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제미나이도 깜놀할 설 메뉴!

오늘은 실험 적인 요리가 될 거야!

by 김중희

"으악! 망했다!"

일요일 이른 아침, 우리 집 주방에서는 나의 포효하는 소리가 연거푸 울려 퍼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조금 긴 설명이 필요하다.

내일 한국은 '우리 우리 설날'이다.

아시다시피 이곳 독일에는 음력이라는 개념이 없다. 당연히 설 명절도 없다. 창밖은 그저 평범하고 무심한 유럽의 겨울 풍경일 뿐이다. 하지만 정 많은 한국 사람들의 특성이 어디 가랴.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명절이 찾아올 때면 약속이라도 한 듯 나름의 모임을 갖고 한국의 온기를 나누곤 한다.


작게는 소소한 친구들 모임부터 크게는 한인회나 한인 교회를 주축으로 명절맞이 행사, 혹은 예배를 드린다. 이런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명절 느낌 솔솔 풍기는 맛난 한국 음식이 아니던가.

아낙네들의 단톡방에는 누가 무슨 음식을 들고 올지에 대한 리스트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잡채, 제육볶음, 오징어 초무침, 겉절이, 떡국, 야채 전, 도토리묵, 메밀 막국수... 이름만 들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고향의 음식들이 줄줄이 열거되었다.


"나는 그럼 뭐 하지?"

단톡방의 화려한 리스트를 눈팅하다가 무심히 내뱉은 한마디에, 옆에 있던 남편이 툭 던지듯 말했다.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만두 탕수!"

"어머, 그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데! 만두 빚어야지, 튀겨야지, 그 튀긴 만두를 또 양념에 버무려야지. 자기가 직접 할 것도 아니면서 말은 참 쉽네!"


말은 새초롬하게 쏘아붙였지만, 이미 머릿속으로는 '만두 탕수'의 레시피가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남편은 뭐든 말만 하면 뚝딱 나오는 줄 아는 게 참 얄밉지만, 생각할수록 메뉴 선정은 탁월했다.

'그래, 떡국도 있을 테니 만두가 들어가면 금상첨화지. 모임 장소까지 가져가면 만두가 식을 텐데, 현장에서 양념으로 한 번 더 코팅해 내는 만두 탕수라면 식어도 맛이 괜찮을 거야. 양념장을 따로 챙길 번거로움도 없고.'


우리 동네 아시아 식품점

그 길로 아시아 식품점에 들러 만두피와 만두소에 넣을 두부, 숙주까지 야무지게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 안에서 "나도 만두 탕수 해간다고 단톡방에 올릴까?"

무심결에 내뱉은 내 말에 남편이 또 한 번 '참견질'을 보탰다.
"뭐 그런 걸 일일이 써. 그냥 해가면 되지!"


내가 괜히 유난을 떠는 건가 싶어 남편의 무뚝뚝한 핀잔을 그냥 넘겨버렸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확인한 단톡방이 문제였다. 손 빠른 다른 아낙네가 이미 선수표를 던진 것이다.

[저 만두 해갈게요! ^^]

"아, 진짜! 이럴 줄 알았어. 같은 걸 해갈 수도 없고 어쩌지? 진작 만두 탕수라고 써둘걸!"

순간, 옆에서 참견했던 남편에게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 때문이야! 진작 단톡방에 썼으면 만두 탕수 찜해두고 끝나는 건데,

재료는 다 사놨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남편은 마누라의 짜증에도 유들유들 웃어가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몰라? 모르면 제미나이한테 물어봐!"

한참 때 지난 코미디 코너의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 원!" 하던 그 멘트처럼, 그는 무책임하게 제미나이를 등판시켰다. 나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남편의 '그놈의 에미나이'인지 '제미나이'인지에게 말을 걸었다.

"제미나이야, 우리 설 명절 메뉴로 이런 것들이 있는데..."


나는 단톡방에 리스트업 된 메뉴들을 하나하나 읊어 댔다. 다 듣고 난 똑소리 나는 제미나이는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와우, 벌써 설 명절 준비를 다 하셨군요! 정말 멋진 메뉴들이네요."

