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여행지에서 지진을 경험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날의 그 순간이 강도 6.4의 지진이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호텔 내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등산하는 것 같은 아이고 뒤질라스 산동네 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져 갔다.(궁금한 분들을 위해:크레타 섬의 아기오스 니콜라오스)
뭐 별수 있겠는가 먹는 것에 진심인 우리는 아침을 먹으러 가기 위해서라도 비탈길과 수많은 계단을 지나 내려가야 했고 옷을 갈아 입고 가방 챙겨 시내 라도 가려면 또 그 길을 올라가야 했으며 저녁을 먹기 위해 같은 길을 내려가야 했다.
타잔이 나무줄기를 타고 날아다닌 게 그냥 되었겠는가 무한 반복하다 보이 그리 됬겄지..
이틀이 지나고 나니 어느새 우리는 그 까마득해 보이기만 했던 길을 제법 능숙하게 걷고 있었다. 옛날 옛적엔 학교 가려면 산 하나 넘었어라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말이다.
휴가 삼일째 되던 화요일 아침이였다.
날씨 좋기로 소문난 그리스 크레타에서 우리는 비를 만나고 있었다.
10월에 비 오는 날이 며칠 안된다는데 모두 그 주에 연타로 끼여 있었다.
아.. 쒯뜨 독일에서도 징글징글 만나는 비를 놀러 와서 까지 만나야 하다니..
우리가 비까지 데리고 여행을 왔던가... 해가며 비 오지 않을 때만 요령껏 움직이는 스킬을 발휘했다.
그렇다고 그리스 크레타 씩이나 와서 기념품으로 우산을 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비 사이로 막가? 면서 들락 거리던 화요일, 아침 식사를 끝내고 시내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토톡토톡 떨어져 내리던 작은 빗방울이 갑자기 세찬 빗줄기로 바뀌었다.
까만 먹구름에 포위되어 있던 수줍은 듯 가끔 고개 내밀던 파란 하늘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비 내려? 말아? 해 보이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그리 당황스러울 것이 없었다. 단지 시내로 나가던 그 길 에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 식당 하나 그리고 남의 호텔 로비 하나뿐이었다.
한마디로 그 길에서 비를 피할 곳은 없었다.
우리는 일단 비부터 피하고 보자는 심산으로 바닷가 끝에 있는 횟집처럼 생긴 카페로 냅다 달렸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산 위의 호텔은 내려오면 두 곳의 해수욕장이 나온다.
왼쪽 아랫길로 끝없이 걸어 내려가다 보면 오목하고 파도가 잔잔한 짙은 색의 모래사장과 파라솔들 그리고 제트스키 등의 워터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우리 방 673호 의 베란다에서 잘 내려다 보이는 바닷가다.
여름이었다면 자리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지 모를 그곳은 여름 끝자락이던 그 주에는 드문드문 가족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고 화요일 그날 아침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바닷가를 산책하던 사람들도 조깅을 하던 사람들도 비를 피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또 우리가 시내를 가려면 늘 지나다니던 해수욕장 은 오른쪽 아랫길로 하염없이 걷다 보면 나온다.
이 해수욕장은 크레타 동쪽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운 황금색 모래사장이 아닌 크고작은
자갈 사장?으로 되어 있다.
자갈길 해수욕장 끝에 2층짜리 카페가 하나 있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우리의 바닷가 횟집 또는 포장마차처럼 생겨 있었다.
툭틔인 바다가 보이는 곳에 납작하고 긴 지붕을 대충 얹은 하얀 건물 (핸드폰으로 글을 읽는 분들은 대문사진을 손으로 밀어 올리다 보면 바다로 향하는 돌길 앞에 하얗게 집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다 카페에요.)
식당 같아 보이는 외관에 비해 카페 안은 아기자기 한 북카페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바다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창문 없는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간혹 비가 들이쳐 테이블 위로 물방울이 맺히기도 하고 바다내음 듬뿍 실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따뜻하고 향긋한 차를 마시며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라이브로 감상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낭만적 이었다.
비와 바다 그리고 어두운 날씨의 느낌은 왠지 잔잔하고 늘어지는 재즈 음악이 어울릴 것 같은데 카페 안에서는 통통 튀는 댄스 뮤직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요새 젊은이들 취향의 음악인 것 같았다. 막내와 딸내미도 알고 있던 노래 인지 음악에 맞춰 발을 까닥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던 남녀는 모두 젊고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이 카페의 직원인지 사장인지 모를 서빙 남녀는 날씨 좋은 날 바로 바다로 들어가 서핑을 할 것 같은 보기 좋게 그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다 카페 에는 우리처럼 비를 피해 들어왔는지 모를 세 팀이 더 있었다.
