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노유니아 | 지도교수 / 정형민
근대 디자인 개념과 양식의 수용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유학생 임숙재(任璹宰)를 중심으로-
지도교수 정형민
2009년 2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미술이론 전공
노유니아
목차
국문초록
그림목록
Ⅰ. 머리말
- 임숙재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영향이다. 미술과 공예를 부국강병, 식산흥업(殖産興業)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일본에서는 공예품을 완성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도안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대두되었고, 많은 화가들이 도안 작업을 병행하거나 직업적인 도안가로 전환하였다.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기의 도안가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양식은 아르누보였다. 그것은 아르누보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최첨단의 양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모티프로 한 데서 오는 아르누보 자체가 갖는 대중친화성, 명료한 표현, 장식적인 통일성 등의 특징이 도안화의 작업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유럽에서 발생한 아르누보 양식은 식기나 가구 등 공예품뿐만 아니라 건축과 실내장식, 패션에까지 확대되어 생활공간 전체를 차지하는 장식미술로 기능하였지만, 일본과 한국에 수용된 아르누보는 주로 평면장식에 국한되어 나타났다.
제품의 평면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그 기초 작업으로 ‘도안화(圖案化)’의 과정이 필요하다. 실재하는 자연물-꽃, 식물의 잎, 새나 여성의 신체 등-의 3차원적인 도상을 2차원적인 평면에 표현함에 따라 도상의 평면화, 패턴화가 행하여지는데, 이러한 도안화의 과정이 일본과 한국의 초기 디자인 개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근대 초기 도안의 개념은 ‘공예품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형태와 기능, 문양, 재질 등 일체를 결정하는 일’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전적 의미로 ‘미술 작품을 만들 때의 형상, 모양, 색채, 배치, 조명 따위에 관하여 생각하고 연구하여 그것을 그림으로 설계하여 나타낸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도안’은 오늘날 사용되는 ‘디자인’에 비해서 평면의 설계도에 한정되는 느낌이 강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임숙재의 활동 당시 일본에서는 ‘디자인’의 번역어로 ‘도안’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였고, 따라서 도안이 곧 디자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2~3p]
- 그렇다면 한국 근대 디자인사의 출발점은 언제쯤으로 설정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의 근대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는데 내재적이며 자율적인 전개양상에 초점을 둔 자아의식의 발로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시대적 변화를 논한 서구문물의 수용이 그것이다. 순수미술의 경우에는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근대적인 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부터로 근대 시기 설정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수렴되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의 경우에는 문화·예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동시에 산업의 발전과 직결되는 경제적 측면을 지닌 디자인 자체가 갖는 속성 탓에 그 기준을 정하는 일이 더욱 더 어려운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나 근대 유화가들이 유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기법과 매체를 익히고 소화하는 데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공예가들에게 있어서 근대는 공예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 정의와 새로운 외래적 미학이 서로 맞물려 있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재된 개념이 전통과 근대(현대), 공예와 디자인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낳는 원인이 되었으며 공예사와 디자인사를 별개로 분리하여 서술하고 있는 현실이다. [4~5p]
Ⅱ. 근대 디자인 개념 및 양식의 형성 : 일본
1. 일본 근대 디자인 개념의 형성
1) 식산흥업 정책과 도안 개념의 형성
-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술과 공예에 관한 용어는 전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에서도 메이지 시기 이전에는 회화나 조각, 그 밖의 공예품을 구분해서 부르는 명칭이 없었다. 이러한 용어의 구분은 서양과 적극적으로 문물 교류를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1873년 빈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국가 단위로는 처음 참가하였는데, 그 관련문서에서 ‘미술’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에 대한 구분이 시작되어, 순수미술(Fine Art)에 대응하는 단어로는 ‘미술(美術)’이, 응용미술(Applied Art)에 대응하는 단어로는 ‘공예(工藝)’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공예’는 산업 생산품에 반하여 손으로 만든 전통 제품이라는 의미를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의 디자인에 대응하는 용어로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도안(圖案 혹은 圖按)’. ‘의장(意匠)’이 함께 사용되었다. [10~11p]
- 일본정부는 빈 만국박람회(1873)에 참가할 물품을 선정하기 위해 독일인인 바그너(Dr. Gottfried Wagner, 1831-1891)의 자문을 구했는데, 그는 기계 생산 제품보다 일본 전통 공예품을 전시할 것을 권유하였다. 박람회에 출품된 일본 전통 공예품들은 당시 서구사회가 일본 미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국적인 동경심과 기대감을 충족시키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메이지 정부는 박람회를 통해 자국의 공예픔 수출 가능성을 확인하였고, 수출을 위한 공예품 제작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수출용 공예품의 질을 개량시키고 대량생산에 적합한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도안의 사용이 필수적이었다. 숙련된 소수의 장인들에 의한 수공업 생산체제가 수출품을 위한 기계생산체제로 들어서게 되면서 다수의 단순노동자들에게도 제작과정을 지시할 수 있는 일종의 매뉴얼(manual)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순수 회화 작가들을 공예품 도안 제작에 적극 참여시키고 도안집을 편찬하는 등, 도안의 질적 향상을 위해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분업화에 의한 설계와 가공의 일이 나뉘고, 설계 부분을 담당하기 위한 도안의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11~12p]
