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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된 독일집의 겨울 이벤트-2

드라마 응답하라 일구팔팔이 따로 없다.

by 김중희

1층 거실에 있는 온도계가 13도를 가리킨다. 바깥 기온이랑 큰 차이가 없다.

독일의 겨울은 눈 오고 영하로 넘어가는 날들도 있지만 대부분 한국 보다 온도는 높다.

그러나 온도가 그렇다고 춥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뼛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는 더하다고 할 수 있겠다.

햇빛양이 적고 습도가 높아 영상이지만 영상 아닌 듯 한 날씨 덕분에

체감 온도는 훅 떨어지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온 집안에 난방이 꺼지고 온수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 일주일을 넘기고 있다.

집안에서 설거지하다 동상 걸리게 생겼고 아침마다 찬물로 세수하느라 심장마비 오게 생겼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다.

이놈의 답답한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고 하면...

(자초지종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전글 클릭!:100년 된 독일집의 겨울 이벤트-1)


그렇게…

지난주 화요일 우리의 친구 헬빙 아저씨가 다녀 간 후 우리는 동네에 있는 보일러 회사를 뒤지기 시작 했다.

전화 통화 까지도 쉽지 않았으나 통화가 되는 곳마다 짜 맞춘 듯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회사마다 연말까지 공사 스케줄이 빡빡 해서 올해는 새로운 일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이다.

이러다 크리스마스 지나 연말까지 이 상황이 계속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구름처럼 몰려올 때쯤…


드디어 회사 한 군데와 극적으로 연락이 되었다. 자기네도 스케줄상 여유는 없지만

우리의 딱한 사정에 일단 기술자 아저씨를 파견해 주기로 했다.

누가 들어도 이 겨울에 난방 안 돼~~ 뜨거운 물 안 나와~~

난감한 사정 이긴 하지 않은가 말이다.

기술자 아저씨는 우리 집 지하 보일러실을 샅샅이 살피고 이리 재고 저리 재고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는 곧 공사 견적서를 보내 주마고 하며 총총히 사라 졌다.


그런데..

오기로 한 견적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급한 놈이 우물 판다고 주말 지나 다시 보일러 회사에 전화를 했다.

공사를 진행해 줘야 할 기술 팀장이 갑자기 병가를 내는 바람에 견적서 작성 단계에서

일단 스톱이 되었다고 한다. 하루가 급한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어느 날 부분 적으로 난방이 되지 않아 친구인 기술자 아저씨를 모셨고 확인해 본 결과

가스보일러의 온기를 집안 골고루 옮겨줄 온수를 담는 배수관이 고장이 났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배수관에 작은 구멍들이 생겨 물이 새기 시작했고

전체적으로 녹이 슬어 구멍이 크게 났다

즉 배수관 전체를 갈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전까지는 난방도 온수도 사용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일단 공사를 맡아줄 보일러 회사를 찾아야 했고

그 회사에서 뽑은 견적서가 필요했다.

당장에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 와중에 뭔 놈의 견적서 타령인가 하면

그 견적서를 들고 일단 보험회사에 연락을 해서 지원 여부를 확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자동차가 있는 사람은 모두 자동차 보험이 있듯 가정주택 즉 하우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옵션 다양한 건물 보험들을 미리 들어 둔다.

특히나 우리처럼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백 년이 넘은 집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누구나 건물 보험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워낙에 인건비가 비싸고 재료비 또한 천정부지로 해마다 오르고 있어 자비로는 모두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짬짬이 손 보아 둬야 할 작은 공사들은 자비 들여 하지만 큰 공사들은 들어 둔 보험에서 지원을 받아야 간신히 될 만큼 공사 금액들이 크다.)


그럼, 이런 급한 일은 공사를 하고 비용을 청구하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독일은 먼저 서류들이 다 들어가야 한다.

그런 것 없이 절차 생략 하고 먼저 시작했다가는 그야말로 독박을 쓰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일러 공사는 우리가 회사를 먼저 알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시간을 많이 아낀 셈이다.

지난번에 지하 창고에 물난리가 났을 때만 해도 공사 들어가기 전에 물이 샌 이유를 먼저 밝혀 내야 한다고 보험 회사에서 상황 분석을 위해 보낸 회사만 다섯 군데였다

한마디로 절차 따지다 성질 급한 놈은 기다리다 숨넘어가도 이상할 게 없는 동네다



거실 소파 위에 두꺼운 겨울 파카를 껴입고 담요를 돌돌 말고 앉은 남편은

"우리 캠핑 온 거 같다 그렇지?" 라며 해맑게 웃었다.

주방에서 물 주전자 가득 뜨거운 물을 끓이던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재밌냐? 왜 장갑도 끼고 있지!" 라며

옆으로 쭉 찢어진 눈으로 째려보다가 난데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 장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거 아닌가 말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일구팔팔 에서 덕선이가 뜨거운 물 끓여서 머리 감는 장면이 나온다

딱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다.


아파트 보다 가정 주택이 더 많던 그때는.. 번개탄에 연탄불 붙여서 온돌방을 데우던 그때는...

실제로 온수를 끓여서 사용하던 때였다.

마당에 수도꼭지가 꽁꽁 얼지 않게 못쓰는 옷으로 칭칭 감던 그 시절 에는

우리도 마당 한가운데 또는 부엌 귀퉁이에 빨간 고무통 안에 따뜻하게 끓인 물을 섞어 담아 두고

간신히 세수하고 머리 감는 데만 사용하고는 했다.

그마저도 식구들이 모두 학교를 가고 직장을 가야 하는 아침 시간에는 서로 먼저 닦아야 한다고

전쟁터가 따로 없던 때고 말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목욕 가방 들고 동네 공중목욕탕 거북탕을 가던 길에는

겨울이면 호떡 아주머니도 군고구마 아저씨도 만나 지고는 했다.

내친김에 이따가 호떡이라도 부쳐 먹어야겠다.


난방이 안 되는 집안은 그야말로 냉방완비다. 그마저도 1층 거실에 있는 벽난로를 하루 종일 때우면 거실과 주방만 간신히 17도 에서 18도 사이로 올라간다.

하루종일 나무를 땠는데 십팔 도라니 말이다

백 년도 더 된 옛날 집이다 보니 좋게 말해 자연친화적이고 그대로 말해 외풍도 세고 집안에 계단이 많아서 층고도 높다.

집안에서 입김이 보일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때마다 뜨거운 물주전자를 들고 층계를 오갈 수가 없어

때로는 그야말로 냉수마찰을 한다.


그럴 때면 언젠가 유튜브에서 보았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생각난다.

산속깊이 사는 자연인이 계곡의 얼음물 깨고 아 시원하다를 외치며 세수를 하던 장면 말이다.

우린 비록 산속은 아니지만...

밤새 살기 위한 체온으로 간신히 데워진 이불 안을 박차고 나와 냉기 서린 욕실에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면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오며 마치 그 자연인이 된듯한 느낌이 든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며칠 지내고 나니 그마저도 살짝? 적응이 되기 시작한다.


이 겨울 언제나 돼야 우리 집 보일러 공사가 시작되고 다시 난방이 되어 뜨거운 물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짜증과 걱정이 앞서기보다는 왠지 자꾸 웃음이 비죽 비죽 새어 나온다.

집안은 냉기가 가득하고 연신 우아 춥다를 연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밥 해 먹고 아쉬운 대로

뜨거운 물을 끓일 수 있는 전기가 들어온다.

또 실없는 농담을 하며 배꼽 잡고 째려보며 옆구리 쿡쿡 찌를 수 있는 서로가 있으니

일단은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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