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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손 잇기 29화

할머니와 송동의 기억

당당하고 단단하셨던 할머니

by 시준


사십 대에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리고 환갑을 넘기고 바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 항상 아쉽다.

고향집에 사시던 나의 할머니, 그러니까 너희들의 증조할머니 이야기는 기억 속에 많이 남아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 남매들이 태어나 자랐고 나의 사촌들도 몇몇 태어난 곳인 송동의 추억이다.


어릴 적 송동 마을어귀 공터에는 커다란 고목이 울창했다. (그 고목이 느티나무였는지 팽나무였는지 아니면 다른 나무였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나무 밑동이 어른 두 명이 손을 맞잡아도 닿지 않을 만큼 우람했는데 세월 따라 밑동이 썩고 그늘이 넓어서 언젠가 베어졌다. 그 공터에는 어른들의 여름 휴식처인 우산각이 있었다.

우산각은 어른 열명은 여유 있게 누워 낮잠을 잘만한 크기의 높은 평상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수수한 정자다. 우산각 마루에 앉아 마을을 바라보면 뒷산의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어릴 때 우산각은 마을어귀의 왼편에 있었는데 나중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송동 앞으로 황룡강 지류 자연하천인 평림천이 흐른다. 유유히 구비 구비 흘러 마을 앞에 넓은 모래밭을 만들어 마을의 빨래터가 되었고 아이들이 놀기에도 좋았다. 아이들이 수심 낮은 맑은 물에서 놀다가 닭살이 돋으면 따뜻하게 데워진 금모래톱에 대자로 누워 온몸이 까맣게 타서 토인이 되던 시절이다.

굽이쳐 돌아가는 쪽 수심이 깊어 위험하니 어른들은 그곳에서 놀지 말라고 타일렀다. 큰 고모댁의 큰형, 그러니까 할머니의 첫 외손자이자 어렸을 때부터 건장하던 형이 여름방학에 외가에 왔을 때 일이다. 방학에 와있는 여러 사촌들로 할머니집은 여름이면 북적거렸다. 어릴 때부터 호기롭던 고종사촌형의 지휘하에 직경이 네 자가 넘는 두꺼운 나무판자로 만들어져 무거운 할머니집 우물덮개를 사촌들 여럿이 맞들어 들고 냇가로 갔다. 어른들이 가지 말라는 개천 깊은 곳에 가서 우물덮개를 타고 놀다가 덮개가 뒤집어져 물에 빠져서 혼난 적이 있다. 물에 빠져 물먹고 허우적거리며 너무 놀랐던 일이라 살면서 제대로 된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


여름 장마로 홍수 때면 개천 너머 넓은 들판인 망월 평야가 물에 잠겼다. 정부에서 황룡강 상류에 장성댐을 만들고 대대적인 치수 사업을 했다. 그 일환으로 마을 앞 개천도 양쪽에 높이 둑방을 쌓고 굽이치던 개천을 곧게 흘러가게 하느라 여러모로 좋았던 금모래밭이 사라졌다. 그때가 대략 내가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이 공사로 넷째 숙부께서 개천 옆에 조성했던 넓은 뽕밭도 사라졌다.

이 때문인지 송동에서 누에를 치던 일도 그만두셨고 송동 할머니댁 잠실은 창고가 됐다. 국민학교 때부터 여름 방학이면 할머니댁에서 보고 거들었던 누에 치던 때의 이야깃거리도 많은데, 채송화 씨 같은 누에알에서 부화한 누에가 손가락보다 더 크게 자라서 섶에 들어앉아 고치를 만들 때까지 눈에 선하다. 종일 따온 뽕잎을 누에가 먹어치우는 쏴~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마치 소나기 내리는 듯했다. 서울에서 취직하여 잠실(蠶室)동에 살던 도시 촌놈 입에서 누에 치던 이런저런 생소한 이야기가 나오면 여러 친구들이 놀랐다.


삼밭(대마밭)에서 베어온 내 키의 두 배는 됨직한 대마 줄기 묶음이 우산각 공터에 집채 만하게 쌓이고 이 대마 줄기를 삶아내던 여름날이 떠오른다. 삶아서 껍질을 벗겨 삼베실을 만드는데, 껍질이 벗겨진 하얀 속살의 줄기는 마을에 남겨졌다. 이 하얀 줄기를 할머니 동네에서는 ‘제룻대’라 불렀다. 나에게는 이 제룻대와 제룻대의 촉감이 아주 특별하다.

초등학교 이학년 여름방학 때 송동 할머니댁 앞의 산밭 가운데 홀로 서 있던 감나무에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졌는데 다행히 나무 아래 오이 넝쿨 위로 떨어져 왼팔이 부러지고 어깨가 탈골되었다. 할머니가 놀라서 나를 둘러업고 ‘가네초리’(지명)에 있던 접골하던 집까지 뛰어가 탈골을 바로 잡고 부러진 팔뼈를 맞췄다. 익지도 않은 땡감을 따려고 왜 나무에 올라갔는지 참 철이 없었다.