2) 도안의 보급과 확산
- 철저히 관의 주도하에 식산흥업 정책의 수단으로 확립된 메이지 정부의 도안 개념은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사회 일반으로 널리 보급, 교육되어 다이쇼(大正) 시대에 이르면 도안과 도안가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13p]
- 일본의 3차 산업은 1897(明治30)년에서 1914(大正3)년까지의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동안 약 3.5배의 규모로 급성장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3차 산업의 발달은 곧 자본주의와 광고 산업의 발달을 의미한다. [15p]
3) 메이지기의 디자인 교육 -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중심으로
- 동경미술학교에 도안과가 설치된 것은 1896(明治29)년이다. 미술학교의 개교 당시에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학제 구분이 없었으나, 동안의 교육은 종합교육의 일환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서양에서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구별하여 화가와 도안가를 분리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일본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작가가 좋은 도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하여 일본 고대의 방식을 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16p]
- 도안의 실습수업은 ①임모(臨模) (일본의 우수한 전통 작품을 모사해서, 고전적인 도안의 지식을 얻고, 나아가 그것을 응용하여 새로운 도안을 창작하는 코스), ②사생(寫生)(동식물, 골동품, 장식하는 물건 등을 일본화법으로 스케치하는 코스). ③신안(新案)(사생한 것을 모양화시켜서 새로운 형태의 도안을 제작하는 코스)의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7~18p]
- 창작 도안의 강조는 당시 일본 도안계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츠다 세이후(1880~1978)는 종래의 전통적인 모양을 모방하거나 다른 사람이 만든 도안을 단지 찍어내는 데서 그쳤던 제작 태도를 직공주의(職工主義)라고 규정하고 부정하기에 이른다. 작품을 제작하는 개인의 감각, 의지에 의한 예술성이 풍부한 도안의 창작을 주장했던 것이다. [20p]
- 이러한 경향은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일어난 도안개혁과 관계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럽에 불었던 자포니즘(Japonism) 열풍과 함께 인기를 끌었던 일본공예품은 1893(明治26)년 시카고 만국박람회부터 그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하였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이르러서는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출품이라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적이기만 한 일본 공예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등 판매량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한편, ‘아르누보의 승리’라고 평가될 만큼 아르누보의 인기는 최절정에 달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일본인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미술 관계자들은 한 결 같이 공예품의 도안 개혁이 급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일본 국내의 디자인 지도는 ‘옛물건(故物)의 모사’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21~22p]
2. 근대 초기 디자인 양식 - 일본의 아르누보
1) 아르누보의 수용
- 아르누보는 나라마다 명칭과 그 양식의 해석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지만, 디자인사에 있어 최초로 세계 동시적으로 나타난 영향력있는 사조였다고 평가된다. 아르누보의 근언은 1880년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럽의 디자인은 특정한 양식을 갖지 못한 채, 이전 시대 양식의 부활과 절충을 반복하는 일명 역사주의(Historimus, Historicism)라고 불리는 디자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화로 인한 대량 생산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영국에서 비평가와 미술가들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수공예 기술의 쇠퇴에 불만을 느꼈고, 한때는 그 자체로 의미와 기품을 지녔던 장식물이 기계에 의해 값싸고 천박한 싸구려 복제품으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에 윌리엄 모리스(Willam Morris, 1834~1896)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등은 미술과 수공예의 철저한 개혁과, 싸구려 대량 생산물 대신 수공예품이 자리를 되찾기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각각의 재료가 갖고 있는 가능성은 살리고 새로운 감각의 디자인을 나타낼 수 있는 ‘신(新)미술’을 갈망했다. 이러한 미술공예운동의 정신은 아르누보 작가들에게도 이어졌다. [23~24p]
- 이러한 아르누보의 교육과 보급의 결과는 1903년 내국권업 박람회에서 바로 드러나게 되는데 전시된 도자기, 텍스타일, 그래픽 작품들의 대부분이 아르누보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1913년에 시작된 농상전의 제1회 도록을 보아도 이러한 경향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아르누보가 탄생한 유럽에서는 1908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작품에서는 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격히 쇠퇴한 반면, 일본에서는 아르누보의 영향력이 장기간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매년 1-2회 이상의 아르누보 전시를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까지도 그 관심이 귾이지 않고 있다.
