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중희 Oct 25. 2021

크레타에서 산토리니까지

챔피언 제트 타고 환장의 2시간 30분


우리는 어떤 이름 또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선명하게 생각나는 느낌들이 있다.

각자의 경험치에 따라 어느 것은 아주 세밀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그 이름 또는 단어가 주는 느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빨간 떡볶이를 생각하면 매콤 달콤한 맛과 찰진 식감이 떠올라 저절로 군침이 돌고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생각하면 그 유명한 백허그 장면이 떠올라 알콩달콩 로맨틱한 무드가 된다. 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마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리다 보면 숲이 무성한 정글과 이름 모를 벌레들이 상상되며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이처럼 그때까지 가보지 못한 산토리니는 우리에게 파란 지붕과 바다의 낭만이 케이크 위에 얹어진 생크림 같은 단어였다. 그래서 크레타 섬 여행 온 김에 나들이 가듯 들려 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게 2015년 여름 처음 크레타로 휴가를 왔을 때도 산토리니를 들렀다 오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는 우리의 숙소가 크레타 섬의 서쪽인 조르지오 폴리스라는 지역에 있어서 크레타에서 다녀야 할 곳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었다.

크레타 섬도 처음이라 다 못 보는데 산토리니까지 가려니 일정이 너무 빠듯하고 무리스러웠다.

그래서 다음번을 기약하고 두 번째인 2018년 여름에 가보려고 했는데 여기저기 산불이 날 정도로 폭염이라 남편이 더위를 먹었다.

꼼짝없이 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크레타섬 세 번째인 이번에는 산토리니를 꼭 가야지 했는데.. 크레타에서 지진이 났다.

갈 수 있을까? 했다.

이럴 바에는 아예 바로 산토리니를 직접 가지라는 생각도 했지만 왜 인지 산토리니는 어린 시절 편먹고 고무줄놀이할 때 한 명 더 있는 친구를 덩달아 껴주며 깍두기라 불렀던 것처럼 크레타 섬 온 김에 하루 소풍 가듯 들리고 싶었다.


그리스 크레타 섬에 지진이 났던 화요일 우리는 우리 병원 직원 중에 CB 가 sns로 보내준 걱정 어린 문자와 독일 속보로 그것이 6.4 강도의 지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독일 뉴스에서는 난리가 난 것처럼 쓰여있었는데 사실 그 시간에 현지에서는 얼떨떨하고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뭘 몰라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고 현지인 인 그리스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지 않아 더 그랬던 것 같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호텔 직원들이 오갔고 거리에 사람들도 냥이 들도 별다름 없이 다녔다. 지진 났었다는 것을 그새 잊을 만큼 말이다.


다음날 우리는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산토리니를 가기로 했다.

크레타 섬에서 산토리니를 가려면 공항이 있는 헤라클리온 항구 그리고 우리가 머물고 있던 아기오스 니콜라오스 항구 에서 배를 타고 갈 수가 있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도착한 부둣가에는 미리 나와 있는 부지런 한 사람들이 벌써 줄을 서고 있었다.

그전날 배편을 미리 예약해두고 서류를 준비해 두었지만(요즘은 코로나 테스트 또는 백신 접종을 했다는 증명서류를 어느 곳이나 제시해야 한다)

배를 타기 위한 티켓팅은 부둣가에서 바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내린 부두에서 일출을 배경 삼아 유유히 들어오던 배는 생각 하던 것보다 훨씬 큰 배였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은 몇십 명 타고 다니는 유람선 비슷한 배였는데 챔피언 제트라는 이름도 용맹한 큰 배는 산토리니까지 자동차도 싣고 가는 고속여객선 이었다.  


배 안은 밖에서 보던 것 보다도 훨씬 넓었다.

줄 을 섰을 때는 제법 사람들이 많아 보였는데 타고 보니 배 안이 넓어서 그런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앉았고 빈자리가 많았다.

1층 어디든 원하는 데로 앉아도 된다 해서 우리는 가운데 끝에 테이블이 있고 양쪽으로 의자가 있는 넓은 자리에 앉았다.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영어, 불어, 독일어 순으로 나왔다.

이제 2시간 30분만 가면 우리가 노래하던 산토리니를 만날 수 있구나 싶어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에 담아둔 게임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핸드폰을 켰다.

우리는 커피 향이 솔솔 풍기던 매점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이른 아침으로 빵을 먹고 온 후라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커피를 마시지 않고 나온지라 커피가 고팠다.

남편은 드디어 산토리니를 간다는 설렘이 좋았던지 아니면 마누라의 신난 모습에 덩달아 신이 났던지 호기롭게 라테 두 잔을 시켰다.

13유로 70 센트 커피 한잔에 만원 가까이 나왔다.

평소 라면 동네 빵집에서 2유로 70 하는 커피도 한잔으로 나눠 마셨을 남편은 커피가 비싸 봤자 아니겠어하고 두 잔 외쳤식겁했다.

