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미술

지은이 / 토니 고드프리 | 옮긴이 / 전혜숙

by Joong

개념 미술
지은이 / 토니 고드프리
옮긴이 / 전혜숙
펴낸이 / 김언호
펴낸곳 / 한길아트(135-120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머리말
- 최근 몇 년 동안 미술관은 여러 면에서 교회 또는 사원의 양상을 띠어왔다. 즉 경건한 정숙함을 요구하면서 물신주의를 배태해온 것이다. [6p]


- 개념 미술이 매체나 양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면, 그것과 마주쳤을 때 그것이 개념 미술 작품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개념 미술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 ‘레디메이드’를 들 수 있다. 뒤샹이 만든 이 용어는 외부세계에서 가져온 사물이 미술로 주장 또는 제시되는 것으로, 미술작품의 독창성과 미술가의 손작업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개입’(용어해설 참조)으로서, 이미지·텍스트·사물 등을 미술관이나 길거리 같은 예기치 않은 문맥 속에 갖다 놓아 그 문맥으로 관심을 끌어내는 것이다. 셋째는 ‘자료 형식’이다. 실제 작품과 개념·행동 등은 모두 증거와 기록, 지도, 차트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는 사진을 제기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언어’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개념과 진술·조사 등이 언어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7p]


- 1960년대 후반에 개념 미술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 비평가 리파드는 개념 미술의 주요 공통요소로서 미술 대상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를 강조했지만, 다른 비평가들은 이것이 실제와는 괴리가 있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나 1995년 리파드는 『미술 대상에 대한 재고 : 1965~1975』라는 회고전 카탈로그에서 훨씬 더 신중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내가 볼 때, 개념 미술은 그 안에서 개념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되 재료는 이차적이거나 별로 쓸모없거나 일시적이거나 저렴하며 또 두드러지지 않고, 더 나아가 빗물질화하는 그러한 작품을 뜻한다.” 1996년경 코수스 역시 훨씬 융통성 있는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개념 미술가들은 그 기본적인 신조로서, 형태나 색채 또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지닌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의 가장 중요한 그룹인 ‘미술과 언어’ (주요 인물 소개 참조)는 모더니즘(용어해설 참조)의 신경질적인 붕괴로서의 개념 미술의 특징을 나타냈다. 신경질적인 붕괴는 우리의 삶이 기초하고 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발생한다. 개념 미술가들은 미술이나 모더니즘 미술의 주장과 그것이 누려온 사회제도도 불신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분 이후 발전해온 모더니즘은 새롭고도 적절한 형태와 방식을 통해 산업과 매스미디어의 새로운 세계를 표현해왔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모더니즘의 지배적인 흐름은 오로지 형식과 양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형식주의를 나타냈다. 형식주의 내의 발전은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속의 삶을 설명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며, 다만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매체를 정제시키고 순수하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개념 미술은 모더니즘이 지닌 이러한 미술의 발전 개념에 격렬하게 대항했으며, 특별한 종류의 상품으로서의 미술 대상의 존재라는 면에도 반대했다. 미술, 특히 회화에 내재한 순수하게 망막에 기초하거나 시각적인 성격은 모더니즘 이론가들과 주동자들에 의해 고양되었다. 모든 시각적인 경험과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의 역할을 강조한 개념 미술가들에게 이것은 저주스러운 일이었다. 모더니즘 미술은 세련되고 밀폐된 담론이 된 반면 개념 미술은 그 담론을 철학과 언어학, 사회과학 그리고 대중문화에 개방시켰다. [14~15p]


1장 초기 모더니즘의 반(反)미술 제스처
뒤샹과 다다
- 그러나 이것이 개념 미술인가? 그것은 자기인식적일 수 있지만, 자기비판적이지는 않다. 이러한 어떤 경우에서도 회화 언어는 비판받지 않는다. 자기의식이 자기비판이 되는 것은 19세기 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19~20p]
- 아무튼 뒤샹이 기대했던 스캔들은 성취되었다. 이 작품의 목적인 협회 위원들의 기준과 행동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논쟁의 시초를 의미했다. 궁극적으로 논쟁 자체(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가 실제 작품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 사실 실제 작품은 사진 찍고 나서 곧 없어졌으니까! [30p]


- 권위는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적이고 성적(가부장적)이며 문화적인 문제였다. 미술은, 심지어 모더니즘 미술까지도, 문화와 품위와 고상한 열망 따위를 주장했는데, 그 예로 글래큰스가 미술이라기에는 너무 상스럽다고 (변기를-옮긴이) 보기 거절했던 사건을 들 수 있다. 그에게는 그것이 아카데미의 예절을 벗어날 뿐 아니라, 성의 문제와 반(反)이상적인 신체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도 상스러웠다. 또한 미술의 정의를 의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은 반(反)권위적인 사물이었다. 그런데 협회 위원들은 무슨 권위로 그것이 미술로 정의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또한 역으로 생각해볼 때, 미술이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무슨 권위가 있었겠는가? [31p]


- 하지만 1921년경 다다는 끝이 난다. 다다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자유를 요구하던 것을 멈추고 제각기 전업 미술가가 되거나(한스 아르프[Hans Arp]), 종교에 귀의하거나(후고 발[Hugo Ball]), 정신분석가(후엘젠벡)가 되었다. [37p]


- 피카비아는 특히 해내지 않는 한 매일매일은 다른 날과 똑같을 것이다.“ 피카비아는 특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그룹을 창립한 이후 브르통에 대항해 그를 비방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피카비아가 보기에 초현실주의는 다다를 오해한 경우에 지나지 않았다. ”앙드레 브르통은 혁신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출세주의자이다“라고 피카비아는 브르통을 비난했다. [50p]


2장 전쟁 이후
회화를 대신하여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롱하는 급진적인 예술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오랜 기간동안 회화와 조각이라는 범주로 받아들여졌던 시각예술이 치유적이고 교화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대중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리고 전후(戰後) 물질문화에 대한 욕구와 논리적인 모더니즘 회화가 마침내 기진맥진해졌다는 이유로 미술세계는 전쟁 이후 15년 동안 회화이 지배를 받게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구상회화든,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 잭슨 폴록(Jankson Pollock),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같은 미국 화가들의 추상표현주의든, 회화는 비극적인 것, 숭고한 것, 정신적인 것을 진지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믿음을 주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이 시기의 양 대륙 화가들과 회화의 특징은 뒤샹이나 피카비아의 유희적인 성격과는 정반대되는 진지함이었다. [55p]


- 케이지는 “소리로 하여금 그 자체가 되게 하라”고 말한다. 그에게 모든 소음은 잠재적인 음악이었다. 마찬가지로 커닝엄도 신체의 모든 움직임을 잠재적인 무용 동작으로 취급했다. [61p]


- 구타이 미술가들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미술과 자연에 참여하도록 초청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해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요시하라는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땅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태양·바람·비와 같은 자연의 조건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태학적인 의도는 훨씬 나중에 서구의 미술에서 공통적인 증후로 나타난다. [67p]


- 뒤샹이 지적했듯이 네오 다다는 미술에 도전하기 위해 현실세계에서 가져온 오브제들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미술로 만들기 위해 도입했다. 여기에는 비판적인 정신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수집한 오브제들을 습관적으로 보여준다면, 그것들은 결국 화가의 서명과 마찬가지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우리는 폴록의 드리핑(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방식을 일컫는 것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붓·막대에 묻혀 뿌리는 방식-옮긴이) 그림들을 인식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르망의 축적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아르망 같은 미술가의 상업적인 성공은 그의 축적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이고 인식 가능한 성격 속에서 명백히 예견되었던 사실이었다. 결국 누보 레알리스트들은 그들의 모든 형식적인 새로움을 위해서 물질문화를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것을 바꾸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기록하려고 했을 뿐이다. [73p]


- 물론 뒤샹은 작품을 많이 만들지 않았고 또 체를 두기 위해 오래 전부터 작품 만들기를 그만두고 ‘침묵’의 상태에 있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미술가로서 실제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업적과 명성은 그 무렵 막대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추측하건대 그가 단순히 오락으로 했던 행위나 말들도 신탁이 되어버렸다. [75p]


- “표현·일루전 ·추상은 공허한 허구이다. 말로써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존재해야 하는 것, 살아야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1959년 만초니는 종이조각들 위에 선을 그은 뒤 돌돌 말아서 그것들을 상자에 넣고 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상자 위에는 선의 길이와 날짜 그리고 자신의 서명을 썼다. 이것은 진정으로 빗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작품이었다. 라우셴버그의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직 전체적인 효과만이 미술작품을 구성할 수 있었다. [79~81p]


- 같은해 클랭은 「허공」을 그 결론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개념적인 논리를 택했다. 그는 ‘비물질적 회화의 감수성 영역’(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일정량의 금으로 교환했다. 1962년 금박으로 작품값을 받은 클랭은 그 중 절반을 센 강물에 살포시켰다. 그때 미리 동의한 구매자가 클랭의 ‘비물질적인 것을 위한 영수증’을 불에 태웠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비가시적인 작품을 소유했떤 적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없어졌다. 작품을 만들고 매매하고 소유하는 과정은 하나의 신비적인 것, 의식(儀式)적인 것이 되었다. [81~82p]


