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무라카미 하루키 | 옮긴이 / 김진욱
슬픈 외국어
초판 1쇄 - 1996년 3월 5일
초판 24쇄 - 2004년 12월 20일
지은이 - 무라카미 하루키
옮긴이 - 김진욱
펴낸이 - 전성은
펴낸곳 - (주) 문학사상사(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91번지(138-858)
- 미국을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면, 그저 이기고 또 이기고 승리에 휩싸이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좌절했다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나라는 냉전에서도 이겼고 걸프전에서도 이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은 10년 전에 비해서 훨씬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때문에 어느정도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시점에서는 국가나 개인이나 때로는 좌절이나 패배라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을 대신할 만큼 명확하고도 강력한 가치관을 내놓을 수 있는 다른 나라가 현재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 일반적인 미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은 피폐(疲弊)의 감각과 현재 일본인들이 느끼고 있는 답답증은 동전의 앞뒤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단순하게 말해 버리면 명확한 이념이 있는 피로와 명확한 이념이 없는 불편한 심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7~28p]
- 언덕을 넘는 것 자체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지만, 언덕을 넘고 난 뒤가 괴로운 것이다. 여기만 잘 넘으면 그 다음에는 그리 대단한 언덕이 없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자신을 격려하며, 젖먹던 힘까지 짜내며 언덕을 넘는다. 그러고 나서 한숨 돌리고 이제부터는 평탄한 길이니 중심가까지 곧장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피로가 와장창하고 들이닥치는 것이다.
이 피로에 지친 느낌은 사람에 비유하면 40세의 액년[厄年, 역주 : 음양도에 따라 사람의 일생중 재난을 당하게 되는 해, 40세도 액년이다] 비슷하다. 20대, 30대를 힘겹게 넘기고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싶을 무렵에, 느닷없이 밀려오는 그런 피폐한 느낌 말이다(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32p]
- 중심가가 끝나면 그 너머에는 마당이 딸린 예쁜 단독 주책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집은 잘 손질되어 있고, 잔디밭도 깔끔하게 깎여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눈낄을 끌 만한 호화 저택도 없지만, 눈길을 끌 만큼 초라한 집도 없다. 마치 타인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33p]
-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해머로 때려 주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그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차는, 왠지 모를 불길한 폭력의 분위기를 풍겼다. 거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체적인 메시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무엇인가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있던 아저씨도 지나가던 그 선수의 질문에 “아니, 이건 일본차가 아니에요”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아니……음(우물쭈물)” 하고 뜸을 들였던 것이다. 그 속에는 “이게 일본 차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이라는 의식이 담겨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 우물쭈물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고, 글로 쓸 수 없는 메시지인 것이다. [35p]
- 말하자면 버드나 밀러처럼 텔레비전에서 열심히 광고하는 맥주는 주로 노동자 계급용이고, 대학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학구적인 사람은 좀더 고급이고 지적인 맥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처럼 신문에서 맥주에 이르기까지 어떤 브랜드는 적절하고 어떤 브랜드는 부적절한지가 명백하게 구분 지어져 있다. [48p]
- 어쨌든 《뉴욕 타임스》를 구독하면 되고, 어쨌든 《뉴요커》를 구독해 두면 된다(주위를 둘러보면 구독만 해놓고 읽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어쨌든 오페라를 들으면 되고, 어쨌든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이시구로와 에이미 탄의 책을 읽어 두면 되고, 어쨌든 기네스 맥주를 마시면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오페라 따위는 유행이 아니야 지금은 가부키라구, 하는 식이다. 정보가 음미를 앞서고 감각이 인식을 앞서고 비평이 창조를 앞선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피곤하다.
나는 원래가 그런 최첨단 파도 타기 경쟁과는 관계없던 사람이지만, 그런 식으로 신경질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피곤하다.
그것은 완전히 문화적 화전 농업이다. 모두가 와 하고 달려들어서 하나의 밭은 다 태운 후에 다음 밭으로 옮겨 간다. 그 후에 얼마 동안은 풀도 자라지 않는다. 원래는 풍부하고 자연적인 창조적 재능을 지녀야 할 창작자가,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자신의 창작 시스템의 근원을 파헤쳐 나가야만 할 사람이, 태워지지 않고 살아 남는 것만을 염두에 두거나 그저 단순히 남에게 잘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며 활동한다. 그것을 문화적 소모라고 부르지 않고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51p]
- 결국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일본에서는 지적 계급성이라는 것이 거의 해체되어 버렸다. 전후(戰後) 얼마 동안은 그런 것도 어느 정도는 시스템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산주의며 음악 감상실이며 순수 문학 같은 것의 소멸에 호응하듯이 어느 사이엔가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다.