어쩌겠는가 무르지도 못하고 비싼 커피 사서 들고 우아와 고상을 쳐발 쳐발 해가며 천천히 아껴 마시는 수밖에...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마실 기세로 조금씩 아껴 마시던 커피가 바닥이 날 때쯤이었다. 아까부터 살짝살짝 흔들리던 배가 심상치 않게 움직였다.

파란 하늘의 말짱한 날 폭풍우를 만난 듯 배가 뒤집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챔피언이라는 이름의 배는 파도에 쨉을 날리다 어퍼컷을 정통으로 맞았는지 제대로 비틀 거렸다.

핸드폰으로 책을 읽던 딸내미가 읽는 것을 포기하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어느 상황에서도 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막내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체 의자를 젖힌 체 누웠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멀미를 하지 않는 그 첫날의 산을 날듯이 타고 오던 봉고에서 조차 멀쩡? 하던 남편 조차 음악을 듣고 있던 이어폰도 끈 체 엎어졌다.

한참 옆으로 떨어진 테이블에 아침을 못 먹고 배를 탔던지 얼굴만 한 빵을 먹고 있던 여자 1,2는 아예 의자들의 손잡이들을 올리고 그 자리에 누웠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뱃속으로 들어갔던 비싼 커피가 세상 구경을 하겠노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흔들리는 것에 예민한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체 1분이 하루 같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배 안의 의자는 우리가 그리스 크레타로 날아올 때 탔던 비행기 의자보다 훨씬 더 편하게 눕듯이 젖혀졌다.

그동안 살면서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배를 타 보았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작은 배 안에서 점심으로 생선을 먹으며 뱃길을 오가기도 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말하는 뱃멀미에 대해 나는 알지 못했다.

뱃멀미가 이렇게 힘든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멀미약을 먹고 탔을게다.

크레타섬에 도착하던 날 산길을 넘어 달리던 봉고의 흔들림은 댈 것도 아니었다.

산길을 달리던 차 안의 느낌 이 예전에 놀이동산에서 타 보았던 컵처럼 생긴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던 놀이 기구와 닮았다면 이 배의 흔들림은

그네처럼 생긴 것이 같은 자리를 빠르게 돌다 점점 위로 올라가던 놀이 기구를 닮았다.

내리고 나면 어지러워 그 자리에 서서  비틀거리던 그 놀이기구 말이다.

어느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떠다 밀리듯 걸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속시원이 비우고 오기로 했다. 물론 가던 중간에 불을 뿜어내는 용처럼 누구에겐가 뿜지 않고 무사히 화장실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중에 몇 번은 가던 길 반대쪽 벽에 등짝을 부딫일 정도로 그 큰 배가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그 순간에 물총이 발사되듯 바로 나오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이 악물고 이마에 땀방울을 닦아내며 화장실 가던 길에서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어렵사리 마주 오고 있던 꼬마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나 내릴래 집에 갈래"하던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영어였지만 동병상련의 극치를 달리는 내게 한국말처럼 귀에 꽂혔다.

그때 내게 말할 기운이 있었다면 이렇게 장렬히 말했을 것이다.

"아가 아줌마도 베리베리 매니매니 쌤쌤이여!" 


그렇게 토하고 싶어도 토할 수 없고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환장 할 것 같은 배를 2시간 30분 꽉꽉 채워 정신줄 놓기 직전에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던 사람들의 멘붕이던 몰골과 배에서 뭘 먹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 넘치는 말 들로 별 차이 없는 시간을 보냈음을 짐작케 했다.

그렇게 간신히 땅에 발을 디뎠다는 감격도 잠시 우리가 내린 곳은 파란 지붕이 보이는 산토리니가 아니었다.

냅다 높고 꼬불꼬불 한 산길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고 그 길을 올라가는 버스들이 어지러이 보였다.

그렇다 우리가 내린 곳은 산토리니를 가기 위해 배가 들어오는 부둣가였다.

우리 앞에 번호표를 달고 줄지어 서있던 버스들이 우리를 파란색 지붕의 하얀 집들이 아름다이 서있는 산토리니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이 환장할 것 같은 속을 부여잡고 연이어 버스를 타고 산길을 달려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5번.

뱃멀미로 속이 뒤집어지다 못해 기절할 지경인데

버스를 타고 저 산길을 올라가야 하다니...

산토리니고 나발이고 그냥 그 자리에 있겠다 할까? 아님 아까 하지 못한 것을 저 파란 바다에 시원하게 하고 버스를 탈까?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PS. 산토리니 이야기가 내용이 많아 부득이 2회로 나눕니다.

다음 편 계속에... 스트레스 받으실 독자님 들을 위해 살짝 스포일러를 날리자면 지난 편 화요일 지진, 이번 편 수요일 환장의 뱃멀미를 이어 다음 편 환장할 돌계단 그리고 목요일 광란의 천둥번개 등의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여행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일상 이야기를 기다리시는 독자님들은 조금 더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독일도 날이 많이 추워져서 차가운 가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고 포근한 한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지진을 만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