사실, 아르누보는 그 탄생 단계에서 우끼요에와 같은 일본 전통 미술의 영향을 받았던 미술양식으로 일본인들의 구미와 묘하게 부합하는 데가 있다. 게다가 자연물을 평면화하여 문양으로 만드는 일본식 도안 장식화 기법에 잘 맞아떨어졌다. 또한 아르누보는 주제구성에 있어 양식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기 쉽고, 동시에 명료한 표현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적합하였으므로, 도안을 표현하기에는 매우 효과적인 양식이었다. [27~28p]
2) 일본의 아르누보
가. 일본식 아르누보의 성립 - 전통과의 절충
- 원래 아르누보는 국가나 인종의 문화적 배경을 초월해 국제적 보편성을 표현한 장식 양식인 동시에, 각국의 전통 장식의 부흥과도 관련이 있었다. 아르누보의 유행이 프랑스에서는 로코코(Rococo)의 부흥[그림 21, 22]으로, 영국에서는 셀틱(Celtic)의 부흥[그림 23]으로 해석되기도 했던 것과 같이, 각국에서 전통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일본에서는 림파가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림파의 대담한 생략과 화면 구성, 화려하고 장식적인 색조, 곡선과 도상 표현 등은 일본의 근대 도안가들에게 ‘일본적인 도안’을 창출할 수 잇는 원동력이 되었다. [30p]
- 이렇게 림파의 요소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재해석되어 일본 근대 디자이너의 선구자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작품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까지 이러한 영향이 이어지게 되어, 유럽의 아르누보 양식에 일본 전통의 요소들을 적절히 절충한 일본식 아르누보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이후의 작가들은 주로 전통적인 소재를 모티프로 차용하여 도안을 제작하게 되는데, 무사도 문장(紋章)에 자주 등장하는 담쟁이와 우산 등의 좌우 대칭 형태[그림 42]나 병풍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붓꽃[그림 43], 십이지시네[그림 44] 등이 그 예이다. [32~33p]
나. 아르누보 양식의 확산
- 한편, 아르누보 양식이 일본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된 것은 책과 문학잡지의 표지 등을 통해서였다. 그 당시까지는 전문적인 디자이너나 삽화가와 같은 직업이 세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의 삽화나 표지작업은 화가들의 역할이었다. [33p]
- 한편 자본주의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광고가 발달하게 되는데, 일본에서 광고의 필요성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백화점이었다. 일본 디자인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쓰코시 백화점의 광고물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미인화 포스터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다른 백화점과 제품 광고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미쓰코시는 미인화를 자신들 광고의 아이덴티티로 삼고, 1911년 미인화 공모전을 열었다. 대회의 1등은 하시구치 고요에게로 돌아갔는데 그가 제작한<미인화 포스터>[그림 50]는 아르누보의 화려한 색채를 잘 표현해내기 위해 무려 35개의 판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원래 일본화를 전공했고, 미인화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이 포스터에서 일본의 전통과 서양에서 들여온 새로운 미술 양식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여인은 그녀의 손에 들린 책에 그려진 전통적인 기모노와 대조적으로 현대적인 패턴의 기모노를 입고 있다. 벽지와 가구에서도 일본 전통의 패턴과 아르누보 패턴의 조화를 찾을 수 있다. 벽지의 꽃 패턴은 일견 일본 전통의 것 같지만, 화려한 벽지의 사용은 일본이 아닌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동양적 취미에서 기인한 것으로, 윌리엄 모리스 등이 즐겨 제작한 반복적인 꽃 패턴의 벽지[그림 51]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아르누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인이 앉아있는 가구로, 가구의 표면에 장식되어 있는 꽃과 잠자리 무늬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유럽 가구나 액세서리, 책의 삽화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티프[그림 52, 53]이다.