나는 마치 사람처럼 살갑게 말을 건네는 AI가 웃겨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다 차리는 게 아니고 각자 준비해 오는 거야.

그런데 메뉴가 겹쳐서 그러지. 나는 뭘 하면 좋을까?"

내 물음에 제미나이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전체적인 라인업을 보니 고기 요리도 많고, 잡채나 전처럼 기름진 음식들이 꽤 있네요.

이럴 땐 해산물과 채소를 활용한 요리가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깐풍새우와 겨자냉채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그래, 이거다 싶었다.

나는 결국 '깐풍새우'로 메뉴를 최종 낙점하고 다시 마트로 향했다. 하루에 시장만 두 번을 연거푸 보게 된 셈이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신이 나 제미나이에게 말을 걸어댔다.

"새우는 어떤 걸로 사는 게 좋아?" 따위의 질문들. 척척 대답해 대는 제미나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순간 흠칫하며 기시감에 젖었다.

비록 내비게이션 같은 기계적인 음성일 뿐인데, 오가는 대화의 내용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나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눅눅해진 새우튀김
독일 주유소 안 풍경

어찌 됐든 메뉴는 제미나이가 강력 추천한 '깐풍새우'.

토요일 밤, 나는 거실에 한국 드라마를 크게 틀어놓고 비장하게 주방으로 들어섰다.

가열찬 새우 손질과 튀김 전쟁의 서막이었다.

행사는 일요일 오후였지만, 당일에 그 많은 양을 손질하고 튀기고 양념까지 입히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다. 미리 튀겨두는 게 상책이라 판단한 나는 하루 전날부터 팔을 걷어붙였다.


아이와 어른을 합치면 족히 오륙십 명은 모일 게다. 모름지기 명절 음식은 '큰 손'의 넉넉함이 미덕 아니던가. 나는 그 많은 인원이 풍성하게 먹을 양을 계산하며, 산더미 같은 새우를 튀기고 또 튀겼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드라마 속 대사들이 어우러진 주방은 제법 명절 분위기였다.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전날 밤까지만 해도 귀가 즐거울 정도로 바삭바삭한 소리를 내던 새우튀김이, 하룻밤 사이 맥없이 눅눅해져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게 꼬리까지 떼어낸 탈각 새우였던 게 화근이었을까. 작은 새우들이 옹기종기 모여 밤새 서로의 수분을 정답게도 나눠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밖은 독일 특유의 햇빛 한 점 없는, 습도 높은 겨울날이 아니던가.


눈앞이 아찔했다. 깐풍새우의 생명은 입안에서 경쾌하게 터지는 그 '바삭한 식감'이 아니던가! 눅눅해져 버린 새우더미를 보며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걸 어떻게 심폐소생 해서 가져가야 하나. 주방엔 정적 대신 나의 탄식만 가득 찼다.


눈치도 없는 참견쟁이 남편이 또다시 핸드폰을 들이밀며 나섰다.

"얼른 제미나이한테 물어봐! 이거 복구시킬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밤늦게 까지 새우와 사투를 벌인 마누라의 속도 모르고, 또다시 '제미나이' 타령을 하는 남편이 어처구니없고 얄미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놈의 에미나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걔보다는 내가 요리에 대해 더 잘 알거든!"

AI인지 뭔지 하는 녀석의 '이론'보다는, 수십 년간 주방을 지켜온 나의 '직관'이 이 위기를 구할 유일한 열쇠라고 믿었다. 나는 눅눅해진 새우 더미를 노려보며, 나만의 비장한 심폐소생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 눅눅해진 새우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방을 휘저으며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다진 파, 양파, 빨간 피망을 듬뿍 넣고 토마토소스와 고추장을 절묘한 비율로 섞어 양념을 만들었다. 이 양념에 새우를 버무린 뒤, 파스타나 감자 대신 오븐에 넣고 피자치즈를 듬뿍 올려 구워내면 어떨까?

