 신앙은 ‘액체종교‘라 표현할 수 있겠다.*
어머니는 제사나 시제를 준비하실 때마다 형제들에게 유언처럼 얘기하셨다. 사과, 그중에서도 단맛과 신맛이 적절히 섞인 부사 사과를 유독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누차 ‘내 죽거든 아무것도 차리지 말고 부사 사과를 상자째로 제사상에 올렸다가 함께 나누어 먹어라’ 하셨다
형제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지만, 지킬 수는 없었다. 기일이면 모여서 어머니를 추모하며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라는 말씀으로 해석하고 지켜온다.
항상 그리운 어머니에서 이제는 가끔 그리운 어머니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지만 가신 후에도 고비마다 보이지 않게 나를 걱정하신 것을 느낀다. 지난 세기말, 해외 출장에서 귀국길에 원인 모를 급환으로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파리 외곽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에 있을 때 꿈속에서 어머니를 뵈었다. 살아 계실 적에도 한복이 어울리셨던 어머니가 멀리 언덕 위에 홀로 서서 손수건을 흔들며 나를 부르고 계셨다. 어머니께 천천히 다가가는데 다가가면서 보니 오라는 손짓이 아니고 빨리 가라는 손짓이어서 그 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한참을 서있었던 꿈인데, 참으로 선명하면서도 몽롱한 꿈이었다.
*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제시한 ‘액체근대(Liquid Modernity) 개념을 차용하여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종교적 맥락에서 ‘액체종교’로 표현했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절대적 유일신에 대한 배타적 믿음 보다 종교의 유연성과 포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날 것으로 본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태도는 ‘종교 다원주의’ 또는 ‘종교적 포용주의’로 불리며, 이는 다양한 신앙 체계가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며, 종교 간의 대화와 이해를 촉진한다.
수백 개의 분파가 이단 논쟁을 하며 공존하는 한반도 남쪽의 기독교, 절대적 유일신을 믿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바쁜 현장에서도 기도 시간은 꼬박 챙기는 현지 근로자들, 그리고 아침 출근길에 동료들이 출입구에 놓인 자신들의 신상께 합장하며 축원하고 사무실로 들어와서 매우 공학적인 업무를 하던 다신론적 인디아에서 지내면서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일까를 꽤나 생각했다. 내게 종교는 ‘큰 산이 보여 다가가니 안갯속이라 길을 잃고 끝내 다가가기 어려운 산’이다. 깨달을 능력이 없으니 그래서 가장 쉽게 믿기로 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요한복음 20장 29절)- 얼마나 심플하게 위안을 주시는 말씀인가!
‘액체종교’라는 용어는 공식적으로 학계에서 사용되는 개념은 아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유연성과 변화를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즉 종교가 고정된 교리나 전통에만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교리의 차이로 분파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의 자유와 유연성을 강조하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신앙을 ‘액체종교’로 표현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종교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비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