그 여름 내내 제룻대를 가지런히 잘라 노끈으로 발을 엮은 팔 고정대를 하고 시무룩하게 방학을 보내야 했다. 체구가 작았던 할머니가 다 큰 초등생 손자를 업고 뛰어가신 거리가 물경 1km였다.

제룻대는 가볍고 단단하여 엮어서 집 울타리를 치기도 하고 땔나무로도 썼다. 석고 대신 부러진 팔뼈가 아물 때까지 고정하는 부목으로 제룻대는 가볍고 바람도 잘 통해서 안성맞춤이었다. 방학 내내 팔뚝을 감아 받쳐주던 제룻대의 촉감은 은근하여 내 왼팔과 하나가 되었다.


나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너희들의 중조부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나의 막내 숙부조차 증조부의 기억은 없다고 하신다. 아무도 할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해주지도 않으니 우리 형제들과 사촌들 누구도 어릴 적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잊고 자랐다.

할머니는 일찍 홀로 되셨는데 자녀가 딸 둘에 아들 다섯, 합해서 일곱이나 되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꽤 있어서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고 들었다.

건강하셨던 할아버지가 42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데, 내가 언젠가 우연히 듣기로는 친척 상갓집 일을 거들어 주시고 오셨는데 뭘 잘못 드셨는지 삼 일간 앓다가 손쓸 새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기억하실 어른들이 없으니 사인이 된 병명을 알 수도 없다.

아무튼 일찍 홀로 아들딸 일곱 자녀를 기르고 시집 장가보내느라 할머니는 여장부가 되셨다. 아버지 형제들의 지극한 효심은 홀로 되어 자식들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일찍부터 보면서 마음에서 저절로 자라났을 것이다.


할머니의 회갑날

어디엔가 할머니의 회갑 날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나 나는 그때의 광경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지금은 60세를 사는 것이 너무나 평범한 일이라 잔치를 따로 하지도 않지만 60년대만 해도 회갑 잔치는 동네잔치였다. 잔칫날 고향 송동의 집마당에 손자 손녀들이 죽 늘어서자 마당이 좁았다. 친손주, 외손주 합해서 스무 명 가까이 늘어서서 함께 절을 올렸고, 큰아버지, 아버지, 숙부님들의 친구들까지 모두 와서 축하연이 종일 거창하였다. 일찍이 홀로 된 어머니를 위해 아들들이 더 크게 잔치를 벌였던 것 같다. 장만한 음식도 많았고, 노래하고 춤추는 무희들도 있었다.


야무진 할머니였다. 언젠가 송정리에서 영광까지 가는 버스를 할머니와 함께 탔다. 울퉁불퉁 비포장 신작로에 버스는 심하게 덜컹거리고 엔진에서 나는 휘발유 냄새도 고약해서 손님들이 차멀미로 힘들어하는 것이 흔하고 나 역시 멀미로 버스 타는 것이 고역이던 시절이었다.

무슨 일인지 엔진박스 위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께서 운전사에게 호통을 치시고 버스 안의 손님들이 송동 입구(그곳의 지명이 ‘가네초리’이다)에서 우리가 내릴 때까지 할머니를 응원하던 때가 생각난다. 아마도 운전기사가 불손하였거나 운전 태도가 불량해서 운전을 똑바로 부드럽게 하라는 야단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무섭게 생긴 운전사가 대꾸도 할 수 없게 야단치는 할머니가 대단해 보였다.


할머니 돌아가시던 날

1905년에 태어나 1978년에 돌아가셨으니 요즘 기준으로는 오래 사신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74세 면 장수하신 셈이라고들 얘기했다. 돌아가실 때 동네의 어른들이 다들 호상이라고 했다. 호상이란 말과 잔칫집 같은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생로병사의 인생사를 수없이 보아온 이제는 알 것 같다.