3장 그릇되고, 극단적이며, 완고한
1960년대 초의 현실
- 1960년대의 개념 미술은 바로 이러한 명백한 만족의 분위기와 초기의 분노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등장했다. 외양과 리얼리티 사이의 불일치는 그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했으며, 그것은 개념 미술의 지속적인 관심거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미술은 사회의 분위기를 확실하게 반영한다. 그러한 예로 밝게 채색된 추상회화(그림52)와 당시의 조각들은 점점 더 커지는 크기와 새로운 재료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소비사회를 상징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느길 수 있었던 병폐는 미술에서도 나타난다. 공공미술관과 상업화랑 같은 미술제도에 대한 불만이 자라나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형식에서도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즉 미술가들은 점차 자기 자신을 실험적으로가 아니라 ‘대안적’(alternative)으로 나타냈다. 그것은 미술은 개선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다른 유형의 미술을 만드는 문제였다. [86~87p]


- 뉴욕에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실제 세계에서 가져온 오브제들로 작업하던 네오 다다이스트의 영향을 받아온 팝 아티스트들이 그들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또는 진부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92p]


- 이 영화의 길이와 그 졸리고 반복적인 특징 때문에 우리는 한 영화를 보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칙칙거리고 긁힌 듯한 질 나쁜 화면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 영화의 우리로 하여금 관음자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특히 우리 자신을 관찰자로 인식하게 된다. [96p]


- 철학자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는 워홀의 「브릴로 상자들」과 그것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매료되었다. 진짜 브릴로 상자는 미술이 아닌데, 무엇이 이것을 미술로 만들었는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그것이 미술이라고 믿을 때 어떻게 달라졌는가? 1964년에 발표한 글에서 심화된 그의 이론은, 미술이 미술로서 보여지거나 미술의 문맥에 놓여짐으로써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제시했다. “무엇인가를 미술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그 가치를 깎아내릴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즉 미술이론의 분위기, 미술사에 관한 지식과 같은 일종의 미술세계를 요구한다.” [96~97p]


- 「다양한 작은 불과 우유」(Various Small Fires and Milk, 그림59)는 제목 그대로 여러 개의 작은 불꽃과 한 잔의 우유 사진이다. 책들은 훌륭하게 만들어져 인쇄되었으나, 전통적인 미술가의 책과는 달랐따. 처음 만든 것부터 따로따로 분리된 책들은 대부분의 한정판 책들이 그렇듯 개별적으로 번호가 매겨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단지 책이었다. 왜 이 책들이 그렇게 흥미를 자아낼 수 있을까? 그것들은 보는 행위, 선택하는 행위 그리고 보여주는 행위를 제시할 뿐 아니라 암시적으로 그러한 행동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들은 진부하지만, 일단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관한 생각을 포함하여 생각을 시작하면 복잡해진다. [99p]


- 1960년대 말에 나타난 개념 미술은 1960년대 초의 두 운동 플럭서스와 미니멀리즘(Minimalism)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운동들이 정반대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나는 유희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표정 했다. [100~101p]


- 플린트는 ‘개념 미술’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예를 들어 음악의 재료가 소리인 것처럼, ‘개념 미술’은 무엇보다도 그 재료가 개념인 미술이다. 개념들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념 미술은 그 재료가 언어인 미술의 종류이다”라고 썼다. [102p]


- 짧은 기간 동안 플럭서스에 가담했던 다른 미술가들도 플럭서스에서 벗어났다. 로버트 몰리스는 라 몬테 영의 『앤솔로지』에 기고한 글을 철회했으며, 1964년에는 “마키우나스의 지도 아래 있는 플럭서스의 퍼포먼스는 가벼운 희가극이나 후고 발과 트리스탄 차라의 다다이스트 퍼포먼스에 대한 질(質) 낮은 리바이벌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공식적으로 이 운동에서 탈퇴했다. 영 자신은 백남준과 오노 요코 등의 퍼포먼스에서 나타나는 파괴적인 경향에 불만을 품고 이미 1년 전에 탈퇴했다. [106p]


- 그러나 플럭서스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 늘 개방되어 있었으며, 1960년대 말에 나타나게 될 개념 미술을 위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국제적인 운동이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일본에서 리투아니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106~107p]


- 로버트 모리스는 아마도 플럭서스와 미니멀리즘 양쪽 모두에 속했던 유일한 미술가일 것이다. 1962년 그는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렸다. 커튼이 올라가자 높이 2.4미터, 넓이 60센티미터의 회색으로 칠한 나무 기둥이 3분 30초 동안 서 있다가 넘어진다(원래는 모리스가 기둥 안에 숨어 들어가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으나, 리허설 도중 다치는 바람에 실제 퍼포먼스에서는 실로 잡아당겨 넘어지게 했다.) 다시 3분 30초가 흐른 뒤 커튼이 내린다.
이것이 왜 다른 플럭서스 이벤트처럼 취급되지 않았을까? 먼저 이것은 익살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조롱이라기보다는 고의적으로 계획한 심각한 이벤트였다. 무대는 관객의 눈으로 채우도록 텅 빈 채로 있었다. 모리스는 관객을 위해서 매우 다른 역할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변덕스러운 엉뚱함을 늘어놓아 관객들의 흥을 돋우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화랑 공간을 이용했듯이 무대를 이용하고 있었다. 또 관습과 언어를 이용해 작업함으로써 관람자의 입장에서도 거기에 반응하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플럭서스와는 달리, 대상의 물질성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107~108p]


- 1960년대의 미술은 패션 같았을 뿐 아니라 패션처럼 갑작스러운 변화를 나타냈다. ‘새로운 조각’ (New Sculpture),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옵 아트‘(Op Art) 등의 새로운 운동이나 ’이즘‘들이 계속해서 어김없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경향은 다음 미술양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중에게 열렬하게 받아들여졌다. [109p]


- 그것들의 유일한 수수께끼는 바로 존재 그 자체였다. ‘미술-존재론자들’은 이것을 보고 특히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 작품을 반미술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저드는 자신의 카탈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을 미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미술이다.” 그러한 정의는 매우 현상학적이며, 또한 현상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술가들(안드레·플래빈·저드·르윗·모리스·스미드슨)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미술이란 비현실적·구성적·발명적·선(先)결정적·지성적·객관적·고안적이며 그럴싸한 것으로 믿게 만드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태도이다. 그들의 작업은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침묵적이지만, 그것이 모든 르네상스적 가치의 종말을 지시한다는 의미에서는 전복적이다. 그것은 안일한 미적 경험을 거부한다. 아울러 루이스-놀랜드 화파의 장식적인 구실과 거리가 먼 만큼이나 추상표현주의, 팝 아트, 해프닝의 인본주의적인 웅얼거림과도 거리가 먼 도발적인 미술이다. [111~112p]


- 이렇게 미니멀 작가들은 ‘최소한’이라는 특징을 보이면서도 여전히 미술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뒤샹과 그의 레디메이드들보다는 덜 극단적이었다. 그런데도 작품들은 너무 ‘평범해서’ 관람자들은 미술로서의 사물과 일상세계에서의 사물 사이의 차이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대상 자체뿐 아니라 먼저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고려하게 만들며, 그러고 나서 그들 자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미술가 또는 비평가는 “이러한 전이(轉移)를 위해 사물이 반드시 필요한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113p]


- 확실히 미니멀리즘은 미술을 제작하고 경험하는 데서 고도로 개념화한 방식이었다. 그것은 주요 실행자들에 의해 전문적으로 이론화되었으며, 작품의 의미보다는 사물성 그 자체를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즉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표현’이나 ‘상짱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었다. 또한 미니멀리즘을 양식이 아닌 하나의 태도로 본다면, 잠재적으로 모든 것들이 미술로 또는 언어로 보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사고방식과 제작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115p]


- 1966년 보크너도 비슷한 작업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돈 한푼 없이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책을 읽거나 공책에 드로잉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드로잉 행위는 생각하는 것과 만드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해주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따. 그가 기하학적인 모형들이나 조각에 대한 계획을 시작했을 때 그의 드로잉들은 도표처럼 되었고, 더구나 가끔 그래프 용지 위에 그린 것은 더욱 그러했다. 마침내 그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단순한 수학적 형태들이 쉽게 머리에 떠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드로잉이나 도표를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서 제작행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따. 그러므로 정말 미술 대상을 만들 필요가 있었겠는가?[115~116p]


