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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r 15. 2024

김 씨 부인 수박 사수기

독일 마트에서 생긴 일


엊그제 보니 마트에 초록색 줄무늬 수박이 1kg 1유로 59센트 세일 이벤트로 나와 있었다

세상 참 좋아졌다 싶다 아직 봄도 안되었는데 여름이 제철인 수박을 여름만큼

싸게 먹을 수 있다니 말이다.

독일은 한국에 비해 과일값이 저렴한 편이다.

날씨가 안 좋아 이 땅에서 직접 열매 맺어 수확한 과일 들은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유럽이 한울타리다 보니 가능한 일이지 싶다.

스페인 산 수박이 한화로 하면 1킬로에 약 2천3백 원 꼴이다.

크기가 배구공만 하니 아마도 2킬로 안팎일 것이다.

작은 수박 한 덩이 약 4천6백 원 하는 셈이다.

거기다 씨가 적다고 쓰여 있으니 씨 발라 먹기 귀찮아하는 우리 집 막내를 위해 딱이다.

장바구니에 실한 놈으로 하나 골라 담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난데없이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사람은 자기가 겪은 일이 가장 크게 느껴지기 마련 아니던가

더군다나 엄마의 일생 중에 가장 큰 사건 중하나인 임신과 출산 때 경험들은

누구나 드라마 한 편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 아이를 머나먼 타국땅 독일에서 낳고 키운 내게도 미니시리즈 나올 분량이 있다

그중에 작은 에피소드 하나..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독일의 응답하라 시절의 일이다.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는 큰애는 한여름 삼복더위에 태어났다.

그 시절 우리는 유학생 부부였다.

남편은 한창 국가고시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고 나 또한 학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부른 배를 이끌고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사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우선 나이도 20대 중반이라 젊었고 무엇보다 처음은 늘 그러하듯 잘 모르지 않은가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어 검색만 하면 줄줄이 유용한 정보들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비싼 전화요금 탓에 집에 안부 전화 한번 드리기도 망설이던 시절이다.

어쩌다 궁금한 것들이 생기면 동네 유학생 부부 중에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선배 언니들에게 귀동냥해서 배우던 때를 살았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그래도 씩씩하게 지냈고 그런 엄마 아빠의 사정을 아는지 뱃속에

아기는 더없이 문안했다.

입덧도 크게 없었고 먹고 싶은 것조차 크게 없었으니 말이다

학생 부부라 외식이라고 해보아야 멘자 (독일의 학생식당)에서 조금 비싼 메뉴를

골라 먹는 게 다였던 때라 먹고 싶은 게 많았다면 곤란했을게다


남들은 자다가도 뭐가 먹고 싶어 자던 남편을 깨우고는 했다는데

착하고 순한 뱃속의 아기는 도무지 뭔가 따로 먹고 싶은 게 없었다.

먹고 싶다 해도 한국에서 당장 대령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겐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게 덥디더운 여름날 시원한 수박이 먹고 싶었다.

그 시절 선풍기도 없이 부채질로 더위를 날리고 어쩌다 아이스크림 입에 물고 여름을 나던  때였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했지 않은가 그 맛이 끊임없이 상상이 되었다


한입 베어 물면 시원한 단물이 츄르릅 하는 수박이 간절했다.

한국의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독일도 더운 날은 무지 덥다

특히나 강렬한 햇빛은 살갗을 태우는 듯한 느낌이 들 지경이다.

독일에서 여름날 잔디밭에 헐벗고 누워 기름 쳐발 쳐발 하고 앞으로 누웠다 뒤로 누웠다

구워 주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있다.

햇빛이 세서 테닝이 자연산으로 절로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남편에게 수박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 네가 사다 먹던가 주말까지 기다리라는 게 아닌가

당장 먹고 싶은데 기다리라니? 남산 만한 배를 가진 마눌에게 직접 사다 먹으라니?

지금 같았으면 당장 포효 하는 사자가 되어 네가 죽고 잡냐며.. 말로 죽여 났을 거인데..

그때 소심한 새댁이었던 나는 섭섭하긴 해도 바쁘니 어쩔 수 없지.. 라며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남산 만한 배를 이끌고 직접 마트로 출동했다.