다이쇼기부터 쇼와(昭和)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약한 디자이너 스기우라 히스이는 1908년부터 27년간 미쓰코시 백화점의 디자이너로 근무하면서 포스터, 『미쓰코시 타임즈』, 『미쓰코시』등의 PR지, 광고 인쇄물을 제작하였는데, 당시 그 영향력은 엄청나서 일본초기 상업미술계에는 화려한 아르누보 스타일을 ‘히스이식(式) 도안’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35~36p]
- 스기우라 히스이의 대표작인<미쓰코시 백화점 봄 컬렉션>[그림 54]은 히스이식 아르부노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략- 하사구치 고요의 미인화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실내에서 기모노를 입은 채 책을 보고 있는 여성을 그린 작품이지만 고요의 여성은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기모노의 주름, 허리에 맨 띠의 질감 등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묘사된 반면 히스이의 여성은 훨씬 더 평면적이고 장식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몇 개의 선으로 생략해서 표현한 여인의 얼굴과 옷의 주름은 도식화되어 전혀 입체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기모노나 배경의 무늬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어떤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장식적인 도안을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37~8p]
- 미쓰코시 백화점과 함께 일본 아르누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세이도의 화장품 광고이다. 시세이도는 일찍부터 시각 광고물을 통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타이포그래피, 로고, 포장지 등의 통일을 꾀했다. 이때 아르누보는 여성적이고 화려한 특징과 유럽의 최신 유행 양식이라는 점으로 인해 젊은 여성을 상대로 하는 화장품 광고에 매우 효율적이었다. 기관지 『시세이도 월보』의 로고[그림 60]의 배경이 세심한 당초문양으로 그려진 것이나 제품의 패키지와 광고에 통일적으로 사용됐던 로고[그림 61, 62]가 자잘한 꽃이나 식물의 선묘와 S자의 곡선을 강조한 타이포그래피로 구성된 것 등에서 아르누보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38~39p]
Ⅲ. 한국 근대 디자인 개념 및 양식의 형성
1. 한국 근대 디자인 개념의 형성
- 우리나라 역시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공예를 비롯한 미술 전체가 부국강병의 기술로서, 도안은 식산흥업의 수단으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도안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근대적인 교육기관들이 잇따라 설립되어 제품 제작과 전문적인 도안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 )와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를 들 수 있으나 식민 통치하라는 현시 ㄹ속에서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지속되지는 못했다.[41p]
- 따라서 1920년대에 이르게 되면 한국인을 위한 공예, 디자인 전문 교육기관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다 해방 이후,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도안과와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에 도안 전공 과정이 개설되면서 주체적인 디자인 교육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소수의 일본 유학생 이외에는 전문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은 디자이너가 존재하지 않았고, 순수미술을 전공한 화가들이 디자인 영역의 일까지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1931년, 임숙재보다 3년 늦게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이순석이 귀국하였고, 연이어 이병현(李秉玹, 1911~1950)(일본미술학교 도안과 1934년 졸업), 한홍택(동경도안전문학교 1937년 졸업,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회화연구과 1939년 졸업)등의 동안을 전공한 유학생들이 귀국하였고, 서울대학교 도안과에는 이순석과 이병현이, 이화여자대학교 도안과에는 김재석(金在奭)(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도안과 1936년 졸업) 등이 교수로 재직함으로써 일본 유학생들은 근대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44~45p]