서둘러 소량만 테스트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 바삭함은 사라졌지만 매콤 달콤한 소스와 치즈의 고소함이 어우러진 '그럴듯한' 요리가 탄생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대용량을 감당할 피자치즈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차, 오늘은 독일의 일요일이다. 모든 마트와 상점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닫는 날. 대체 어디서 그 많은 치즈를 구한단 말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네 주유소 두 군데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냉장고 구석 어디에도 내가 찾는 치즈의 흔적은 없었다.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독일의 주유소는 우리로 치면 편의점 같은 곳이다. 마트에 비해 가격은 사악하지만, 공휴일과 일요일을 가리지 않고 문을 여는 이곳은 독일에서 유일하게 24시간 불을 밝히는 구원의 장소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동네 주유소 란 그야말로 '당장 급하게 필요한 것들'로만 꾸려져 있어, 나처럼 '60인분'의 파티를 수습하려는 이의 욕망을 채워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냉장고 구석을 훑어보아도 내가 원하는 피자치즈는 보이지 않았다.


빈손으로 차에 올라타니, 조수석에 놓인 핸드폰 화면 속 제미나이가 무심하게 반짝였다. 마치 '그러게 내 말대로 깐풍새우를 쫌 제대로 하지 그랬어?'라고 묻는 것 같아 얄미움이 치밀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시간은 없었다. 치즈가 없다면, 이제는 정말로 '제미나이의 이론'도 '나의 자존심'도 뛰어넘는 진짜 실험을 시작해야 했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제미나이가 추천했던 또 다른 메뉴, '겨자냉채'가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그래, 바로 이거야!'

양념에 버무린 새우를 접시 가운데 마치 고속도로 달리다 만난 터널처럼 수북이 담고, 냉장고에 있는 온갖 채소를 채 썰어 화려하게 둘러 담았다. 그리고 코끝이 찡해지는 겨자 소스를 넉넉히 만들었다.

어차피 소스에 버무려 먹는 냉채라면, 새우튀김의 눅눅해진 식감은 더 이상 결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스를 듬뿍 머금은 풍성한 고기 고명처럼 느껴질 터였다.


보통 편육이나 해파리가 들어가는 자리에 당당히 들어앉은 '깐풍새우‘와 각색 채소들이 어울어진 겨자냉채’

이름하여 깐풍새우 겨자냉채.

비록 제미나이의 초기 설계와는 한참 동떨어진 모습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모임 현장에서 "이 이색적인 조합은 대체 뭐냐"며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던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일요일 아침의 포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AI의 기발한 제안과 독일의 닫힌 마트, 그리고 주부의 절박한 임기응변이 만나 완성된 우리 집만의 '뜻밖의 메뉴'.

올해 설날, 나는 제미나이에게 한 수 가르쳐준 기분으로 떡국 한 그릇을 비워냈다. 역시 주방의 진짜 주인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주부의 손끝에 있는 법이니까."


"이번 설 명절 메뉴로 '깐풍새우 겨자냉채' 어떠신가? 혹시라도 요리 중에 예기치 못한 대참사가 일어난다면 너무 당황하지 마시길. 인공지능도 모르는 '새로운 맛'은 언제나 뜻밖의 사고 속에서 탄생하는 법이니 말이다.


To. 애정하는 독자님들

오랜만입니다, 독자님들! 해피 설날입니다!
그동안 '잠수 명인' 김자까가 소식이 없어 궁금하셨죠? 글쓰기를 잠시 쉬고 있었던 건 아니고요, 사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밀리의 서재 '밀리로드'에서 <독일 댄스 수업보다 힙한 K-요리강습>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거든요! 예전부터 기록해 오던 한국 요리 강습 에피소드들을 정성껏 손질해 한 편씩 올리고 있습니다. 브런치 스토리와는 또 다른 결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고, 긴 명절 중간에 피식 한 번 웃고 싶으실 때 제 새로운 연재처에도 가끔 놀러 와 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ttps://www.millie.co.kr/v3/millieRoad/detail/33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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