- 보크너가 ‘미술로 보일 필요가 없는 종이 위의 작업 드로잉과 그밖의 다른 시각적인 것들’이라고 부른 이 전시는 종종 여러 타당한 이유에서 최초의 개념 미술로 인용되곤 한다. 관람자는 책을 읽는 독자가 되었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또한 여기에는 저작권에 대한 의혹도 제기된다. 이것이 모두 보크너의 작품인가? 미술가와 큐레이터 사이의 구분은 희미해졌다. 전시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화랑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드로잉들을 해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게다가 구부리고 본 나머지 화랑을 나올 떄는 허리가 아픈데다가,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과연 숙고할 만한 미술작품이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회고해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미술’을 구성하는 것이 사진이나 사물이 아니라 전시 그 자체 또는 전시에 대한 그들의 경험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 전시는 진정으로 개념 미술의 도래를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17~119p]


4장 비물질화한 오브제, 거의
8개의 개념 미술 작품
- 광고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고도로 조작되고 조종하는 상호관계로 묶여 있다(183쪽 참조). [125p]


- 또한 이러한 작품을 통해 나우먼은 대부분의 야외 조각이 지닐 수 있는 방해적인 특성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몇 년 뒤 나무가 자라나 그것을 능가하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없어져버릴 것”임을 지적했다. 기념비적인 조각에 반대하는 그의 진술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납판을 폴리에스테르로 여러 개 주조하여 친구들에게 보낸 제작방식과 관계있었다. 그러한 작품에서 나우먼은 ‘미술가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대학생활이 끝나갈 무렵인 1965년경 회화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그는 여전히 미술가란 무엇인가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의사가 수술실에서 수술하고 정원사가 정원에서 일하듯이, 미술가도 작업실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끝에 스튜디오를 하나 빌렸다. 그의 작업은 그러한 출발점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을 미술가로 생각하고 있다면, 또한 당신이 작업실에서 움직이고 있다면……의자에 앉거나 서성거리는 것 말이다. 그러고 나서 문제는 무엇이 미술인가 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미술은 미술가가 행한 행동과 관련된다. [127~128p]


- 그러한 해석의 정치적인 차원이 중요하다. 1988년 그레이엄은 1960년대의 분위기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미니멀리즘은 안토니오니(Antonioni)에서 베케트(Bechett)에 이르기까지 미몽에서 깨어난 좌경의 실존주의적인 지성에 매우 가까웠다. 미니멀리즘이 개념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때, 개념적인 것은 도덕적이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청교도적이고 개인적이 되었다. 개인적이라는 것은 개인적 정신성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신좌파……매우 도덕적이고 청교도적인 전망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롱의 작품을 플럭서스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잠재적인 도덕적·정치적 의미이다. [130~133p]


- 코수스는 이 작품의 부제를 통해 그가 미술을 동어반복(tautology)으로 보았음을 나타냈다. 1969년 「철학을 따르는 미술」(Art after Philosophy)이라는 글에서 말했듯이, 그는 “미술이 논리 및 수학과 공통적인 부분은 그것이 동어반복적이라는 것이다. 즉 ‘미술 개념’(또는 ‘작품’)과 미술은 똑같은 것이며, 미술임을 입증하기 위해 미술 밖의 문맥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미술로 이해될 수 있다.” 코수스에게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동어반복적이었다. 즉 레디메이드들은 “나는 미술이기 때문에 미술이다”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라인하르트가 “미술은 미술로서의 미술이다”(제2장 참조)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반대로 형식주의회화는 “나는 내가 다른 회화들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미술이다”를 통해 그 자체를 드러낸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그것은 예형론적(豫型論的, typological)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코수스는 회화가 결코 미술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회화 매체는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미리 설정된 해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34~135p]


- 발데사리는 헬드의 말을 받아들여 ‘지시하기’에 근거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 중에는 1969~70년의 「네 개의 의뢰된 그림」(The Commissioned Paintings, 그림85)이 있다. 그는 친구와 함께 도시를 걷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 친구의 손이 그 사물을 지시하는 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골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14명의 아마추어 화가들에게 자기가 찍은 사진을 보내어 그들이 선택한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발데사리는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까지 각각 스텐실을 적은 그림들을 전시했따. 그렇다면 누가 미술가인가? 작품을 구상한 발데사리인가, 아니면 낸시 콘저, 단테 귀도, 패트릭 니돌프, 팻 퍼듀 등의 화가들인가? 전통적으로 볼 때 그림을 그린 사람이 미술가이다. 그림들이 다른 어떤 이미지로 모사했을 때조차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19세기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의 판화를 고흐가 모사한 것을 ‘반 고흐의 작품’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의 일련의 그림들은 언제나 ‘발데사리의 작품’으로 논의된다. 우리가 논쟁하고 있듯이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공연하도록 원고나 악보를 제공한 감독 또는 작곡자와 같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저작권은 그 실행보다는 개념에 돌아가게 된다. [138~139p]


-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8개의 작품들은 공통점을 지니는가? 아마도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양상은 색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청교도적인 요소는 광고의 명랑한 다채색 및 그 무렵의 다른 미술과 직접적으로 대립된다. 흑과 백은 또한 익명성을 위해 즐겨 사용되기도 하며, 진실됨과 감정적인 거리감에 대한 암시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값이 싼 것이기도 했다. [142p]


- 이 작품들은 서문에서 인용한 개념 미술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작품의 배후에 있는 개념이 실제로 미술을 구성한다는 르윗의 개념(「개념 미술에 관한 글들」), ‘개념’ 미술의 기초에 대한 탐구라는 (분석적이고 언어적인 작품으로 개념 미술에 대한 정의의 범위를 협소하게 만드는) 코수스의 정의 그리고 개념 미술을 미술 대상의 빗물질화라고 정의한 리파드의 설명 등 어느 한 가지로써 이러한 작품들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모든 정의가 다양한 각도에서 적용된다. 모든 작품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공유한다. 즉 오브제 또는 이미지에는 독특한 아우라가 부여되지 않으며, 미술가의 역할은 희미해졌고, 작품이 보여지게 될 문맥에 대한 인식이 있으며, 작품은 잠재적으로 수용된 의견과 신뢰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142~143p]


- 롤랑 바르트는 독자가 처음에는 성가시게 느끼고 그 다음에는 반응하게 되는 텍스트에 대해 ‘작가적인’(writerl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그림11) 같은 시를 읽을 떄, 눈은 페이지를 가로질러 앞뒤로 움직여 마치 복잡한 무용의 스텝을 눈으로 뒤쫓는 것과 비슷하다. 무용수가 안무가에 의해 지시된 스텝을 행동으로 옮기고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악보를 음악으로 재창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읽는 행위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즉각적인 반응과 해석의 작용이다. 이것은 모더니즘 말기의 중요한 양상이 되었으며, 중요한 것은 작가가 아니라 바로 독자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이 되었다. [143p]


5장 누가 브레인 폴리스(Brain Polices)였는가?
개념 미술의 다양성
- ‘우발적인 사건’이란 곧 총격을, 공군작전이란 폭탄투하를, 지속적인 압박이란 더 많은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불법행위는 미국의 군수물자에 대한 암거래를, 신체 총계(總計)란 죽은 군인들과 농부들의 정확하지 않은 수를 의미하였다.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일차원적 인간』에서 말했듯 이 나라의 언어는 ‘작전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의도된 결과를 얻는 것이었다. [148p]


- 전통적인 범주에 대한 일반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임시로라도 우리는 개념 미술을 7개 영역에 걸친 작업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7개 모두 권위주의와 그것의 기만적이고 발광적인 수사학에 의해서는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연속적 작업, 반형태(anti-form)의 조각, 언어를 기반으로한 작업과 이론적인 작업, 모노크롬 회화, 발명, 아르테 포베라(용어해설참조)를 연상시키는 레디메이드에 대한 시적 접근을 들 수 있다. [150p]


- 몇몇 사람들에게 반복은 의미의 대상 또는 기호를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적인 텍스트는 아우라의 소실에 대한 분석을 다룬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기계 복제 시대의 미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 1936년에 처음 발표되었으나, 1960년대에 와서야 널리 알려졌다)이었다. 50번 반복한 워홀의 마릴린 먼로는 기호가 되었으며, 현존성을 잃어버렸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우리는 로어가 자신의 작품을 후광 또는 복제에 대한 내재성을 가진 것으로 본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사용된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라는 다섯 번의 반복이 단어의 의미를 소멸시켰는지, 아니면 배우나 독자들로 하여금 단어의 다양성과 강도를 충만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152p]


- 완성된 마지막의 명확한 결과보다 과정을 강조하는 반형태는, 어떤 점에서는 다분히 언어적 미술로서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 이 무렵 많은 미술가들이 화랑에 흙무더기, 실뭉치, 철사, 건초 가마니, 거칠고 조각난 돌맹이들을 들여왔다. 관람자의 눈 앞에서 평가절하되거나 변화를 겪는 재료들이었따. 롱은 화랑 바닥에 흙과 솔잎 또는 작은 가지들로 단순한 선이나 원을 만들었다. 1968년경 라파엘 페러(Rafael Ferrer)는 얼음으로 조각작품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작품의 불가피한 소멸을 통해 제작의 과정보다는 재료의 과정을 더 강조했다. [160p]