- ‘도면’의 단계를 벗어나 ‘디자인’ 단계로서의 도안 개념이 사회적으로 보급된 것은 각종 광고 활동을 통해서였다. 1910년 한성광고사를 필두로 1921년 백영사(百榮社), 1922년 개벽사의 상공미술도안부라는 광고대행사의 활동이 있었으며, 1920년대에 창간된 각종 신문들은 광고가 실릴 지면을 제공하여 사회에 보급하는 창구의 역할을 수행했다. 뒤에서 살펴볼 임숙재의 국내 활동 역시 주로 『동아일보』를 통해서이다. 또한, 각종 도안 현상공모전이나 강연을 통해 일반인들이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하였다. [46p]
2. 한국 근대 디자인에 수용된 양식
- 근대화와 사회 개혁에 성공하고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선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서 디자인이 성장할 수 있는 산업적인 배경과 소비문화과 제대로 성립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각인쇄물에 한해서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디자인 양식은 유학생과 같은 이들의 교류, 책과 잡지와 같은 서적, 광고 등을 통해 별다른 시차 없이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인쇄기술의 수준이나 비용 상의 문제로 인해 일본에 비해 화려한 컬러 인쇄물이 수는 적었겠지만 당시 경제 활동 인구의 대부분이 식민지 교육으로 인해 일본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발행된 인쇄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발행된 인쇄물도 널리 유통될 수 있었다. [47~48p]
- 초창기 국내 잡지 중에서 디자인이 뛰어난 것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년잡지 『소년少年』지가 꼽힌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간을 맡았던 『소년』(1908)의 창간호 표지[그림 72]는 소년이라는 제호를 둘러싼 녹색의 월계관과 검정색의 일목요연한 가로세로의 문자 레이아웃, 분홍색의 외곽선이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13~14년 신문관에서 발행한 육전(六錢)소설 총서[그림 73]는 한국의 시각인쇄물에도 아르누보의 수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진귀한 예이다. 식물을 모티프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유려하게 그려낸 문양은 확실히 아르누보의 영향으로, 동시대 다른 서적에 비해 모던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유럽의 아르누보를 직접 수용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일본 잡지나 포스터, 광고물등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의 디자인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48~49p]
- 1920년대에는 많은 문학 단체가 결성되었고, 그들이 발간한 동인지에 실린 표지와 삽화 디자인은 우리나라에 수용됐던 근대 디자인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잇다. 산업의 발달 정도와의 상관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문학계와 순수 미술계에서는 사상면에서 좀 더 깊고 다양한 사조를 수용할 수 있었고, 그들이 흡수한 새로운 양식은 동인지의 표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일본 유학생들의 문예단체인 ≪토월회≫ 계열의 김기진, 김복진, 연학년과 ≪백조≫의 안석주, 이상화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파스큐라PASKULA≫는 잡지 표지, 신문소설의 삽화, 만화 등을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큐비즘, 구성주의 등의 영향이 수용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김복집이 장정한 『문예운동』의 표지[그림 74]나 안석주가 장정한 『대중공론』의 표지[그림 75]는 타이포 그래피를 기본으로 하여 수직과 수평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그들이 모델로 삼고 있던 일본의 전위 그룹 ≪마보MAVO≫가 발간하던 동명의 잡지 『마보MAVO』의 표지[그림 76]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베를린 유학을 경험한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 1901~77)가 주축이 되어 이끌었던 마보는 표현주의, 미래파, 다다, 구성주의 작가들과 교류하였고, 따라서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의<메르츠 마티네Merz Matinéen>리플렛[그림 77]과 같은 다다의 스타일이 일본을 통해 국내의 잡지까지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인들의 운동은 작가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의식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제의 혹독한 검열과 작가들의 개인적 전환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었다.