지적 계급성이 사라져 버리면 계급적 스노비즘(역주:속물 근성·신사인 체하기·학자인 체하기) 같은 것의 존재 의의도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거라곤, 계급적 스노비즘의 잔존 기억을 대중에게 돌려 ‘베를린 장벽의 파편’처럼 상품으로서 조금씩 팔아 치우고 있는 거대 유통·정보 자본뿐이다.
사회의 대중화·평준화야말로 역사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미국 사회와 일본 사회를 비교해 보면,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식의 일본 사회 쪽이, 좋건 싫건 역사적으로 훨씬 진화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53p]
- 그 같은 지적 특수 사회가 미국 네에서 앞으로 얼마만큼 오래 살아 남을 수 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몇몇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조만간 소실되어 버릴 거라는 게 많은 이의 일반적인 예상이다. 그런 사회를 하나의 사회로서 유지시킬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실 미국 대학은 전국적으로 경영 면에서 크나큰 벽에 부딪히고 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 MIT 같은 초엘리트 대학인 경우에는 아직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지만, 일반 대학들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비효율적인 강좌는 점점 폐강되고, 교수와 직원들의 해고도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중략-
그런 식으로 미국의 대학도 언젠가는 오늘의 일본 대학과 마찬가지로 점차 대중화·평균화되어, 프린스턴이나 하버드 같은 고고한 성(城)이라 할지라도 크게 변화되어 갈지도 모른다. 대학의 학구적이고 비세속적인 분위기는 점차 희박해지고, 좀더 효율적이고 좀 더 대량 생산적인 색채를 띄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바로 추세라는 것이고, 어느 누구의 힘으로도 그것을 막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54~55p]
- 하긴 농장이라고 해도 로스 씨 부부가 그 곳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농부는 아니다. 그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그건 그들의 복장이나 생활 방식, 말투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들은 대도시의 고급 맨션에 살며 재규어나 BMW 같은 고급 차를 타고 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타입의 사람들로, 어디까지나 ‘취미’로 농장에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실제로 남편은 필라델피아 근처로 출퇴근하며(아마 무슨 전문직일 것이다) 시내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 그의 아내가 전화로 말했듯이 그들은 자기 집에서 말이나 소를 기르고는 있지만, 그걸로 뭔가를 생산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 부부에게 중요한 것은 ‘농장에 산다’는 자세다. 도회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산다는 사실인 것이다. 굳이 어떤 범주에 넣는다면 ‘포스트 여피족’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생활 방식에 알맞을 것도 같다. [63p]
- 요즘은 경기가 주춤한 탓에 그 정도로 급격하게 환경이 파괴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장기적으로 내다보면, 미국에서 개인 규모의 농업은 쇠퇴하는 추세여서, 전부터도 그랬듯이 큰 농가가 부동산 업자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늘 그런 움직임을 주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걸 되도록 그 모습 그대로 후세에 물려줄 것. 변화는 최소한으로 억제할 것. 이곳의 환경에 자신들을 포근히 녹아들게 할 것.”―이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생활 방식이다. 여기에는 “이것이야말로 미국 본래의 모습이다”라는 강한 신념이 배어 있다. [66p]
-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이제 도시에 사는 남미 계열과, 교외에 사는 백인이라는 두 개의 사회, 아니면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나라는 마약과 총이라는 두 가지 중병에 의해 그 밑바닥부터 썩어 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마약에 대한 집중 단속을 공약으로 내세워 왔지만, 그런 정부 시책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문제는 거대하고 두꺼운 벽이 되어 사람들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어설픈 ‘사회 의식’ 따위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비하면 예전에 가장 중요했던 사항인 월남전 반대 운동이나 공민권 운동은 정말이지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현재 미국의 지식인들이 안고 있는 딜레마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 있다. [68~69p]
- 자원 봉사나 사회 활동 같은 걸 하면 대단하고, 안 하면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문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압축시킬 수 있는지가 될 것이다. [69~70p]
- 그러나 그 그림들이 상당히 예술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 작품이 될 수는 없다. 그 두 개의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건 아주 얇은 벽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연히 벽이 존재한다. 그런데 젤다의 그림은 그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젤다는 문장에 있어서도,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열중했던 춤에 있어서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스콧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젤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젤다는 지독한 무력감 속에서 광기의 세계로 가라앉게 된 것이다. 굉장한 재능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적절하게 뽑아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지 못한 인생은, 젤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70~71p]
- 그런 건 ‘윗사람 마음대로’가 아니라 ‘알아서 긴다’라고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쓸 정도라면 출발 세 시간 전이나 먼저 와서 무의미한 일에 동원되어야 하는 참가자들의 입장도 고려해 보았으면 한다. [81p]
- 하지만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는데, 42킬로미터를 달리는 일은, 결코 따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스릴 넘치는 비일상적이고도, 창조적인 행위다. 달리다 보면 평소에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도, ‘뭔가 특별’해질 수 있다. 다만 그 ‘뭔가 특별’한 것을 타인에게 말로 전하려고만 하면, 어찌 된 셈인지 지극히 평범하고 따분해지는 것이다. [87p]
- 미국 교외의 보통 집들은 모두 규모가 상당히 크다. 400평에서 500평 정도 되는 크기에,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있고, 현관 앞에 차를 댈 수 있는 긴 길이 있으며, 대개의 경우 담은 없다.