- 이때는 의사소통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상호간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미술가들의 국제적인 개념 공유는 반민족주의적인 감수성을 지닌 이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했다.
댄 그레이엄이 왜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와 『뉴욕 섹스 리뷰』(The New York Review of Sex)같은 잡지에 광고로 가장해 작품들을 발표했는가는, 단순한 소통뿐 아니라 미술세계 밖에서 더 많은 청중과 접하려는 욕구가 있었다는 점을 통해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167p]


- 토로니도 뷔랭처럼 그의 생애를 통틀어 독특한 형식을 유지했다. 계속해서 똑같은 것만 반복한다고 비난받자 그는 “‘나는 사랑하는 데 관심이 없어요. 사랑은 늘 똑같아요’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것은 그의 일이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붓으로 만든 표시들은 항상 똑같지만 또한 항상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른 문맥에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듯이 그의 정확한 그림 방식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실험에 의해 도달된 것이다. 따라서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이 평형상태를 이룬다. [176~177p]


- 1970년 파리의 이봉 랑베르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초대장에서 토로니는 자신의 이름을 뺐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비나 눈처럼 익명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이것은 뷔랭이 1970년 『아트 매거진』(Arts Magazine)에 발표한 글의 “비가 온다, 눈이 온다, 그린다”라는 내용을 연상시킨다. 그 텍스트에서 뷔랭은 “미술은 정확하고 엄격한 탐구이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작품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프랑스의 문학이론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글을 인용했다. 뷔랭은 비개성적이기보다는 익명적인 ‘작품’을 요구했다. “그것은 관람자에게 그 자신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거나 위안을 주거나 또는 확신과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작품이다. 혹자는 진술의 비개성적인 성격이 우리가 습관적으로 원하는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소통에 대한 모든 요구를 차단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기 떄문에 관람자는 과정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근본적인 진리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러한 비개성적인 작품은 형이상학적인 체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뷔랭은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비가 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회화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눈이 올 때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의 현존성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회화를 할’때 우리는 역사적 사실의 현존성 안에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177p]


- 1969년 로마의 한 화랑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쿠넬리스는 12마리의 살아 있는 말을 끌고 와 화랑에 맘구간을 만들었다(그림106). 이 작품을 비롯한 아르테 포베라의 작업들은 레디메이드에 대한 방향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화랑의 흰색 공간과 그 익명성·중립성이 지닌 방부성(防腐性)에 대한 응수였다. -중략- 그는 감수성과 구조 사이의 균형을 재설정하는 데 연관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들은 감수성을 나타내며, 화랑은 구조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회화에서 물감이 ‘감수성’의 기능을 하고 틀이 ‘구조’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동물은 또한 진짜 생명체와 진짜 사물에 대한 강조를 나타낸다. [179p]


- 우리는 이러한 아르테 포베라 작품을 보조적인 레디메이드에 대한 시적인 파생으로 명시할 수 있다. 그러나 뒤샹이 항상 냉정했던 반면, 쿠넬리스는 오브제와 재료들을 ‘살아 있고’ 변덕스러우며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었다. [183p]


- 그것은 레디메이드라기보다는 조각이다. 그의 배수들은 기념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레디메이드였다. 즉 그것들의 목적은 우리에게 보이스와 그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짜 십자가의 한 조각이 열광적인 추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보이스적인 레디메이드는 전통적인 미술작품 같은 기능을 했다. 그것은 보이스의 생애와 가르침의 담화에 대한 삽화로서 미리 약호화(coded)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개념 미술과 달리 보이스의 레디메이드는 전적으로 아이러니를 결여하고 있다. [184p]


6 권위의 위기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문맥
- 1960년대 말경, 베트남의 ‘언어 전쟁’은 점점 더 복잡하게 진전되었다. 즉 완곡어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날카로운 환경적 반응’은 폭탄 쇼크를 말하는 것이었고, ‘진실성 재난’은 의도가 간파된 것을, ‘극단적인 편견으로 종결되다’는 살상을, ‘프래깅’(fragging)은 수류탄으로 상관이나 동료를 죽이려고 습격하는 것을 뜻했다. 방송 뉴스에서는 전쟁을 두문자어(頭文字語)로 설명했다(NVA, DMZ, ARVN, PX 등의 어려운 이름들은 북베트남 군대, 비무장지대 등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 쪽에서 보면, 전쟁은 10대(군인들의 평균연령은 19세였다)에 의해 치러지고 있었다. 왜 그들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또한 왜 많은 이들이 마약에 열중했는지 불확신한 채로 말이다. [188p]


- 개념 미술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하기’에 대한 진실과 거짓 문제를 강조하거나 소비사회에 대한 불만족을 표명함으로써 그것이 이 시대에 대한 반응임을 충분히 드러냈다. [190p]


- 이미지들은 그야말로 위기를 맞이했다. 1년 전, 시추에이셔니스트 드보르의 영향력 있는 저서 『스펙터클의 사회』가 출판되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인용했듯이 그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소외 개념과 관련되어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살아남은 모든 것이 곧 단순한 재현이 된다는 명백한 소비사회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오브제와 삶의 이러한 이미지로의 변형은 “스펙터클이 이미지들에 의해 중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을 의미했다. 1968년 폭동기간 중 미술학교 학생들은 ‘선동과 선전’을 광고에 대한 각성과 일종의 전(前)개념 미술에 대한 인식에 결합시켰다. 포스터에서든 낙서에서든 눈에 띄는 무수한 모순적인 슬로건들은 설익은 시추에이셔니스트 이론의 떫은맛을 지니고 있었다. 즉 “사실주의적이 되자. 또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라든가,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소비자인가 아니면 참여자인가?” “혁명은 그것이 현실에서 성취되기 이전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너의 꿈을 살아라!” 등등이었다. 여기에 소개된 포스터(그림112)는 ‘선전이 당신의 가정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으로 스펙터클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말대로 매스 미디어가 ‘이념적인 국가적 장캄가 되는 상황의 정도를 시추에이셔니스트적인 관점에서 보여준다. 국가와 대기업에 의해 통제된 텔레비전은 새로운 유형의 식민주의를 배태시켰다. 즉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그럴싸하고 그릇된 사진에 의해서 모든 인구가 기만당하고 통제당하는 내적인 식민주의였다. [192p]


- 무엇보다도 미술가들이 하고 있던 것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따. 개념 미술의 중요한 성격은 바로 열띤 논쟁과 토론이었다. 뉴욕에서 스미드슨이 매주 개최한 야회 모임에서든, 늦은 밤의 바에서든, 앤트워프의 와이드 화이트 스페이스 같은 화랑에서든, 또는 가장 특별한 경우로 미술가들을 위한 협의회의 성격을 띠고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대규모 그룹전에서든 논쟁과 토론은 항상 존재했다. 국제적인 여행이 이제 막 쉽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큰 도시에서는 소규모 미술단체들이 여전히 쉽게 발견되었고 또 가입하기도 쉬웠다. [194p]


- 만약 이 시기에 개념 미술의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천재들의 역사나 그들의 돌파구에 관한 역사가 아니라 이러한 전시들에 관한 역사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잇달아 일어나는 변화와 대안(代案)을 추구하는 데서, 전시 조직자들의 역할은 흥행을 구했던 화랑 주인의 역할에서 벗어나 전시 제작자의 역할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향후 몇 년 동안의 전시들에 정보를 주거나 전시형태를 변형시켰다. [198p]


- "우리는 작품의 질(質)이 미술가의 생각에 있는 것이지 그가 기용한 오브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회화와 조각이 다가올 컴퓨터와 즉석 여행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후기-오브제 미술은 미술의 개념이 오브제나 시각적 경험을 넘어서 심각한 미술의 ‘탐구’라는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즉 그것은 미술 개념의 본성에 대한 철학과 같은 탐구로서, 미술가의 제작과정은 작품 형성을 포괄할 뿐 아니라 비평가의 전통적인 기능까지도 수반한다.“[207~208p]


- 미술은 문제를 일으켜야 한다.
브루스 나우먼
작업의 전제는 체계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다. 즉 존재하고 있는 체계에 개입하고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방식은 조직에 대한 기능적인 구조와 연관된다. 그 안에서 정보, 에너지 그리고/또는 물질의 전이가 발생한다. 체계는 물리적일 수도 있고,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일 수 있으며, 인공적일 수도 또는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의 조합일 수도 있다. 모든 경우에 실증할 수 있는 과정들은 참조 가능하다.
한스 하케
나는 언어적인 소통을 목적으로 제시한다. 모든 미술은 정보이며 소통이다. 나는 조각하는 것이 아닌 말하기를 선택했다. 나는 미술을 특정 장소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다. 나는 값비싼 오브제를 전적으로 반대한다. 나의 미술은 시각적이지는 않지만 시각화될 수 있다.
이언 월슨
모든 행위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정치적이며, 어떤 작가의 작품이든 예외없이 정치적인 표현을 지닌다. 어떠한 산물이든 어떠한 미술작품이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는 공간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우리 앞에 있는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양상과 분석되어야 할 문제 가운데 우선적인 것에 대한 고려를 무시하면 안 된다.
다니엘 뷔랭
[208~209p]