시인으로 알려진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37)은 원래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미술학도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의 건축』 지의 표지 현상공모에서 1등으로 입선하기도 했다. [그림 78] 모던한 양식의 타이포그래피와 기하학적인 구성은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다다적 경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표제어 朝鮮과 建築 사이의 ‘의’자의 한글 한 획 한 획을 분리하여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데서 나타나는 추상성을 그 당시의 인쇄물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50~51p]
- 한편, 공예계의 경우에는 완전히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공예부가 설치되었고, 선전의 심사위원들은 모두 일본인 공예가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자연스레 선전에 출품하는 작가들로 하여금 일본인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는 일본풍의 공예품을 제작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선전은 일본풍 공예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유학생 외에 또 다른 하나의 통로로 작용하였다. [51p]
- 이상과 같이 한국의 근대 디자인에 나타난 양식들을 살펴본 결과, 일본에서 아르누보나 아르데코가 유행한 것처럼 특정한 사조가 선풍적으로 유행하거나 한 시대를 풍미하지는 못했으나, 의외로 다양한 사조와 운동이 수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학계와 순수미술계를 넘나들며 잡지와 동인지를 무대로 다양한 사조를 실험하였고, 작가를 알 수 없는 여러 작품에서도 적어도 일본이 서구의 사조를 수용한 것 만큼은 큰 시차 없이 그 양식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사조의 바탕에 깔려있는 사상적 내용들까지 이해했었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나, 1920년대 문학계에 나타난 프로 문학, 낭만주의, 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시도들로 미루어 볼 때, 어느 정도 수준의 사상적인 이해가 선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2p]
Ⅳ. 임숙재의 디자인 개념 및 작품 분석
1. 임숙재의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유학시절
1) 임숙재에 관한 사항
2)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교육과정
- 임숙재가 입학한 1923(大正12)년 동경미술학교규칙에 의하면 당시 동경미술학교의 학과는 일본화과, 서양화과, 조각과, 건축과, 도안과, 금공과(金工科), 주조과(鑄彫科), 칠공과(漆工科), 사진과를 5년제의 본과로 각 전문의 기술가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도화사범과는 3년제를 사범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의 도화교원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동경미술학교의 학제는 입학했던 4월부터 7월까지는 예비과정으로, 실제 1학년이 되는 것은 9월의 신학기로부터로 그 후의 4년간이 본과, 남은 9월부터 다음해의 3월까지는 졸업제작기로 짜여 있었다. 예비과 시기에는 도안과 이외에도 금공과, 주조과, 칠공과, 사진과이 공예부 학생 전체가 다 같이 데생과 회화의 기초적인 교육을 받았다. [61p]
- 그 외에 시마다의 도안관을 알 수 있는 수단으로는 「공예도안의 장레ㄱ라고 제목붙인 강연록(1919)이 있는데, 그는 이 강연에서, 공예도안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어서, 도안 제작 시에는 각각의 특징을 혼동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 미술공예도안(美術工藝圖案)
· 우리나라[일본]의 국풍을 현저하게 표현한 것.
· 각 제작자의 독특한 기능이 발전된 것. (모방은 불가)
· 지식계급, 감식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작, 유행이나 신기함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 그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
◇ 보통공예도안(普通工藝圖案)
· 일반인의 구매심을 일으킬만한 것.
· 형, 모양, 색채 등이 새롭고 유행을 잘 야기하는 것.
·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에 적합한 제작법의 도안으로 된 것.
· 손이 덜 들어 합리적인 가격이 될 수 있는 것.