할머니께서 소천하실 날은 4개월 전에 정확하게 예언되었다. 아버지는 불교에 귀의한 적이 없다고 하셨지만 친교 하던 고명한 스님이 계셨다. 그 스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해남 대흥사에 계셨다. 매년 정초에 그 스님께서 그해의 아버지 행년신수(行年身數, 즉 그해의 좋고 나쁜 운수)를 보고 서신을 보내 주셨는데 1978년 양력으로 오월 초순에 모친상이 있을 것이니 준비하시라는 소식이었다. 할머니는 그해 정초에는 정정하고 건강하셔서 아버지는 스님의 충고를 반신반의하셨지만 믿는 친구의 정성이라 백부님과 상의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통솔해야 하는 교감이셨는데 공교롭게 오월에 수학여행이 예정돼 있었다. 아버지는 난처하셨을 것 같다. 미신으로 여겨질 서너 달 후의 불확실한 예언을 이유로 공무를 변경할 수도, 책임을 다른 선생님께 넘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삼월쯤 할머니는 황달 증세로 전남대 의대 병원에 입원하시고 상태가 악화되셨다. 노인성 질환으로 여겼지만 아마도 암 종류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우스꽝스러운 70년대식 소동이 있었다. 할머니가 시주하시던 절에서 걱정하여 문병 온 신심 돈독한 아주머니들이 할머니 몸에 베인 황달을 뺀다고 어른 종아리만 한 잉어를 큰 대야에 담아서 할머니 병상에 올려놓고 할머니께 잉어를 바라보게 했는데 잉어가 팔딱거리자 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병상 담요가 온통 젖었다. 간호사들이 기겁하고 잉어 대야를 치우게 했지만 완고한 아주머니들은 잉어를 담은 대야를 병상 아래 바닥에 두었고, 그러자 병실 바닥이 튀는 물로 젖어 미끄러웠다. 그 대학의 간호학과 학생이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할머니 병실에 상주하다시피 했던 사촌 여동생은 참으로 난처했다.

그 아주머니들은 황달 환자가 잉어를 바라보면 잉어 뱃가죽 비늘이 노래지도록 환자의 황달기가 옮겨와 낫게 된다고 굳게 믿었다.

할머니의 병세가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되자 수학여행 통솔은 교감인 아버지 대신 교장선생님께서 하시기로 했다고 한다.

스님이 운명하실 날짜를 정확히 알려주셨기 때문에 미리 부고장과 장례 준비는 물론 아버지의 남매들과 우리들 손자손녀들까지 모두 모여 임종할 수 있었다. 일찍이 할아버지를 보내고 홀로 삼십삼 년을 사셨지만 아들딸, 며느리와 사위들, 많은 손주들에 둘러 싸여 운명의 순간을 맞았으니 가실 때 외롭지 않은 복이 있었던 분이다.


장례를 준비하고 치르던 며칠은 박정희 시대의 대통령을 뽑기 위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기간이었다. 인근의 유권자들이 상가에 몰려 있으니 후보들과 선거꾼들이 대목을 맞아 집마당은 물론 마을 어귀에 있는 우산각까지 북새통이었다. 우체부도 집집마다 배달 갈 필요 없이 상가로 와서 편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전통 상여를 이십여 명의 상여꾼들이 메고 상여 앞뒤에 만장(輓章)을 든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전통 장례로는 아마도 우리 군 고을에서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이 마을에서 전통 상여에 의한 운구는 할머니 장례식이 마지막이었다. 상여 소리꾼이 고향마을 송동 입구의 우산각 마당에서 할머니의 큰 사위이자 나의 큰 고숙을 상여 앞에 억지로 태우던 장면, 고숙이 상여 앞줄 새끼줄에 끼워 놓은 고액의 노자돈도 생각난다. 할머니는 묏자리를 보는 어른의 지시대로 송동 뒷산의 가묘에 묻히셨는데, 지관(地官)은 이곳에서 육탈(肉脫) 후에 다시 이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군대 입대를 기다리던 나는 장례기간 중에 이런저런 잔 심부름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보름 후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할머니의 묘를 송동 제각 옆의 언덕배기로 이장하던 날도 선명하다. 1988년 시월 하늘 청명하던 날, 할머니가 묻혔던 묘를 개장하고 넷째 숙부님과 장의사가 수습한 육탈 된 누런 유골을 솔잎을 묶어 만든 솔붓으로 내가 하나하나 깨끗이 닦았고 새 묘지에 장의사가 유골을 차례로 맞춰서 다시 안장하였다. 할머니의 시신에 입혀드렸던 수의(壽衣)는 흔적 없이 녹았지만 수의를 바느질한 하얀 실이 그대로 남아 유골에 얽혀 있었다. 실이 천연 섬유가 아니었는지 아니면 천천히 썩는 명주실이었는지 모르겠다.

유골에 감긴 실을 떼어내며 요즘 대부분 화장을 하는 시대에 온갖 장식을 더한 수의를 망자에 잠시 입혀드리는 것이 산자들의 체면과 위안 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부탁하고 싶다. 언젠가 나의 시신을 수습할 때가 오면 부디 수의 대신 질기지 않은 한 장의 광목천으로 시신을 감싸서 아무런 장식 없이 수수한 종이로 만든 관에 넣어 화장해 주기를.


손자로서 할머니의 회갑날과 전통 장례에 참여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혜택이자 정신적인 자산이다. 지금 같은 만혼의 시대에는 회갑이 의미를 잃기도 했지만 손자가 조부모의 회갑날을 기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져 조부모의 장례는 생생히 보겠지만 상여 뒤로 만장이 따르는 이별식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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