- 1970년 9월 발데사리는 뉴욕의 유대인 미술관에서 열린 ‘소프트웨어’(Software)전시의 일부로 ‘화장(火葬)프로젝트’(그럼122)를 전시했다. 그는 작업실에 쌓아놓은 자신의 오래된 작품들이 방해가 되는 데 염증이나, 1953년부터 1966년까지의 작품 가운데 팔리지 않은 모든 작품을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기지에 넘치면서도 완벽하게 일관적으로 행해진 전형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디에 있었는가? 재를 담고 있는 6개의 관 속에? 행위를 기록한 일련의 사진 속에? 아니면 그 행동을 적어놓은 브론즈 판에 있었는가? *이야기 속에 있다. [211~212p]


- 1967년에 시작한 쾰른 미술시장(아트 페어)의 완고함과 쇼비니즘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떤 콘라트 피셔(Konrad Fischer)는, 다음해에 가장 모험적인 화랑들만 초청해 미술가들을 추천하도록 하는 대안(代案)적인 아트 페어, 즉 ‘전망 68’(Prospect 68) 전을 뒤셀도르프에서 열었다.
뒤셀도르프 전시는 작품을 파는 마케팅에 관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미술가들을 소개하고 서로서로 작품을 관찰하는 기회였다. 그래서 매매 장소보다 세미나 장소가 더 많았다. 그러한 이벤트들이 미술가들의 국제적인 커뮤니티를 위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피셔에게 매우 중요했다. 자신의 화랑에서의 전시를 위해, 즉 미술가들이 작품을 보내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와서 제작할 수 있도록 피셔는 그들의 뒤셀도르프 방문 경비를 부담했다. 심지어 그는 그들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려 했는데, 이는 돈을 절약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들을 고용인이 아니라 동료로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만약 어떤 미술가가 동료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 그의 작품은 결국 팔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215p]


- 이러한 전시기획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했지만, 반면에 모순되게도 그것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후원하는 미술가들처럼 미술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217p]


- 개념 미술을 수집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불러일으켰다. 베리의 ‘문 닫은 화랑’은 어떻게 살 것인가? 보겔 부부가 그것을 살 때까지 배리 자신도 그것은 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소유하게 된 것은 화랑 문을 닫는 3개의 다른 전시를 위한 고시(告示) 문장들로, 그들이 그것을 소유했다는 배리의 서명이 든 종이와 함께 액자에 보관했다. 도로시 보겔이 말하듯, “소유권까지도 개념적이다. 왜냐하면 그 세 개의 알리는 문장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들을 액자에 넣고 여기에 화랑 문을 닫은 작품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4p]


- 개념 미술의 충격 중 하나는 미술가와 비평가의 역할을 융합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미술 잡지는 미술가들의 견해와 글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서 발견되는 이론의 본체는 개념 미술의 자기분석 속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224p]


- 책은 이 당시의 미술가들에게 매력적인 형식이었다. 왜냐하면 적당히 저렴하고 접근 가능하며 운반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지겔라우프가 말했듯이 “책들은 중립적인 근원이며, 정보의 ‘보고’(寶庫)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과 함께 가능했던 것처럼 책과 함께 유희하거나 전복하려는 관례와 기대가 있었다. 대부분의 개념 미술가들은 책을 만들었으며 전시와 함께 카탈로그 또는 잡지를 제작했다. [225p]


- 따라서 그가 지신의 ‘미술관’ 또는 ‘대안적인 공간’을 만들었을 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회적인 기능이었다. 이곳은 당신이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하러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또한 퍼포먼스와 설치를 위한 장소였지 오브제를 저장하는 곳이 아니었다. [228p]


- 거리가 개념 미술을 위한 현장이 될 수 있었다면 자연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월터 드 마리아가 뮌헨 갤러리의 50미터 입방체 크기의 방을 흙으로 채운 것은 그야말로 물질적인 행위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것을 위한 계획(그림137)은 웨이너의 개념 작품과 비슷했따. 혹자는 유타 주의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 안으로 457미터 길이로 구부러져 들어가면서 수십 톤의 돌을 사용한 스미드슨의 「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 그림136) 같은 작품도 어느 정도 개념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개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대지 미술은 진정한 개념 미술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경향들이 있어왔다. 그것은 대지 미술이 그렇게 커다란 오브제를 만든다는 것과, 어느 정도 무비판적이고 감상적이거나 향수 어린 철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념 미술과 대지 미술 사이의 구별은 불분명하며, 심지어 개념 미술과 아르테 포베라를 구별하거나 개념 미술과 퍼포먼스를 구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237p]


- 스미드슨이 엔트로피(entropy)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던 것처럼, 피터 허친슨(Peter Hutchinson)은 바이러스 같은 생명의 끈기에 집착했다. 『타임』지와 화랑 주인인 버지니아 드완(Virginia Dwan)의 후원을 받은 그는 멕시코의 파리큐틴(Paricutin) 화산 꼭대기에 올라가 분화구 가장자리에 흰 빵 204킬로그램을 늘어놓았다(그림138). 이곳은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곳이었으나 화산의 유황 열기 때문에 비닐 안에 들어 있는 빵에는 다량의 곰팡이가 자라났다. 곰팡이들은 엿새 동안 흰색에서 빨간색으로, 그 다음에는 오렌지색으로,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발데사리가 화가로서 서명하는 ‘저작권’을 포기했듯이 그리고 하케가 미술관을 방문한 관람자들에게 저작권을 넘겨주었듯이, 허치슨도 과정을 드러내는 작품을 통해 자연의 힘에 자신의 저작권을 내주었다. [137~138p]


7 끝?
개념 미술의 쇠퇴 또는 디아스포라?
- 미술노동자연합(회원으로 칼 안드레, 로버트 모리스, 멜 보크너 등이 있었다)은 도랑에 쌓인 시체들 사진을 포스터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Q. And babies? A. And babies."(그림139)라는 의미심장한 슬로건이 덧붙었다. 이 포스터는 전세계로 배포되었다. 미술노동자연합의 일부 회원들은 포스터를 현대미술관으로 가져가, 스페인 내전 중의 폭격을 고발한 피카소의 그림「게르니카」앞에 놓고 시위를 벌였다. 이곳은 시위에 적합한 장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미술관의 이사회 임원들이 바로 전쟁무기를 공급하고 있던, 또 그럼으로써 재정적인 이득을 챙긴 거대한 회사를 소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비평가인 그레고리 배트콕(Gregory Battcock)도 회의에서 ”베트남 전쟁을 좌우하고 있던 사람들은……바로 미술을 사랑하는, 문화적인 임무를 지닌 이사들이었다“고 공언했다. [242p]


- 전쟁은 미술가들을 더 의식적으로 정치적이 되도록 만들었다. 1970년 3월 미술노동자연합은 ‘미술관들은 자유로워야 한다. 임원회에 미술가를 포함시켜라. 여성 미술가와 흑인 미술가들을 더 고무시켜라. 미술가들이 항상 자기 작품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라’고 부르짖었다. 5월 22일 그들은 뉴욕 미술 파업(그림140)을 조직했다. [243p]


- ‘도큐멘타 V'를 둘러싼 저항과 불만은 개념 미술이 일종의 새로운 제도, 즉 새로운 형식주의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었다. 개념 미술이 끝나버려 방향을 잃었든 새로운 아카데미가 생겼든 간에, 어쨌든 일치된 의견이 점점 확산되고 있었다.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또 하나의 1972년 전시인 ’새로운 미술‘(The New Art) 전도 이와 비슷하게 개념적인 실행이 제도권에 수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253p]


- 1982년 후블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개념 미술은 결코 미술제도―화랑·미술관·컬렉터―를 붕괴시키는 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오히려 개념 미술의 성격은 미술제도를 통해 소통되었다. 개념주의를 그러한 야망을 지닌 미술로 잘못 보거나, 여전히 개념 미술이 철저하게 미술체계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전체적인 계획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세계 안에서 행해진 이념적인 행동들은, 단순히 반대이념과 정면충돌함으로써 늘 고상하거나 늘 정치적으로 ‘옳을 수’ 있었다. 1960년대의 개념적인 행위들은 다양한 미술세계의 이념을 향한 변증법적인 태도를 취했다. 왜냐하면 정면충돌은 어떠한 유효한 담론을 생산하는 데 실패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문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54p]


-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미술세계에 붐이 일어난 시기였다. 많은 미술가들이 노력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많은 돈을 벌었다. 이러한 경험이 많은 개념 미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났다. 미술시장은 반(反)미술시장을 주장하는 미술까지 포괄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255p]


