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제들에겐 어릴 적 온 가족이 함께한 사진이 없다. 지난 세기 육칠십 년대의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쯤 있을 만도 한데 보통의 '가족사진'이라 할만한 사진이 없다. 어릴 적 그런 생각을 못해서 인지, 지난 세기 팔십 년대 큰형과 작은형 그리고 나와 동생의 결혼식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다섯 형제와 일가친척들이 예식장 카메라 앞에 도열하여 찍은 사진은 여러 장이 있지만 그때마다 부모님과 형제들만 따로 한 컷 남길 생각을 아무도 못했는지 아쉽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를 모시고 중년이 된 다섯 형제가 고향 집 뒷동산의 관경제(觀敬齊)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다시금 우리들의 무심함을 탓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아버지는 매사에 주관이 뚜렷하셨다. 그래서 역시 고집 있는 아들들과 마찰도 있었지만 합리적인 반론은 인정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긍정적인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꼿꼿한 자세지만 겸손이 몸에 밴 어른이셨다. 자라면서 심하게 야단맞은 기억이 없다. 내 기억이 시작되는 30대 중반의 아버지는 그때 이미 어른이셨으니 어쩌면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부터 어른이셨는지 모른다. 당신은 90이 넘은 나이에도 무언가를 익히고 배우려고 하셨다. 남기신 글과 스크랩북을 보면 새삼 아버지의 학구열과 꾸준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냥 제사로 추모하기엔 허전하여 부모님과 두 분의 손녀 손자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도 이어주고 싶어 어설픈 제목이지만 할아버지와 손주 잇기, 줄여서 ‘조손(祖孫) 잇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런저런 옛 추억의 징검돌을 놓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돌을 놓을 때가 됐다. 브런치글 연재에 30회의 제한이 있다는 것을 지난달에야 알았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쯤 해서 일단락을 짓는 것도 좋겠다. 조카들에겐 특별한 느낌이 있겠지만 글을 읽는 분들이 남의 집 이야기에 질리실만한 때다. 연재한 글을 대략 헤아려 보니 책 한 권을 탈고한 기분이다. 연재의 의무 알림이 일주일을 채우면 다음 일주일이 금방 금방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래도 매번 즐겁게 기억을 떠올리고 기록했다.
조카들에게 들려주던 시간이 매우 즐거웠지만 서두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것은 내심 두렵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더 희미해질 것이고 어눌해지다가 종국엔 생각하는 능력마저 상실할지, 언제 작별의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불려 갈지 모른다는 당연한 걱정을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영어단어 애닉도티지(anecdotage)가 의식되어 연재의 계속을 망설이게도 했다.
anecdotage는 영국의 수필가 토머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가 anecdote(일화)와 dotage(노망)를 결합해서 ‘늙어서 자꾸 옛날이야기만 하는 시기’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조어이다. 노년기의 수다스러운 회고, 혹은 나이 든 사람들의 자서전적 이야기 습관을 풍자하는 단어인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이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인생 경로일 것이나, ‘조손잇기’를 써 내려간 나, 즉 조카들의 조부모의 셋째 아들은 아직은 노망(dotage) 난 상태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연재글의 서두에서 얘기한 대로 부모님과 형제들에 얽힌 이야기를 적어나가면서 우선 염두에 둔 독자는 나의 형제와 사촌들의 장성한 조카들과 미래의 손주들이다. 희망 사항이지만, 우연히 이 브런치북을 클릭하신 분들이 집안의 어른들을 떠올리고 잊고 있던 그분과의 추억에 잠시라도 흐뭇한 시간이었다면 좋겠다.
아버지의 탈상일에 조카들과 다 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이야기를 정작 조카들이 어떻게 읽었는지도 궁금하다.
형제들의 어린 시절과 조카들의 기억에 없을 나의 어머니의 이미지가 조카들의 가슴속에 그려졌다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보람이 크겠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동화처럼 형제들의 조카와 손주들이 내내 찾아 거듭 읽어주면 더욱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