제일 바다와 가까운 자리에 있던 아기와 함께 온 젊은 부부 그리고 우리 뒤쪽에 앉아 있던 친구들로 보이던 중년의 여자 둘 남자 셋 그리고 맨 끝쪽에 앉아 있던 노년의 부부. 모두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있던 젊은 부부는 영어를 쓰고 있었고 연신 까르르까르르 웃어 가며 서로 장난을 치고 있던 친구들로 보이던 이 땅이 삼땅이 들은 불어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짧고 하얀 머리의 서로 닮은 모습을 하고 있던 노년의 부부는 스페인어 인지 이탈리어 인지 모를 언어를 쓰고 있었다.
그 덕분? 에 서빙 남녀는 계속 영어를 쓰며 오갔다. 차를 마시며 앉아 있으려니 아침 먹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지만 산에서 내려오느라 그리고 비 구경하느라 오래 앉아 있어 당이 떨어졌는지 살짝?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과 케이크와 치즈 케이크를 주문해서 떨어진 당을 충족시키기로 했다.
보드랍고 새콤달콤한 사과가 아삭아삭 씹히던 사과 케이크와 보기에는 곡식에 블루베리 잼과 땅콩이 들어간 그리스 식 요구르트 같은데 맛은 영락없는 치즈케이크이던 퍼먹는 헤쳐 모여 치즈케이크는 고소하고 맛났다.
아직 아침 먹은 것이 소화가 다 되지 않았다고 하던 딸내미도 연신 숟가락을 들었다.
달달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문득 남편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노라며 자리에서 일어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간 식구대로 각기 핸드폰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돌려 보며 이거 잘 나왔네 저거 잘 나왔네 하던 우리는 순간 몸이 한쪽으로 확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덜그럭 덜그럭 쿵쾅 소리를 내며 누가 세게 떠다 밀어 댄 것처럼 한옆으로 한없이 밀려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왔다.
건물도 그 안의 사람도 테이블도 모두 순식간에 한쪽으로 밀려갔다.
그 슬로비디오 갔던 묘한 순간에 각기 다른 말을 구사했던 카페 안 모든 사람의 입에서 같은 말이 쏟아졌다 오 마이 갓!
떼창이라도 하듯 함께 오 마이 갓! 을 외쳤던 모두는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이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서빙 남녀 중의 젊은 남자는 불안하게 웅성이는 손님들을 안심시키려 윗트 있는 동작으로 지구 종말 아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싶어 한참을 멍때렸다.
다행히 뜨거운 음료들은 이미 마시고 난 후였고 접시나 깨질 것들이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진 않아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단지 여기저기서 포크와 수푼 쟁반 등 비교적 가벼운 것들이 떨어져 내려 바닥에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이 꿈이 아녔음을 입증 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사이 화장실을 다녀온 남편은 별로 그 상황이 심각하게 느껴지진 못했다고 했다.
나는 카페가 바다 위에 지어 올린 조금 엉성해 보이는 건물이라 혹시 비가 많이 오고 파도가 거세져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말에 평소에도 팬터지류를 좋아하는 막내는 "아닐걸.. 이거 지진 아니야? 이러다 쓰나미 오는 거 아니야?"라고 했고 나는 막내의 짓궂은 말투가 재밌어서 웃으며 "에이 그건 아니지!" 했다.
그때가 10월 12일 화요일 12시가 넘어가고 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 독일 뉴스 속보를 통해 그리스 크레타 정확히 우리가 있었던 바다와 멀지 않은 곳에서 6.4 강진 이 시작되었고 크레타 해상에 쓰나미 경계경보 까지 있었으며 그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패닉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날 막내의 말은 팬터지가 아니라 정확한 팩트 였던 거다.
여행 가서 지진의 한 복판에 있어 보기는 살다 살다 처음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고양이 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여기 하나 저기 하나 흩어져서 돌아다니던 고양이들이 그날따라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마치 피신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날 지진은 우리 대환장 휴가 중에 아무것도 아녔음을 알게 되는 일이 이틀 후에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