- 1960년대 말의 느긋한 인내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975년 존 웨버(John Weber)의 화랑에서 전시된 윌슨의 언어로 소통하는 작품을 『폭스』지에 리뷰하면서 미술사가 마이클 코리스(Michael Corris)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나는 이언 윌슨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논의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담론에 대한 아무개의 아이디어가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기탐닉적인 만담에 사람들이 불평을 나타내지 않고 기꺼이 귀기울여주던 시대는 끝났다. [256p]


- 만약 우리가 개념 미술을 화랑체계를 파괴하는 데 헌신한 일관된 운동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패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념 미술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257p]


- 전시 또는 미술관은 사실 특정한 배치와 분류에 따라 의미를 부여받은 오브제들을 제공한다. 누가 그 배치를 결정하든 그가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미술관은 권력의 장소이며, 착각의 장소이다. 드로브가 믿었듯이(제3장·6장 참조), 그곳에서는 사물의 역사가 체험된 삶의 역사를 대신해 그 자리에 모셔졌던 것이다. [261p]


- 1977년부터 ‘미술과 언어’는 정확하게 어떤 그림들이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관심을 두면서, 특정한 역사적 문맥 속에서 생산된 사물들로서의 그림에 대한 물질적인 속성을 강조했다. 그들의 목적인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도상학적인 읽기를 제쳐놓고, 그것들의 창조를 발생시킨 물질적인 환경, 즉 그것들의 ‘유전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양식과 주제를 혼성 모방한 뒤 그것들을 세 번 사진으로 찍어 복사하고 잘라냈으며, 그러고 나서 재구성했다. 첫 번째 것은 원작을 만들기 위해 다시 모은 것이지만, 나머지 둘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레닌을 묘사하고 있는 거대한 반(半)추상을 만들기 위해 뒤섞이고 재배치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두 개의 반(反)명제적인 문화적 도상, 즉 모범적인 모더니스트 화가(그의 작품의 형식적인 순수성 떄문에 성공한)와 혁명적인 영웅의 진수였던 레닌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263p]


- 크니자크는 이러한 이벤트들과 의식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것은 필요했다. 미술을 만드는 데는 목적이 없었다(그것을 살 사람도 없었고, 그러한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도 없었다). 그것은 단지 소통의 방식이었다.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어떻게 사람들을 듣고, 생각하고, 존재하도록 가르치는가의 문제였다.” [267p]
- 동유럽에서 개념 미술은 회화와 대립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미술가들은 회화의 이상적인 이론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종류의 회화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것은 피상적으로는 팝 아트와 약간 비슷하지만 사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에릭 뷸라토프(Eric Bulatov)의 회화에서 비롯되었다. 1971~72년의 그림 「붉은 수평선」(Red Horizon, 그림153)에서 붉은색과 금색 띠는 수평선으로 향한 우리의 시선을 차단함으로써 전망을 파괴한다. 비록 소련의 애국적인 색채로 되어 있지만, 이 그림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족스러운 바다 광경을 말소시켜버린다. 뷸라토프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소련의 회화 전통은 서구와 매우 달랐다. “19세기부터 이미 눈에 띄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회화가 기본적으로 정통적인 유행을 따랐던 반면, 러시아에서는 그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와 인터뷰했던 미술가 카바코프(주요 인물 소개 참조)도 동의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화가 이해되는 방식이다. 회화의 가치는 회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석, 즉 그것의 메시지에 있다. 우리는 오브제를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판단할 뿐이다.” [269p]


- 1981년의 ‘네스트’ 프로젝트인 ‘1미터 더 가까이’(Let's come one metre closer)는 서로 떨어져 있는 이들 그룹 전부를 포함한 계획으로, 세계의 다른 부분에서 1미터 깊이로 구멍을 파냄으로써 그들이 이론적으로 서로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가까워진다는 것은 단지 상징적이었다. [272p]


8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여성 개념 미술가들의 경우
- 또 한 가지 대답으로, 똑같이 비판적인 작품을 만들었던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이 개념 미술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작품이 특히 감정을 배제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특권적인 상태에 있었기는 하지만, 페미니스트건 아니건 여성이 제작한 비판적인 미술은 대체로 ‘남성적인’ 미술에 반응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패러디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쿠바 태생의 미국 미술가 멘디에타(주요 인물 소개 참조)는 1972년 뒤샹에 대해 아이러닉한 경의를 표했다. 그것은 명백하게 정치적이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턱수염에서 잘라낸 털을 마치 「L.H.O.O.Q」(그림160, 161)에서처럼 자기 윗입술 위에 붙였다. 그녀가 언급했듯이 그것은 페티시즘(fetishism)이기도 하였다. “내가 행한 것은 그의 수염을 내 얼굴로 옮긴 것이다. 옮김을 통해서 나는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떼어내 다른 장소에 갖다놓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 사람의 힘을 내게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수염을 옮기는 아이디어를 매우 좋아했다.” 이것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뒤집어본 것이었다. 왜냐하면 레디메이드는 더 이상 얼굴이 아니라 털 그 자체였으며, 다시 말해 남성의 힘에 대한 상징 또는 페티시(fetish)가 곧 레디메이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캘빈 톰킨스(Calvin Tomkins)가 쓴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뒤샹은 여성의 체모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아마도 깨달았던 것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282~283p]
-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의 작업은 그러한 과정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쉽게 개념 미술로 인식될 수 있었다. 텔레비전이 종종 해답 제공자로 여겨지며 위조된 공평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로슬러는, 문화적으로 암호화한 가정들을 폭로하는 비디오를 만들어 그것들의 빈약함과 파괴적인 암시들을 지적했따. 「부엌의 기호학」(Semiotics of the Kitchen, 그림165)에서 로슬러는 부엌 조리대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알파벳을 열거하기 시작하는데, 각 문자를 위해 주방도구 한 가지씩을 들어올린다('Apron, Bowl, Chopper……'). 그러고 나서 포크로 찌르거나 숟가락으로 퍼내는 시늉을 하고, 금속으로 만든 큰 그릇에 달걀거품기를 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각 도구들이 사용되는 방식을 기계적으로 설명한다. 마지막 6개의 문자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도구 늘어놓는 것을 그만두고 칼로 공기를 자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부엌의 연장으로서의 여성과 기호로서의 여성(롤랑 바르트와 움베르트 에코 등에 의해 연구된 기호와 상징을 반영한 것이다)에 대한 스트레오 타입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287~290p]


9 타자를 바로보기
사진을 이용하는 미술가들
-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진으로 바라본 세계에 대한 지각이 매우 독특했다는 사실과, 미술이 우선적으로 사진을 통해 알려지게 된다는 사실은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1969년 스미드슨의 주장에 대한 미술가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의 반응은 사진이 점점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요즈음 미술이 수동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사색과 재료의 선정에 좀더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해보자. 미술작품은 이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방문되는 것 또는 사진에서 추출된 것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303p]


- 영국인 힐리어드(주요 인물 소개 참조)는 조각가로 시작했는데, 그의 많은 조각작품이 어떤 장소에 일시적이거나 특수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은 본질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사진을 찍기 위해 조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해 비로소 그는 실제 사진에 집중해보기 위해 전적으로 사진으로 옮겨가기 위한 논리적인 단계를 밟았다. 그리고 카메라가 어떻게 의미를 창조하는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르고, 초점을 맞추며, 노출시키고, 현상하는 카메라의 모든 메커니즘을 탐구했다. -중략-
힐리어드의 작품 「죽음의 원인? (3)」(Cause of Death? [3], 그림175)은 이미지를 어떻게 자르는가에 다라 다른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을 탐구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시트에 덮인 시체의 사진을 네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잘려 있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물에 빠진’(Drown)이라는 캡션을 통해 그것이 물가에 있다는 것과, ‘떨어진’ (Fell)이라는 말을 통해 그 위에 다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진짜 사진에는 네 개의 선택사항의 요소가 있었다. 이 작품도 캡션의 암시적인 힘의 영향을 받는다. 롤랑 바르트가 1964년에 쓴 「이미지의 수사학」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사진 이미지에는 사실 명확하고 특수한 의미가 없다. 즉 그것들은 ‘다의적’(多義的)이다. 이미지를 특정한 의미에 묶어두는 것은 제목·텍스트·캡션 등이다. 또한 그런 의미는 다른 의미를 부정하는 억압적 성격을 띤다. [309~310p]


- 한편 이론적인 차원에서, 카메라에는 무엇인가 내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든가 그것이 세상을 보여주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의식이 커가고 있었다. 사진이 포르노그래피뿐 아니라 감시체계를 위해서도 이상적인 매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것은 질문되어야만 한다. 거기에는 재현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시각에 대한 비판도 있다. [311p]


- 비록 진부하고 끊임없이 증식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펠드만에게는 이미지들이 기억과 함께 포착된다는 점에서 어떤 감흥이 있었다. 그랬다. 전에 살았던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파토스는 펠드만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이것은 그가 이후의 작품에서 집중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바르트가 지적했듯이, 사진은―어떤 기록과 마찬가지로―항상 과거이다. [314p]