[64p]
- 이를 통해 1920년대까지는 동경미술학교의 도안 교육이 여전히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구성 단계에 머물렀던 점과 아카데미즘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인해 장식품으로서의 미술공예 개념에 그쳤고, 제작하는 물건이 가지는 형태의 기능이나 산업적 측면을 고려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학생들까지도 느끼고 있는 모순에 대해 도안과의 수업 내용은 각종 공예의 현장과 관련성이 낮아 실제 업무에 적응할 수 없는 이른바 ‘탁상공론 도안의 양성에만 힘쓰고 있다는 강한 비판이 제기되어 과의 내외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68p]
- 사토는 가장 급무인 것은 ‘고전에 의한 제작방면’을 담임하는 자가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육이 편중된 경향이 있으니, 도안과의 ‘현대장식에 의한 제작방면’을 가르치는 교수진의 주도성을 발휘하여, 전자와 후자에 동등한 비중을 두어 교육을 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자연물을 그대로 사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하는 차원의 문제로 발전시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도안 제작에 있어 재료, 입체와 조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의복, 주거, 생활양식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수업의 신설을 주장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렇게 유럽의 제도를 시찰, 참고함에 있어서도 이전까지는 영국의 제도가 중심이 됐던 것에 반해 사토 카조의 보고서는 주로 독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작성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럽에서도 장식을 위주로 햇던 아르누보가 쇠퇴하고, 기능주의 디자인 사조가 힘을 얻으면서 디자인 운동의 중심이 영국, 프랑스에서 독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시의 적절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70~71p]
- 이렇게 동경미술학교가 디자인계의 각종 개혁에 맞추어 변화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설립 초기부터 이어진 국수주의적이고 아카데믹한 성격이 강했던 학교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는 없었다. [73p]
2. 임숙재의 디자인관과 귀국 후 활동
- 그는 도안을 “우리 의식주에 관한 제반 물건과 기물에 대하여 자기 두뇌에 착상되는 형상과 문양, 색채 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라 하여, 비교적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는 한편, “도안은 순수미술을 적용해 제반 공예미술로 인도해주는 소개물”이라며 실용성을 넘어서 예술성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도안 개념을 피력하였다. 하지만 도안 그 자체는 순수미술 작품도 아니고, 제작된 공예품도 아닌, 일종의 제품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통해 도안화(圖案畵) 그 자체에서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안을 통해 제작될 물건의 예술성을 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도안을 제작하는 목적으로는 “용도가 적합해야 할 것, 미관의 색채를 표출해야 할 것, 실물을 제작하기가 용이하고 간단할 것”, 즉 도안을 제작할 때는 합목적성(合目的性), 심미성(審美性), 상용성(商用性)의 세 가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오늘날의 디자인 개념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임숙재가 근대적인 디자인 개념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7p]
- 모리스는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근대예술의 열등함, 예술 일반의 쇠락, 일반 대중의 악취미 등이 하나의 사회적 병환의 징후라고 하는 존 러스킨의 사상을 철저히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사회를 그대로 두고 예술과 취미를 개선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통찰하였다. 그는 예술의 운명과 사회적 운명과는 굳게 연결되어 있다며, 예술이 보다 올바르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형태의 개선을 꾀해야 하며, 예술의 방향 역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쪽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78p]
- 임숙재가 유학하던 당시의 일본은 1913년 다이쇼 정변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경기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중간 계급의 수가 늘어났다. 이와 같은 민중의 대두 속에서 1916년부터 민중예술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야나기 무네요시 역시 ‘민중’ 개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상 형성 초기단계의 그는 천재와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엘리트주의자였으나 1920년대 들어 중국과 한국의 미에 대항할 수 있는 일본의 미를 찾고자 중세 고딕 미술에 착안하면서부터 ‘민중’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빈번하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6년 「일본민예미술관설립취지서日本民藝美術館設立趣旨書」에서는 전에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던 민중의 일상잡기(日常雜器)에 담긴 아름다움을 높이 끌어올려 그러한 ‘게테모노(下手物, 무명잡기)’를 민중적 공예, 즉 ‘민예(民藝)’로 규정하면서 아름다움이 민중과 만나고 일상의 벗이 될 때가 올바른 시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80p]
- 그런데 윌리엄 모리스나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한계는 대중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면서도, 실제 현장에서 제작해 낸 공예품은 결코 평범한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없는 고가품이었다는 데 있다. [81p]
