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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Jun 21. 2020

 독일 도토리로 만든 시어머니의 묵

브런치X우리가 한식공모전


도토리묵무침은

한국에서 살고 있던 어린 시절 친정엄마는 동네 시장에서 종종 말랑말랑 한 도토리 묵을 사 오시고는 했다. 그 갈색의 묵을 납죽하게 썰어 담고 그위에 초록의 뾰족한 잔 잎사귀가 풍성한 쑥갓 한대와 깔한 향이 코끝에 감돌며 식욕을 돋우는 깻잎 몇 장을 썰어 넣고 싱그러운 오이와 곱게 채 썬 당근과 노란 계란지단 바싹하게 구운 김 가루 내어 올린다. 그리고는 빨간 고춧가루에 간장, 참기름, 파, 마늘, 깨 어우러진 양념장을 솔솔 뿌려준다. 그렇게 매콤 짭짜름한 그리고 도토리 특유의 쌉쏘름한 뒷맛이 쫀득하게 버무려진 묵무침을 양념장 고루 묻혀 가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때는 그 도토리묵의 도토리가 조롱조롱 달려 있는 나무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공원의 아름드리 도토리나무
우리 집 멍뭉이 나리와 자주 산책 가는 길 전체가 도토리나무다. 우리는 이곳을 도토리나무 길이라 부른다.

독일 사람 들은 도토리를...


그런데 독일에 도토리나무가 이 동네도 저 동네도 지천인 거다. 그것도 아름드리나무 들로다 말이다. 길을 지나다니다가도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도 수시로 만나 지는 나무가 도토리나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토리나무가 많아 마을 이름이 Eichendorf 도토리 마을인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독일 사람들은 도토리를 먹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무로는 주로 탁자 또는 서랍장 같은 가구를 만들고 자투리 들을 벽난로 용 장작으로 유용하게 사용한다.

그리고,

도토리 열매는 주워 다가 가을용 데코 소품 들을 만들거나 아이들 만들기 수업용으로 사용한다.


도토리나무는 여름 내내 잎이 짙어지고 무성해 지

가 어느 순간에 연두색 알맹이들이 다닥다닥 달린다. 그러다가 노란 물이 들던 도토리들이 갈색으로 익어 간다. 그렇게 잘 익은 도토리들이 나뭇가지에도 나무 밑바닥에도 수북 해 질 때 우리는 가을 안에 서 있다.

도토리가 바람결에 사람들 어깨 위로, 강물 위로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며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을 사람들은 도토리 비라고 부른다. 

나는, 도토리 비를 맞을 때면 어김없이 시어머니가 독일에 오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수제로 만드셨던 그때의 도토리묵무침이 떠오르고는 한다.


딸내미의 돌잔치


그해는 우리 집 딸내미가 한 살이 되던 해였다.

아들만 내리 셋을 두셨던 시어머니는 딸을 그리도 원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시어머니의 큰아들인 우리도 첫아이로는 아들을 낳았고 둘째, 셋째 동서들도 계속 아들만 낳았다. 한마디로 그때까지 우리 집안에는 딸이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우리 딸내미가 태어났다. 멀리 있어 손녀의 얼굴도 사진으로만 만나 보셨던 시어머니는 그 귀한 손녀도 너무 보고 싶고 첫돌도 손수 해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천리 길도 마다 안고 비행기 타고 독일까지 날아오셨다.


원래도 섬마을에서 솜씨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아낙네였던 시어머니는 그 어느 때 보다 들떠 계셨다.


우리는,

첫째 때는 한국에 아이엠에프 사태가 터져서 그때까지 부모님 장학금을 받고 있던 터라 아기 기저귀와 분유값 외에는 모든 지출을 아껴야 했다. 그래서 돌잔치는 못해주고 한국에서 받은 돌잡이 한복을 입히고 집에서 간단히 상 차려서 사진만 찍었다. 그래도 딸내미 때는 남편이 연구소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어서 어떻게든 작게 라도 돌잔치를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잔치를 하려고 보니 그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기숙사에 같은 한국 유학생 가족도 10가구 남짓 살고 있었고 독일 친구들까지 초대할 사람만 100명은 족히 되는 거다.

우리 집안은 13촌 까지도 가깝다고 이야기하시는 시골의 장손 며느리 이자 큰손인 어머니는 일이 무섭지 않은 분이다.

그러나 그 당시 가난한 유학생 부부 에게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한식으로 먹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좋은 일 앞두고 부부 싸움도 꽤 했었다. 남편은 가계를 책임지고 있으니 무리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나는 첫째 때도 못해 주었던 돌잔치 어머니까지 와계시는데 기왕이면 잘하고 싶었다.