- 색채는 휴일의 스냅 사진과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광택 나는 이미지들을 연상시키는 반면, ‘예술사진’은 거의 모두 흑백으로 되어 있다. 즉 리얼리티에서 거리를 둔 것은 순수하게 ‘미학적인’ 질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314p]


- 1970년 그들은 『익명의 조각들 : 기술적인 구성의 유형학』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석회 굽는 가마, 냉각탑, 용광로, 와인딩 탑, 급수탑, 가스탱크, 저장용 지하실 등의 기능에 관한 간결한 설명이 전면 크기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데, 언제나 사진은 인간적인 면은 전혀 없이 정확하게 찍힌 것이었다. 짧은 후기(後記)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에서 우리는 도구적인 성격이 강한 대상들을 나타냈다. 그것들의 형태는 계산의 결과였으며, 사진 현상과정 또한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양식상 특징이 없다고 여겨지는 건물이었다. 디자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성이 있다기보다는, 디자인이 없는 것이 바로 특징이었다.[316~317p]


- 베커 부부가 명확성과 성실함을 추구했고, 후블러가 그의 「가변적인 작품」에서 일종의 사기(詐欺)로 유희했다면, 프랑스인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는 노골적이었다. 그의 초기 사진집에는 파토스와 기만과 불확실성이 증식하고 있었다. 「1946~64년 크리스티아 볼탕스키의 10개 초상사진」(10 Portraits Photographiques de Christian Boltanski 1946~1964, 그림179)에는 어려서부터 성장할 때까지 여러 단계에 걸친 그의 모습이 들어 있다. 얼마나 귀여운 아이인가! 그러나 우리는 강한 의심을 품게 된다. 세 살 때는 그렇게 말랐던 아이가 다섯 살에는 어쩌면 이토록 포동포동할까?
각 그림에는 서로 다른 달에 사진을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배경의 나무들과 조명은 항상 비슷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14살 때는 어떻게 금발인가? 물론 어린아이의 모든 이미지는 볼탕스키가 1972년에 공원에서 찍은 것들이다. 마지막 사진인 열 번째 사진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작품에서는 20세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28세였다. 더 나아가 이 사진은 메사저가 찍어주었다. [317~318p]


- 미술가들은 이런 제도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작업해야 했다.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갑자기 ‘솔직한 진실’을 보게 설득할 수는 없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하도록 만들 수는 있다. 뒤이은 그의 작품들을 위한 패러다임은 슬로건이 아니라 세미나와 독서실 이었다. [327p]


- 우크라이나에서 작업하고 있는 보리스 미하일로프(Boris Mikhailov)는 버긴과 다르지만 놀라울 정도로 평행하는 주제를 나타냈다. 그에게 섹슈얼리티와 누드의 이미지는 소비에트의 청교도적인 억압 아래에서 자유를 의미했다. 28세 때 그는 ‘포르노’ 사진을 갖고 있다가 경찰에게 적발당해 엔지니어 직업을 잃었다. 그는 전업 사진작가가 되어 정부가 허용한 진부한 이미지들을 전복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여기에 소개한 키치(kitsch) 같은 여행객 사진(그림188)은 소비에트의 사회주의적 기념물 앞에서 찍은 세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러시아어로 ‘섬광’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말인 ‘루리키’(Luriki) 시리즈 가운데 하나이다. 미하일로프는 종종 죽은 자들의 사진을 채색해 컬러로 만들고 그들의 눈이 빤짝거리는 것처럼 그려 유족들에게 선사했다. [331~332p]


- 러시아혁명 시절, 이론가인 빅토르 슬로브스키(Viktor Shlovsky)는 ‘오스트라네니’(ostranenie : 낯설게 만들기)를 전략으로 제안했다. 1914년 그는 “미술은 우리가 생의 감각을 되찾고 돌을 돌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미술의 목적은 사물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만이 인간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고 썼다. 당시 사진에서는 이러한 혁명적인 접근이 알레산드 로드첸코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하일로프의 작품은 슬로브스키나 로드첸코에 의해 제안된 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낯설게 만들기’이다. 재현으로서만 세계를 알 수 있음을 깨달았던 미하일로프에게 이러한 낯설게 만들기가 일어나야 하는 것은 재현의 차원에서였다. [332p]


- 미국의 미술가 셰리 리바인(Sherrie Levine)은 매우 다른 유형의 차용방식을 탐구했다. 그녀는 1981년 전시에서 1930년대에 워커 에번스(Walker Evans)가 찍었던 사진을 다시 찍은 22장의 사진을 전시했다(그림190). 그러나 이것들은 ‘에번스’가 아니라 ‘리바인’의 작품이었다. 즉 행동과 그녀의 사고속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나는 사진을 사진 찍었다. 나는 자연과 문화과 우리에게 질서의 감각과 의미를 제공하는 욕망이 나타나 있는 사진들을 골랐다. 나는 열정적인 참여와 냉담함이 지닌 기품에 대한 나 자신의 동시적인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이미지들을 차용했다.”[334p]


- 바버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서로 단절시키는 월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인 현실에서 거리를 두는 버긴의 방식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텍스트와 이미지 사용에 관해 “그것은 희망적인 관측으로 비위 맞추려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비판을 결합시키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을 바라보게 만듦으로써, 관습적인 의미를 수많은 다른 의미를 수반하는 이미지로 치환시키도록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광고와 편집에서 볼 수 있는 텍스트-이미지의 완벽한 결합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녀는 광고의 대중적인 이념 및 라이프 스타일을 다룬 잡지들과 대립해서 작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확고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중적인 묘사에 길들여져 있음은 누구나 인정한다. 때때로 이러한 이미지들은 ‘미의 유사성’과 그들이 원하는 바의 집합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일종의 자유영역 속에 스스로 자리잡고 일상생활의 세속적인 특질들로 보상받게 해줄 뿐 아니라, 호화롭고 황홀한 매력의 소비라는 흔들림 없는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제공한다. 만약 당신과 내가 이러한 이미지들과 스트레오 타입에 의해 쉽게 영향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슬프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336~337p]


- 사진들은 레디메이드였으나, 크기의 확대와 문맥이 변화에 따라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339p]


- 결국 사진 사용에 대한 개념 미술의 위대한 영향은 사진을 자명한 진술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로서 기능하게 만들어왔다. 물론 개념 미술은 사진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것은 변화시켰다. 그것은 또한 관람자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보는 행위를 더 많이 깨닫게 만들었다. [339p]


- 추상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일반적인 것에서 자서전적인 것을 향한 이동은 지난 10여 년 동안 개념 미술의 기치 아래 제작되어온 많은 작품들에서 공통적이었다. 중요한 문제는 바로 정체성의 문제였다. 즉 ‘그것은 무엇인가?’보다는 ‘나는 누구인가?’에 더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 이래 특히 여성들이 제작한 미술은 비판적이고 비표현주의적인 미술영역에 자기고백적이고 자서전적인 해설을 도입시켰다. 마사 로슬러에서 조지나 스타에 이르기까지, 카메라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그 이미지를 관람자들에게 되돌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여성들이었다. [340p]


-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카메라를 든 미술가가 그들의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함으로써 항상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하는 미술가로서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341~342p]


10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1980년 이후 언어를 사용하는 미술가들
- 1995년 한 젊은 여성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등 쪽의 칼라 부분에 녹색으로 씌어 있는 글말고는 아무 장식도 없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거기에는 ‘아무도 나를 가질 수 없다’(그림198)라고 씌어 있다. 시각적으로는 아무런 특징이 없다. 그러나 호기심이 강한 사람은 곧 그 글이 신경을 건드리거나 생각하도록 자극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개 티셔츠의 등 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제조회사 이름이지만, 여기에서는 이러한 생략된 메시지를 써넣었다. 너무 진부한 문구가 아닌가? 물론 아무도 우리를 쇼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한 상표가 있는 어떤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그 상품의 광고와 마케팅에 따라 명명되고 포착되며 심지어 소유되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 여성이 입은 특별한 티셔츠는 은밀한 소유의 유형에 대한 거부를 나타낸다. 국가의 지배권과 통제력이 점점 더 커가고 있는 시대라 할지라도, 신체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345p]


- 그래서 ‘지음’(defacing)이라는 말에는 암시적인 의미가 있다. 문장을 지운다든가 줄을 긋는 것은 어떤 사람의 정체성 또는 지위를 전복시키고 훔치거나, 사진에서 얼굴을 오려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46~350p]


- 이름짓기도 중요하다. 세상의 사물들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곧 이름을 짓는 행위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름을 부여하는 행동을 통해 그는 동물들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름짓기는 거의 마술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세례 같은 의식이 치러지기도 하며,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인용한 것처럼 록 음악에서도 이름이 지닌 마술적인 요소를 노래하기도 한다. 즉 ‘글로리아’를 충분히 여러 번 말하는 것이 그녀의 존재를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믿듯이 말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자각을 성취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내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 ‘나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이다.[350p]