- 서류상의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으나, 유가족에 의하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실력자로 이름이 알려진 임숙재는 귀국하자마자 그 해 경복궁에서 열릴 박람회의 광고탑[그림 97,98참고] 제작권을 따냈다. 그는 경복궁부터 용산까지 세워질 광고탑 제작 자금 확보를 위해 부유했던 친척들에게서 돈을 빌렸는데,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지방을 전전하게 되었고, 경남 합천에서 전공과는 무관한 보험 회사를 운영하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85p]
3. 임숙재의 작품 분석
- 한국의 전통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호랑이나 사슴 등, 한국적인 소재를 사용한 것은 임숙재 뿐만 아니라 십장생이나 사슴 소재를 즐겨 그렸던 이순석[그림 101]이나 한복 입은 인물상을 즐겨 그렸던 한홍택[그림 102], KOREA라는 글자에 수복길상(壽福吉祥) 사상이 담긴 전통적 소재를 그려 넣은 이병현[그림 103]등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유학한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전통 소재의 사용을 유럽 사조와 한국 전통의 절충적인 시도로 평가하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이 도안 작품에서의 소재 선택에 있어서는 일본미술의 영향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사실, 호랑이와 사슴은 카노파나 코린, 소타츠 등의 림파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소재로, 접시와 같은 원형의 공예품을 위한 코린의 『원형도안집』에 실린<싸리나무와 사슴>[그림 104]는 식물 앞에 사슴의 측면도를 바치한 구성이 임숙재의 도안과 매우 흡사하다. 코린은 이 외에도 사슴을 소재로 한 도안을 다수 제작하였는데, 사슴 그림으로만 구성된 도안집 『사슴도안 밑그림』[그림 105]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약이나 도장 등을 넣어두는 작은함에 그려 넣을 도안집으로 여러 자세의 사슴 도안이 좌우 대칭으로 실려 있다. 코린 등 림파 화가의 영향을 받은 아사이 추의 도안집에서도 비슷한 도안[그림 106, 107]을 발견할 수 있다. [86~87p]
- 각 면의 분할 구성은 전통의 대칭 형식을 벗어나 있는데 이것에 관해 임홍순은 “황금분할의 비례를 갖고 제례의 장 구성형식을 벗어난 현대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대담한 프러퍼션”이라고 평가하였으나 사실 이러한 비대칭 형태는 일본의 전통적인 목가구나 실내 장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나 대한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책장[그림 114, 115]은 엄격한 대칭구조가 기본으로, 순수한 기하학적 조형미와 안정감을 추구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에 비해 일본 목가구[그림 116]는 비대칭 구조를 지닌 것이 많고, 장식 문양에서 나타나는 사실주의적이고 회화적인 경향이 그 특징이다. 한편, 비대칭 구조는 일본 전통 가옥의 실내장식인 도코노마의 구조[그림 117]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 전통 사랑방의 가구 배치나 실내 장식[그림 118]이 엄격한 대칭 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볼 때, 이러한 비대칭 구조는 일본 유학을 통해 습득된 경험이 발현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임숙재 뿐만 아니라 근대 목공예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나전 목가구[그림 119, 120]나 박성삼(朴星三, 1907~87)이 해방 이후 제작한 책장[그림 121]에서까지도 이러한 비대칭 구조의 영향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89~90p]
- 또한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전통 공예품이 아닌 시계는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과 같은 모양을 갖고 있는데, 새겨진 문양이 월계수 문양이라는 데서 다시 한 번 고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의 20세기 작품에서 어떻게 그리스 미술의 요소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는 유럽의 아르누보가 그들의 전통 미술 죽, 그리스-로마 미술의 부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임숙재에게 일본의 아르누보를 통해서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수용됏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 일본의 미술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동양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중국 미술로부터 차별성이나 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원류를 간다라 미술이나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찾았는데, 임숙재의 작품엣 나타나는 고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은 이러한 일본 미술계의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영향의 발현일 가능성이 있다. [93p]
- 더 나아가, 이를 통해 한국 근대 디자인의 한계가 어떠한 과정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도출해낼 수 잇다. 흔히 우리나라 근대 디자인이 갖는 한계로 ‘평면 도안=디자인’ 이라는 등식이 굳어져, 물건의 평면을 장식하는 차원의 발상에서 그쳤을 뿐, 형태의 기능이나 산업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다. [100p]
Ⅴ. 맺음말
- 더구나 한 개인의 잠재 능력이 비교적 그대로 발현될 수 있는 문학작품이나 회화, 조각 등의 순수 미술작품과 달리 디자인은 그 시대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산업의 수준과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어느 한 개인의 한계를 탓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식민 통치 하에서도 이렇게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던 개별적인 움직임들이 후세의 역사 정리 작업에서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절된 기간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와 분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까지의 찬란한 한국 공예사와 아직까지 잠정적으로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한국 디자인사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계속 풀어나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10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