이런 교외 주택의 대부분은 지역별로 개발된 고급 분양 주택으로 ―영화<E·T>나<폴터가이스트>에 나온 것 같은 집들을 상상해 보면 된다―전부터 있던 지역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근처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일종의 블랙 박스라고 해도 될 정도다.
물론 일본의 교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좁은 분양 주택에 비하면 질적인 면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집 한 채 한 채가 차지하는 부지가 넓은 만큼 거기서는 왠지 깊은 고독감과 단절감 같은 것들을 엿볼 수 있다. 넓은 부지에 집 한 채가 외따로 서 있기 때문에 옆에서 보면 어딘지 무방비 상태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일본의 집들은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 대신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라는 익명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미국은 완전히 반대다. 넓은 만큼 도망갈 곳이 없고 무슨일이 있으면 정면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97p]
- 그들은 대부분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도시를 피해서 교외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포에서 해방된 건 아니다. 교외에는 교외의 공포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런 보통 사람들의 대부분은 주택 융자금에 쫓기고,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을까 떨고, 끝없는 경기 후퇴에 불안해 하고, 미국의 이상(理想)이 변질된 데 대해 당혹해 하고, 교육비와 의료비의 폭등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은행 강도가 되어 버린 그 변호사처럼 뭔가 하나 잘못되면 어쩌나, 한 발짝이라도 헛디디면 어쩌나……하는 막연한 공포심이 있는 것이다. 내게는 ‘아주 평범하게 지내면 대개는 잘 되어 간다’는 낙관성―중산층에게는 최고의 보물―이 점점 효력과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100p]
- 우리 집 근처의 국도를 따라 아주 크고 멋진 쇼핑 몰이 있는데, 그 곳은 섬뜩할 정도로 한산하다. 처음에는 고급 브랜드의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불경이 탓에 장사가 잘 안 된 탓에 최근 1년 반 사이에 마치 이가 빠진 빗처럼 가게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 처음 왔을 무렵에는 랄프 로렌도 있었고, 카사렐도 있었고, 고급 오디오 상점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마치 사람이 자취를 감춘 고스트 타운 같다. 어느 윈도우를 봐도 안은 텅 비어 있고, 유리에는 ‘개점 예정’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을 뿐이다.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분수의 물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으스스한 풍경이다. 아니, 거기에는 으스스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원래 사람을 모이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기에, 사람이 없으면 지금 서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왠지 위태롭게 생각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스티븐 킹이라면 틀림없이 이런 걸 공포 소설로 구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101p]
- 그러나 내 생각에, 아마도 마샬리스 일파가 생각하는 창조성과 키스 자렛이 생각하는 창조성은, 이름은 같아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동명 이인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키스 자렛과 같은 60년대 세대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조 행위란 대부분의 경우 선배인 보수적 연주가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이기느냐 지느냐, 부정할 것인가 부정될 것인가의 치열한 전투였다. 거기에서 그가 말하는 ‘창조성’이 생겨났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키스 자렛이라는 연주가의 ‘창조성’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거기에 ‘창조성’에 대한 희구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흔쾌히 인정한다.