- 처음부터, 언어를 기본으로 한 미술은 그것이 ‘시각적인’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만큼 언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1970년 전시에서 보크너는 검은색 벽에 흰색 분필로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고 크게 썼다. 스미드슨도 그의 드로잉 「언어 무더기」(A Heap of Language, 그림 202)에서처럼 물질로서의 언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누군가가 미술을 순수한 정보로 제작하고 싶었다면, 처음에는 언어가 적당한 수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종이, 잉크, 컴퓨터 스크린, 말이 전달되는 공기 등의 물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거리의 대형 광고판, 지침 안내서, 친구들간의 대화와 같은 문맥 안에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1970년대 이후로 언어를 사용해온 미술가들은 이러한 문맥을 차차 현학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활자체, 글자의 크기, 색채, 그밖의 다른 요소들처럼 언어가 시각적으로 나열되는 방법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351~354p]


- 기계로 짠 모직 천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림206)이 씌어 있다. 그러나 썼다기보다는 짜여진 이 문장은 독특한 사고를 발생시키는데, 우리는 글을 사고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뜨개질과 똑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뜨개질은 ‘작갗가 되는 방식이라기보다 시간을 때우는 소일거리로 여겨지며, 게다가 종종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357p]


- 바움가르텐은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한 기념비」(Monument for the Native Nations of South Americh, 그림211)에서 처음부터 좀더 직접적으로 접근했다. ‘도큐멘타 VII'에 전시된 이 작품은 공공건물 위에 새겨진 유명한 인물들의 목록처럼 보인다. 기념비들은 공통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바움가르텐의 작품은 모순적이다. 서구에서는 여기에 있는 ’남바‘ ’보로로‘ '사반테’ ‘토바’ ‘아레쿠나’와 같은 말들이 공통의 기억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이것들은 남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의 이름들이다. 기념비는 대개 영구적이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으며, 기념비가 정복자를 기리는 것이 대부분인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정복된 자들을 기념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러닉할 수밖에 없다. 정복자들이 처음 행한 일은 재명명하는 것이었다. [361p]


- 런던 지하철 시스템의 원래 지도는 도로 위의 경로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지하철 노선이 더 많이 개통됨에 따라 그 지도는 읽기 힘들어졌고 훨씬 모호해졌다. 해리 백(Harry Beck)은 예전에 사용하던 지도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각 노선을 다른 색으로 구별하고 갈아타는 지점을 명확하게 표시했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도, 지도 제작자도 아닌 일시적인 실직상태에 있던 전기 기술자였다. 그의 지도는 전기회로 도면, 즉 에너지 지도의 유형에 근거한 것이었다. 1992년 사이먼 패터슨은 그것을 차용해 천문학적인 용어인 ‘큰곰자리’라는 제목을 다시 붙이고, 각 노선에 철학자·코미디언·축구선수·성인(聖人)들의 이름을 따서 재명명했다(그림124). 재미는 두 개의 노선 또는 시스템이 만났을 때 시작된다. 우리는 성인들의 노선과 축구선수 노선이 만나는 곳의 역이름이 ‘개리 라인커’(Gary Lineker)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페어 플레이로 명성을 얻었던 영국 선수의 이름이다. 다른 교차역들의 이름은 그리 설명적이지 않다. 철학자 노선이 할리우드 배우 노선을 만났는데 왜 키에르케고르가 나타나는가? 몇몇 노선은 연대기적 또는 알파벳순으로 읽히는가 하면, 다른 노선들은 언어적인 연상이나 의식의 흐름을 따르기도 했다. [365p]


- 1960년대 후반에는 개념 미술 속에 정치적인 것들이 ‘암시’되어 있었던 반면 이제는 그것들이 자주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372p]


11 스타일 폴리스(Style Police)는 누구인가?
최근 미술의 논쟁점들과 문맥들
- 1990년대에는 ‘개념적’이라는 요어가 기발한 또는 미친 듯한 이라는 말들과 동의어가 되었으며, 그것은 지적이거나 어려운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의 개념 미술가들이 드러내놓고 비난해왔듯이 짧은 명성을 위해 눈꼴사나운 노력을 하는 쇼맨십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 때로 무례함이 미술적 전략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매체의 관심을 얻는 방법으로 사용된 것인지 불확실했다. 심지어 두 가지 모두를 위해 사용된 것인지도 모른다. 대미언 허스트(Damien Hirst)만큼 이러한 설명에 잘 들어맞는 미술가는 없을 것이다. [379p]


- 1990년대의 미술세계는 3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들과 너무도 비슷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제9장의 끝부분에서 이미 말했듯이, 웨어링의 사진작품은 이와 유사한 후블러의 작품보다 더 눈에 띄었지만 문제의식은 훨씬 약했다. 또한 제10장에서 보았듯이, 자우그의 언어작품은 앞서 만든 로렌스 웨이너의 비슷한 작품과 비교해볼 때 더 우아하면서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 [382p]


- 여기에서는 코스의 작품과는 달리 감각적인 경험이 개념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로웠다. [383p]


- 대개 회고전에 필요한 초기의 작품이 다시 제작될 경우, 그것은 종종 더 깨끗하고 더 우아해지곤 한다. [389p]


- 그가 미술 생애를 시작한 작품들은 마치 쇼윈도에 여전히 진열되어 있는 물건처럼 번쩍번쩍 빛난다(그림230). 이러한 레디메이드들은 매력적인 소비상품의 아우라를 갖는다. 쿤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타인바흐는 진열이 전부인 것처럼 선반 위에 소비적인 물건과 장신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선반 그 자체들이 진기하게 멋을 부린 오브제였으나(그림231), 1980년대에 그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아마도 쿤스의 독창성은 미술가인 자신을 미술 대상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수정되고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그의 신체는 결국 레디메이드처럼 보였다. 스타인바흐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할리우드와 미술세계 사이, 또는 영화 스타와 미술 스타 사이의 옹색한 구별이다. 연예산업의 발전은 주체가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의미를 가지도록 조건을 만듦으로써, ‘스타’를 그 스스로 만든 욕망의 대상이 되도록 조장한다. 그럼에도 가장 훌륭한 미술가 몇몇은 문화의 신화 만들기 작용에 반영된 그들 작품속에 비판적인 과정을 통합시켰다.”[394p]


- 브라질의 미술가 잭 레이너(Jac Leirner)는 여행 다니면서 쇼핑 봉투들을 모아 그것들을 꿰매어서 거대한 ‘그림들’을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정말로 기호가 기표들을 대신했다. 우리는 쇼핑할 필요가 없다. 단지 쇼핑에 관한 기표―에르메스·아르마니·베르사체라는 이름이 씌어진 쇼핑백만 전시하면 되는 것이다. [395p]


- 관람자들은 이러한 평범한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미술관에 있는 모든 물건도 한때는 이와 비슷한 연상들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역사, 오래 사용해서 생긴 자국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미술관은 단순히 사물들의 미술관이 아니라 체험된 삶의 미술관이 되었다. [404p]


- 이 경우 토로니는 화랑에 붓작업을 통한 작품들을 설치했을 뿐 아니라 화랑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면서 화랑 뒷문들에도 그렸다. 화랑 안에서는 그의 작품이 명백히 미술이고 또 미술로 볼 수밖에 없는 반면, 화랑 밖에 있는 것들은 전복적인 무엇인가로 남아 있었다. [406p]


- 1960년대 개념 미술가에 대한 모범적인 상(像)이 철학자였다면, 1990년대의 미술가들에게는 연구자가 이상적으로 보였다. [416p]


- 사실 요즘 미술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은 대안적 공간들과 작은 잡지들이 넘쳐난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함께 작업하는 미술가들의 개념이 보편화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개념 미술의 중요 논점은 오브제나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에 있으며, 소통과 어떻게 사람들이 행동하는가에 대한 강조에 있다. [419p]


- 마이클 뉴먼이 주장하듯이, 또한 나도 그렇게 믿고 있듯이 개념 미술이 미완성의 프로젝트라면, 그것을 ‘요약’하는 것 또한 지금 이 시점에서 불가능할뿐더러 불충분하기도 하다. 이 책이 계속해서 철학과 더 많은 관계를 가진 것은 우리가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미술작업에 대한 확장된 고려로 끝을 맺으려 했다. [422p]


- 모든 개념 미술가들처럼 바이아스도 우리를 질문하도록 이끈다. 또한 우리를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세계 속의 질문으로 이끈다. 개념 미술의 유산은 역사적인 양식이 아니라 의문하는 습관을 심어놓은 것이다. 주체, 즉 독자 또는 관람자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이 되다는 것은 바로 의문하는 행위 안에 있다. 따라서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대답이 ‘yes'인지 ’no'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파리의 대형 광고판에 54개의 똑같은 포스터를 붙였던 타냐 무로드의 1978년 프로젝트(그림256)에서처럼, 아마도 대답은 ‘NI',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423~4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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