물론 그 당시 유학생 사회에서 서로 이사 또는 잔치가 있으면 음식 하나 해 가는 정 많은 품앗이 문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당신이 오셔서 돌잔치를 해 주시는 것이니 이웃들 에게 부담 주지 않고 우리가 모두 준비하기를 원하셨고 우리 생각도 그랬다. 그리고 어머니는 당신이 손녀딸 돌잔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주시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유학생활도 부모님 도움으로 했고 이제야 알아서 살게 되었는데 딸내미 돌잔치한다고 또 덥석 도움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은 내 기준에서는 좀 짜게 예산을 잡고 일단 아끼고 보자 했었고 남편 기준으로 나는 무리해서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 고 우기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시시 꼴랑 하게 사소한 것으로 이건 사야 한다, 안 사도 된다 하며 시장보다 대판 싸운 날이었다.

최선을 다해 표 안 내려했지만 눈치 빠른 어머니가 모르실리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 둘을 불러 앉혀 놓으시고 즐거운 우리 집이라는 노래를 서로 마주 보며 부르게 하셨다.

재밌는 것은 좀 전까지 서로 별것 아닌 것으로 얼굴 붉혀 놓고도 마주 보고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자니 민망하고 웃겨서 부르는 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어머니의 즐거운 우리 집 노래 덕분에 화해를 2배속으로 빨리한 우리는, 남편은 딸내미의 돌잔치를 위해 쓸 예산을 조금 더 올리고 나는 그를 위한 메뉴들에서 조금 더 아껴 보기로 했다.



시어머니의 독일산 수제 도토리묵무침


그러던 어느 날....

딸내미 유모차에 태워서 어머니와 산책할 겸 큰아이 유치원을 데려다주고 오던 길이었던 것 같다.

호수가 있던 그 길 내리 도토리나무가 줄 지워 있었다. 어머니는 그 나무 밑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아이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이야기하셨다. "우리 돌잔치할 때 도토리 묵 도 만들어 보자! 독일 사람들은 이 좋은 걸 왜 그냥 두나 몰라 "


그때까지, 도토리 묵은 요렇게 생긴 도토리의 가루로 묵을 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중에 판매되는 묵가루로 만든다고 생각했지 한 번도 도토리를 주워다가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 어머니와 함께 딸내미 유모차 뒤에 달린 주머니가 가득 차게 도토리를 주웠다 그리고 방안 한편에 도토리를 펴서 잘 말렸다. 어머니는 그 마른 도토리 껍질을 톡톡 소리가 나게 까서는 작은 알갱이들을 보여 주셨다. 이애들을 말려서 잘 갈아 가루를 만들고 그 가루로 묵을 쑨다는 설명과 함께,...

그런데... 그 아몬드보다 작은 알갱이들이 마르기는 잘 말랐는데 가루를 내려니 집에 있는 믹서기 칼에 턱 하니 박혀서는 좀처럼 가루가 되어 주지 않았다.


해서 우리는 남편이 일하던 연구소에서 함께 연구원으로 일하던 친구의 삼촌이 하신다는 독일 방앗간을 찾아갔다. 말린 도토리를 들고서...

마음씨 좋아 보이는 독일 아저씨는 자기가 30년 방앗간을 하며 도토리는 갈아 본 적은 없다며..

조금 난감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에 포기할 어머니가 아니시다. 당신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믹서기도 없이 맷돌로도 모두 잘 갈아 쓰셨다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한국 도토리보다 훨씬 딱딱한 독일 마른 도토리를 물에 담갔다가 뺏다 해가며 물 양을 조절해서는 결국에는 갈아 내셨다.


그런데....

그 도토리로 묵을 쑤니 쓴맛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몇 날 며칠을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무언가 연구를 하듯 묵의 농도를 조절하셨다.  

그렇게 태어난 어머니의 도토리묵무침은 독일에서 도토리 직접 주워다가 말려서 첨부터 끝까지

백 프로 수제로 만들어낸 오리지널 수제 도토리묵이었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듬뿍 골고루 들어간 도토리묵의 맛은 진하고 부드러웠다.

그 풍미는 시중에 파는 가루로 해서는 나오지 않는 아주 특별한 맛이었다.


돌잔치하던 날 시어머니의 도토리묵무침은 어머니의 특제 불고기 옆에 당당히 자리를 하고 모든 사람들의 감탄사를 자아냈다.

그렇게,

그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어머니의 도토리묵무침은 우리 동네 유학생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그때 돌잔치를 했던 딸내미가 올해 스무 살이 된다. 지금처럼 핸디 성능이 좋았다면 어머니의 도토리묵 연구? 과정을 모두 동영상으로 담아 두었을 텐데 아쉽다.

지금 남아 있는 사진으로는 화질이 세월을 담아 저 잔치상 어디쯤 도토리묵무침을 놓아두었지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요즘 흔한 그 인증숏 한 장 없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만들어낸 도토리묵은 그날 함께 했던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았다.

조금 있으면 도토리나무에 연두색의 도토리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처럼 갈색의 잘 익은 도토리가

가을과 함께 우리 곁으로 올 것이다.

이번엔 우리도 도토리 주워 그때 어머니처럼

특별한 맛의 도토리 묵을 만들어 볼까?


한식은 손이 많이 간다 그 과정 과정마다 알맹이가 들어차듯 맛의 깊이가 달라진다.

나는 그 깊이가 맛을 좌우하는 엄마 들의 손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정성이 덧입혀진 엄마의 손맛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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