자동차 면허도 없고 차도 없었지만 어디던 걸어서 생활이 가능했던 작은 도시에

살았던 덕분에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산달이 다 되어 가는 무거운 몸으로 여름날 땡볕을 받으며 장 보러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찌를듯한 햇빛을 뚫고 마트에 도착해서는 그중 작은 수박을 골랐다.

집에 당장 필요한 것 몇 가지 사고 나니 가져간 장바구니가 금방 가득 찼다.

아무리 작다 해도 둥그렇고 무게 있는 수박을 장바구니에 함께 담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집까지 안전하게 수박을 사수해서 옮기나 가 관건이었다.


팬데믹을 지나며 지금은 독일에서도 배달이 가능한 마트들이 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리 많이 샀어도 지가 산 것은 지가 가져가는 시스템이었다.

각자 시장바구니에 담아 가던 시절이라 배달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 어쩌다 한국 가면 저절로 몸이 반응해서 장바구니 꺼내 주섬주섬 담다가

집 앞 슈퍼 아줌마 눈똥 그래져서는 "아니 이렇게 많은데 배달 안 시키세요?"라고

묻고는 했다.


그러니 장바구니에 담은 것 고스란히 들고 집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

다행히 마트가 집에서 아주 먼 곳은 아니었지만 부른 배를 들고 다녀 오려니 남자들 입만 열면

말하는 군대 완전군장 행군이 상상이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무게의 균형을 위해 에코백 두 개로 양쪽으로 나누어 들고 아무리 보아도 들어갈 곳이 없는 작은 수박 한 통은 배에 얹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와 가슴팍 사이 라고 하겠다.

젊을 때라 몸이 크게 붇지 않고 배만 뽈록하게 나왔을 때라 그사이 공간이 있었다.

거기다 수박을 걸듯 얹듯 들고 양팔에 에코백 걸고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뒤뚱뒤뚱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는데..

문제는 앞이 잘 보이 지를 않는 거다

무게 때문에 꾸부정 해진 데다가 가뜩이나 목이 짧고 가슴팍과 배의 길이 허리가 짧은 신체 구조를 가졌다 보니 얼굴보다 커다란 수박은 시야를 가렸다.

사극에 나오는 양반댁 규수처럼 발걸음도 사뿐사뿐 조심조심 옮기며 걸었다.

혹시라도 걷다 누군가와 부딪쳐 넘어진다거나 해서도 안되고

그 김에 아까운 수박이 깨져서도 안되니 말이다.



그때 누군가  앞에서 박장 대소 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 시절 같은 기숙사에 살던 아는 언니였다.

얼마나 숨이 넘어가게 웃어 대던지..

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멀리서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누가 걸어오는데 얼굴이 수박인 거예요

세상에나 수박이 걸어오다니 내가 내 눈을 의심했다니까!

내가 머리에 뭘 이고 다니는 사람은 봤어도 배에 뭘 얹어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라며 웃다 죽게 생겼다 싶게 웃어 져쳤다.


그 이후 나는 그 동네 한국인들 사이에서 한여름의 수박녀, 산달 다되어 수박 들고 다니는 독일 여자 싸다구 갈기게 생긴 강철녀로 등극했으며 수박 사 오다 길에서 애 낳을뻔한 여자가 되었다.


그렇게 유학생 사회의 웃기는 이야기 레젼드를 찍었던 그 여름 그때 샀던 수박이  저만한 수박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터지고 남편을 두고두고 갈굴 수 있는 에피소드 중에 하나다.

독일 한여름 김 씨 부인의 수박 사수기였다. 



To 애정하는 독자님들 

2024년 새해가 된 지 어제 같은데 벌써 3월 중순을 달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날듯이 가네요..

겨울이 긴 독일도 팔랑팔랑한 봄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하루는 긴데 일주일은 왜 이렇게 금방일까요?

또 주말이 되었으니 말이죠 ㅎㅎ


올해부터는 뭔가 기획이라는 것을 해서 글을 쓰고 싶었건만..

여전히 잡히는 대로 쓰게 됩니다.

이거이 김자가의 콘셉트 이려니 해 주세요 ㅋㅋ

모두들 건강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독일에서 김중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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