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한글을 쓴지 31년이 지났다. 한글 폰트를 쓴지는 정확히 언제부터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처음 컴퓨터를 만져봤던 초등학교 1학년(당시는 국민학교) 즈음이였던 것 같다. 그 당시만해도 MS-DOS시절의 무언가 였기 때문에, 폰트를 임의로 바꾼다거나- 하는 등의 문제를 인지도 할 수 없는 나이기도 했고, 그 위대한 애플마저도 변방의 언어까지 신경쓸 수 있는 시대는 아니였다.
본격적으로 한글 폰트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은 종종 수행평가 과제 제출을 위해 작성했던 한글문서에 적용하거나, 중학교 3학년 시절 갓 배운 포토샵 실력을 구현해볼 양으로 독서감상문 표지에 중2병 디자인을 실험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가장 그럴듯한 서체는 ‘안상수체’정도가 다 였던 것 같다. (특히나 그때는 타이포 그래피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고, 어딘지 ‘특이’한 것이 유일한 품평기준이였던 탓에-)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인 그 당시에도 영문폰트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well-design된 것들이 많았고 그 어린아이의 눈에도 좋아보였던 것 같다. (굳이 영어를 쓸 데가 없어서 이름이라도 영어로 써서 제출한 걸 보면-)
그렇다. 한글은- 참으로 폰트로 제작하기에 어려운 문자다. 초성, 중성, 받침이 따로 놀고 경우의 수가 대-소문자로 구별되는 영어처럼 최대 복잡도가 2n 수준으로 표현되는게 아니라 n의 3제곱 수준이다. (심지어 쌍자음과 쌍자음 받침까지 생각하면…) 그에 비해 사용하는 인구는 얼마나 적은가- 그나마도 조선땅이 반으로 갈려 북한과는 독자적인 폰트를 쓰는 마당에 5천만 정도로 사용인구가 줄어들어 버렸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냐면,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경우 말은 달라도 문자 표기는 영문권 알파벳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특수문자 몇개만 들여온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프랑스어, 독일어 모두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알파벳은 전세계적 공용어인 ‘영어’보다 훨씬 범용성을 지닌다. 이런 토대가 좋은 폰트를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의심치 않는다. 심지어 돈이 안되더라도 - 좋은 서체디자이너로서 한 목소리 낼 수 있는 ‘명예’의 크기 자체가 다르다. Helvetica나 Times New Roman같은 기본 영문 폰트들이 가지는 위상은 실로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한글폰트 제작자는 영문도 제작해야한다. 한국사람들은 (특히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경우에는) 같은 서체로 영문을 표기해야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나눔폰트 시리즈도 영문폰트를 지원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나 의식 저 깊은 곳에는 우울한 동북아시아의 식민주의적 사상이 심어져 있다.) 한글폰트 제작만도 어려운데 영문은 덤으로 하듯 당연히 해야하는 풍토가 제작을 어렵게 만든다. 불법 다운로드 사용은 말할 것도 없고-
안삼열체를 알게된 것은 후배놈 하나와 우연히 들른 ‘타이포 잔치’에서 처음봤다. 보는 순간 보자마자 ‘어머 이건 사야해!’라는 생각이 급하게 들었거니와, 폰트 판매처도 알 수 없던 나로서는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정가 130,000원을 주고 구매하였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설프게나마 자체제작 폰트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서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라이센스를 window용으로 사는 바람에 mac에는 깔지도 못하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각종 출판사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특히 표지디자인에 널리 쓰이는 것을 보면서 안삼열씨(얼굴도 모르지만-) 살림도 좀 나아졌으려나- 라는 기대를 하게된다.
사실 이 정도 마스터 요다급 실력자를 내가 걱정해야할 상황이 아닌데 걱정한다는 이 아이러니함은 세종대왕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구한말 한자표기를 과감히 버린 것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차라리 한자 표기를 따라갔으면 어땠을까 한다. 그러면 뜻과 표현이 괴리된 지금의 상황은 최소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보핍보핍- 같은 단어가 설쳐다니지는 못했겠지…)
한글의 구성원리 자체는 기하학적이여서 꽤나 고딕체가 어울리는 문자이기도 하지만, 그럴경우 가독성이 급격히 저하되는 문자이기도 하다. 영문폰트야 고딕으로 쓴다해도 경우의 수는 소문자 또는 대문자만 구분해서 읽으면 되지만 한글은 폰트가 작거나 모양자체가 너무 틈이 없이 제작된 경우 가독성이 급격히 저하된다. 그러다보니 폰트로 뭘 새롭게 만들기가 어려운 것 같다. 조금만 어떤 기준치에서 벗어나도 기능성이 저하되기 때문에.
어쨋거나 안삼열체는 정말 수작이다. 비록 본문용에 사용하기에는 굵은 획과 가는 획의 대비도가 너무
커서 불가능에 가깝지만, 각종 BI나 책표지, 본문제목, 장제목으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영문폰트도 지원하고 있어 따로 어울리는 영문폰트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여기까지 해결한 ‘그’가 제발 스포츠카도 몰고 다니고 떵떵 거리면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옳은 가치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 모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딛고 만들어 냈을 때 인정할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