하지만 마샬리스 일파의 세대에게 재즈라는 음악은 반항할 상대가 아니라 감동하고 감탄함으로써 배워 나가는 음악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재즈는 어떤 의미에선 이미 한번 닫혀 버린 고리다. 그것은 오래되어 멋진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 보물 상자와 같다. 그들은 그런 발견에 커다란 기쁨을 맛보고 스릴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젊은 흑인 뮤지션“의 뿌리 찾기고, 그 나름대로 앞서 가는 행위다. 재즈에 대한 관념이나 발상 자체가 키스 자렛 세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 근본적인 차이를 키스 자렛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샬리스 세대에게 “반항하라, 그리고 싸워서 쟁취하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런 말을 하다니, 도대체 무엇에 반항하란 말이냐”고 그냥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115p]
- 미국에서는 자기 소개를 하는 것도 어지간히 힘들다. 아무튼 이곳에는 ‘기대되는 모범 답안’이 확실하게 있어서, 그 답안을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기대되는 틀에 한번 들어맞으면, 그 다음부터 웬만한 건 눈감아준다.[149p]
- 여기 하나의 작은 도시가 있다. 도로를 따라 계속 가면 이윽고 건물이 즐비한 거리는 끝난다. 조금 더 지나가면 변두리에 거창한 종합 쇼핑 센터가 나온다. 그 안에는 복합 영화관이 있고, 물품 보관소가 있고, 버거킹이 있고, 편의점이 있고, 비디오 대여점이 있다.
좀더 지나가면 숲이며 강이며 평범한 자연이 펼쳐진다. 그 지대를 빠져 나가면 이윽고 다시 다른 거리가 나타난다. 그 변두리에는 물론 또 종합 쇼핑 센터가 나타난다. 또 평범한 자연이 있다. 그리고 또 다음 거리가 있다……어쨋든 이런 것의 끝없는 연속이다.
거리와 거리 사이에는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렇지만 대개는 비슷하다. 특히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지형이 밋밋하고 평탄해서 자연이 단조로운 만큼,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훨씬 크고 훨씬 깊어진다.
한없는 그런 거리와 자연의 끝없는 연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산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문득 빠지게 된다. 그런 무력감은 미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다. 유럽에서도 맛볼 수 없고, 일본에서도 맛볼 수 없는, 절대적인 아메리칸 오리지널이다. [192p]
- 미국 영화가 그렇게 재미없게 되어 버린 첫 번째 이유는, 할리우드가 두드러지게 보수화됐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독창적인 작품이 적고, 이거나 저거나 전에 어떤 영화에선가 본듯한 것 뿐이다. 보잘 것 없는 시리즈물, 재제작물의 홍수.[199p]
-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지만, 일단 어떤 압도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 경험이 압도적일수록 그것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심한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게 아닐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당시 자기가 생생하게 느낀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현할 수 없다는 스트레스는, 당사자에게는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건 내 경험을 토대로 말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이런 식으로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하면 막상 책상 앞에 앉아도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아주 선명하고, 현실감 있는 꿈을 기억하면서, 남에게 설명할 때의 초조함과 비슷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설명을 해서 그때의 감각을 누군가에게 전하려 해도,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건 자꾸만 새어나가고 사실과는 어긋나게 된다.
그와는 반대로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작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걸 남과는 다른 관점에서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체험들은 뭔가 다른 형태로 바꿔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좀더 소설가 쪽에 가까운 것 같다. [205~206p]
- 예를 들어 가게를 보고 있으면, 매일 많은 손님이 온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다 내 가게를 마음에 들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소수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 명의 손님 가운데 한두 사람만이 가게를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 한두 명이 당신이 하는 일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가게에 와야겠다고 생각해 준다면, 가게는 그런대로 유지되어 나가게 마련이다.
열 명 중에 여덟이나 아홉 명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열 명 중 한두 사람만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것을 가게를 운영하면서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 정말이지 뼈를 깎듯이 그것을 배웠다. [212p]
-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아무데도 속하지 않는 전업 작가가 되었으니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라카미 씨는 베스트 셀러를 쓴 작가니까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거지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에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개중에는 있지만(그런 발상이나 말투를 일본에서는 진저리칠 정도로 경험했었는데, 왜 그런지 미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기본적인 성격의 문제다. 나는 책이 이 정도로 많이 팔리지 않던 시절부터 계속 일관성을 갖고 지금처럼 해왔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약간 부드러운 협조적 성격이 결여된 자세는, 내 의도와는 달리 간혹 주위에 시끄러운 문제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하긴 아내가 뒤에서 찌르고 싶을 정도의 인간이니,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도 모르겠다. [236p]
- 왜냐하면 5년이든 10년, 20년이든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사람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변하지 않는 게 오히려 훨씬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변화를 가능케 한 당신이라는 사람은 일관된 불변의 존재로서 그대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로 “사람이 변했다”고 해도, 그것이 도대체 어떤 측면을 지적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정의해 주지 않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269p]
- 일본어가 굉장한 언어로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생활에서 배어 나온 언어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어라는 언어의 특질 그 자체가 우수해서 그런건 아니다.
모든 언어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똑같다는 게 언제나 변함없는 나의 신념이다. [272p]